영국 남서쪽 끝자락, 콘월반도에 팰머스라는 항구도시가 있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야자수 흉내를 내는 이국적인 식물원에 감탄하며 찾아오는 이 조용한 소도시에서, 1789년 4월 26일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 하여 로버트 웨어 폭스(Robert Were Fox, 1789~1877). 아버지 이름도 똑같이 로버트 웨어 폭스(1754~1818)였다는 사실에서 이미 이 집안의 고집스러운 개성이 느껴진다. 이름 짓기도 귀찮았던 걸까, 아니면 아들도 나처럼 훌륭하게 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을까. 덕분에 역사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어린 로버트 웨어 폭스(Robert Were Fox the Younger)'라 부른다.
폭스가문은 퀘이커교도들이었다. 퀘이커교는 17세기 영국에서 조지 폭스(1624~1691)가 시작한 기독교의 한 갈래로, 성직자도, 화려한 예배의식도 없이 오직 내면의 신성함을 믿는 소박한 신앙공동체다. 아, 물론 로버트 웨어 폭스는 조지 폭스와는 아무 혈연관계가 없다. 성이 같을 뿐.
퀘이커들은 당시 영국사회에서 흥미로운 위치에 있었다. 성공회인 국교회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학에 들어가거나 공직 등 의회에 진출하는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게 뭐가 남았겠는가? 장사와 과학이었다. 이 역설적인 차별이 결과적으로 영국 산업혁명의 상당 부분을 퀘이커 상인과 발명가들이 이끌게 만들었다는 것은 역사의 대표적인 아이러니 중 하나다. 박해받은 소수자가 혁신을 이끈다는 이 오래된 공식은, 오늘날 한국에서도 충분히 곱씹을 만하다.
광산에서 지구 내부를 읽다
폭스는 가업인 선박중개업과 구리광산업, 주석제련소를 운영하는 틈틈이 과학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연구는 딱 자기 코앞에 있는 것에서 출발했다. 광산. 1815년부터 40년에 걸쳐 그는 콘월의 깊은 광산갱도에서 정밀한 측정을 반복했다. "땅속 깊이 내려갈수록 더 덥다"는 것을 우리는 상식으로 안다. 하지만 이것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측정하고 수치로 증명한 사람이 바로 폭스였다. 지구 내부온도가 깊이에 따라 일정하게 올라간다는 사실, 오늘날 '지열기울기(geothermal gradient)'라 부르는 이 발견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생각해보라. 1815년이다. 조선에서는 순조(재위 1800~1834) 임금이 세도정치의 그늘 아래 앉아 있던 시절이다. 그때 어떤 사람이 광산갱도에 정밀 온도계를 들고 내려가, 수십 년에 걸쳐 지구의 체온을 재고 있었다. 생산적인 집념이란 이런 것이다.
그는 1829년부터는 전류를 이용해 광맥(鑛脈)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실험실 규모로 재현하는 연구에 착수해 1836년 그 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지구 자기장 변화를 측정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여, 1834년에는 바다에서 자기 경사각을 측정하는 '자침 기울기 측정기(dipping needle compass)'를 직접 제작했다. 이 기구는 이후 제임스 클라크 로스 경(1800~1862)이 남극탐험(1839~1843)에 가져가 남극 자기극점의 위치를 처음으로 확인하는 데 결정적으로 쓰였다. 폭스는 남극에 한 번도 가지 않았지만 그의 손때 묻은 기구가 남극의 비밀을 풀었다. 어쩌면 과학에서 가장 위대한 기여는 현장이 아니라 작업실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52편의 학술 논문을 남긴 그는 1848년 9월 9일 영국 왕립학회회원으로 선출됐다. 1838년에는 새로 창설된 런던 전기학회의 창립 회원이 됐다. 말년까지 팰머스 시내에서 미국 명예영사(1819~1854)직을 겸임하며 과학자이자 상인이자 외교관으로 살았다. 1877년 7월 25일,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딸들이 세운 영국최초의 기술진흥 기관
폭스 이야기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그의 과학업적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이 해낸 일이다. 1832년, 그의 딸 안나 마리아 폭스(1816~1897)가 17살, 아들 바클레이 폭스(1817~1855)가 15살, 막내딸 캐롤라인 폭스(1819~1871)가 13살이었을 때, 이 십대 남매는 머리를 맞댔다. 아버지 회사의 공장노동자들이 자꾸만 멋진 발명품과 아이디어를 들고 오는데, 그것을 세상에 알릴 마당이 없다는 것이었다. "저 사람들에게 맞는 무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십대 소녀의 단순한 발상에서, 1833년 콘월기술협회가 탄생했다. 영국역사상 최초의 기술진흥협회였다. 1835년에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왕립 콘월기술협회로 승격됐다.
협회의 목표는 명료했다. "유용한 기술과 예술을 진흥하고, 근면한 습관을 장려하며, 사회구성원의 창의적 역량을 끌어내는 것."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면 '기술창업 생태계조성'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그것을 1833년, 십대남매가 먼저 생각해냈다.
아버지 폭스는 어땠을까?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원했다. 이것이 핵심이다. 자식의 '엉뚱한' 아이디어를 틀어막지 않고 등을 떠밀어준 어른이 있었다는 것. 한국의 많은 부모들이 "그런 거 해서 뭐 먹고 살래?"라고 묻는 자리에서, 폭스는 자기회사 공장 문을 열어줬다.
한국에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여기서 잠깐, 시선을 돌려보자. 오늘 대한민국.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첫째, '현장이 곧 실험실'이라는 발상. 폭스는 자기 돈으로 운영하는 광산을 실험실 삼아 40년을 연구했다. 국가연구소도, 대학실험실도 아니었다. 일터가 곧 탐구의 장이었다. 한국의 중소기업과 제조업현장에는 지금도 수많은 '폭스'가 있다. 그런데 그 현장지식이 제대로 기록되고 공유되고 있는가? 아니면 숙련노동자가 정년퇴직하면서 그냥 같이 사라지고 있는가?
둘째, 소수자의 불이익이 혁신을 낳는다는 역설. 퀘이커들은 국교회 차별 때문에 공직사회 대신 상업과 과학으로 눈을 돌렸고, 그 결과 산업혁명의 동력 중 하나가 됐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된 집단들, 즉 지방청년들, 비수도권 소기업들, 여성창업자들이 '차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척하는 분야가 있다면, 그 에너지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우리사회는 제대로 보고 있는가?
셋째, 17살 소녀가 세운 기관이 190년을 넘어 오늘도 살아있다. 왕립 콘월기술협회는 현재도 팰머스에서 예술·과학·지역문화 진흥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1833년에 심은 씨앗이다. 한국에서 청소년의 공익적 발상을 제도화할 통로가 얼마나 있는가? 십대가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 어른들은 그 말을 받아 적는가, 아니면 "수능이나 준비해"라고 돌려보내는가?
넷째, 폭스는 상인이었고 과학자였으며 외교관이기도 했다. 그는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교육과 사회는 여전히 '문과/이과'의 이분법, '직업의 서열화', '전공의 감옥'을 만들어 사람을 칸막이에 집어넣는다. 폭스 같은 사람이 한국 대학입시를 겪었다면 어떤 학과에 원서를 냈을까? 아마 면접관이 "지원 동기가 불명확 합니다"라고 탈락시켰을 것이다.
깊이 파내려갈 것
폭스가 광산에서 배운 것은 간단하다. 깊이 내려갈수록 뜨겁다. 표면만 훑어서는 지구의 진실을 알 수 없다. 어떤 문제든, 어떤 사회든 마찬가지다.
그는 40년 동안 같은 갱도를 오르내리며 측정을 거듭했다. 그 지루하고 고된 반복 끝에 인류는 지구내부의 비밀을 처음으로 엿볼 수 있었다. 1877년 7월 25일, 88세를 일기로 팰머스의 퀘이커 공동묘지에 묻힌 이 완고하고 성실한 사람의 삶은, '화제성'도 '이슈 메이킹'도 없었다. 그냥 꾸준했다.
속도와 자극이 미덕인 시대, "한 방"과 "단기성과"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로버트 웨어 폭스의 삶은 그 자체로 풍자이자 교훈이다. 그가 남긴 것은 논문 52편과 자기나침반 하나, 그리고 190년째 살아있는 딸들의 꿈이었다.
땅속은 뜨겁다. 그 사실을 알기 위해 누군가는 40년을 내려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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