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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그마타: 모두가 자신의 무해함을 플레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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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그마타: 모두가 자신의 무해함을 플레이하고 있다

[게임필리아] <프레그마타>

1. 모두를 위한 하나의 작고 아름다운 게임

일본의 유서 깊은 게임 글로벌 제작사 캡콤은 2026년 상반기에 연달아 AAA급 게임 두 편을 출시했다. 하나는 30년 전통의 명맥을 잇는 호러 슈팅게임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의 9번째작 <레퀴엠>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IP인 <프래그마타>다. 출시 이틀만에 100만장, 16일만에 200만장을 돌파한 근래 보기 드문 대작 타이틀이다. 최근 5년간 AAA 신작 IP가 이 정도의 실적을 올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다 유저들의 평가도 '압도적으로 긍정적'이다. EA게임즈, 액티비전 블리자드, 밸브, 2K, 유비소프트 등 게임계 큰손들의 IP가 하나같이 부진하고, 전 세계 게임업계가 불황에 휩싸인 가운데 <프래그마타>의 성공은 정말 이례적인 현상이다. 특히 요즘처럼 젠더·인종·지역 등 정체성들을 둘러싼 적대와 극우정치가 최고조에 달한 시절에 더욱 그렇다.

누구 하나 이 게임이 취향에 맞지 않는다거나, 재미가 없다거나, 게임 내 재현 요소가 거슬린다거나 하지 않고 입을 모아 '좋은 게임'이라고 호평한다. 한 마디로 <프래그마타>는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를 만족시키는 예외적인 타이틀이라 할 수 있다.

문화산업은 언제나 '평평한 지구시장'을 지향한다. 게임산업에서 이상적인 게임이란 뉴욕에서 즐기는 게임이 상하이에서도 즐거워야 하고, 베를린에서 많이 팔린 게임은 모스크바에서도 많이 팔리며, 예루살렘에서 칭찬받은 게임은 테헤란에서도 칭찬받는 게임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 누구나 만족하는 완전한 문화상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콜 오브 듀티> 시리즈는 재미있는 게임이지만 중동·중화권에서는 평가가 좋지 않다. <로블록스>는 러시아에서 아예 이용이 금지되어 있고, 퀴어와 디아스포라를 다룬 게임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게 낯설게 느껴진다. <데스 스트랜딩> 시리즈는 아름답고 깊은 작가주의 게임이지만 많은 플레이어들이 모니터 앞에서 졸거나 잠들었고, <라스트 오브 어스2>는 평론가들에겐 극찬받았지만 유저들은 싫어했다.

과거에도 오늘에도 평평한 세계시장을 위해 문화산업이 넘어야 할 장벽은 언어·문화·습속·정치·지정학·정체성 등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에 개발사는 기획단계에서부터 타깃을 정한다. 어떤 요소들을 버리고 어떤 콘셉트을 밀고 나갈지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작가의식을 가졌건 장사치의 마인드를 가졌건, 누구나 결국 선택을 한다. <프래그마타>의 선택은 절대다수를 만족시키고 있다. '모두를 위한 하나의 작고 아름다운' 게임이 그간 너무 없었다. 점점 메말라 가는 사람들, 무너져가는 세계에서 <슈퍼마리오>처럼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게임을 할 수 없을까? <프래그마타>는 여기에 대한 꽤 유력한 모범답안을 제시하는 게임이다.

2. 모두가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하려 싸우고 있다

DEI(다양성, 평등, 포용)를 둘러싼 문화전쟁의 장기지속 가운데서 <프래그마타>의 주인공 다이애나가 갑작스럽게 게이머들 사이에서 아이콘이 되었다. 긴 금발 생머리에 푸른 눈을 한, 5~6살 남짓해 보이는 이 여자아이는 얼핏 보면 <프린세스메이커> 같은 게임이나 영화 <레옹>의 마틸다 같은 클리셰처럼 보인다. 서구 커뮤니티에서 아동을 성적대상화하는 또 다른 판촉 전략이 아니냐는 몇몇 소수의견도 있었다.

소녀의 성적 대상화는 나쁘지만, 판촉전략이 나쁜 것은 아니다. 게임을 조금만 플레이하면 다이애나가 성적 대상화나 성상품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다이애나가 이 게임을 규정하는 얼굴이고 캡콤이 이를 판촉 전략으로 삼는 것은 맞다. 그러나 <내 어깨 위의 밥> 같은 영화나 게임 <스트레이> 등의 성공사례에서 보듯 사랑스런 고양이를 전면에 내세웠다고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다이애나는 사랑스런 아이(로봇)이고, 게임을 하는 모든 이들은 플레이하는 과정에서 다이애나를 아끼게 되며, 소녀를 지구로 무사히 돌려보내고 싶어한다. 이는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코제트를 돌보고 기꺼이 보호자가 되는 심리와 비슷하다. 딸바보, 고양이 집사 같은 '무해함'만이 사회적 관계에서 보편적 선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다이애나는 열광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프래그마타>의 주인공, 다이애나. ⓒ캡콤

귀엽고 사랑스럽고 똑똑한 아이와 한 팀이 되어서 난관을 해쳐 나간다는 설정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게임 플레이와 시스템, 그리고 레벨 디자인은 단순히 아이를 지키는 것 이상으로 잘 설계되어 있다. 게임은 고아 출신 노동자인 '휴'가 달 기지에서 우주재난을 맞은 뒤, 정체불명의 로봇소녀 다이애나와 함께 사고현장에서 탈출하는 내용을 다룬다. 게임 속에서 적과 맞서 싸울 때 플레이어는 두 가지 기믹을 동시에 조작하게 된다. 하나는 전통적인 3인칭 슈터 게임이 그러하듯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킹 퍼즐을 푸는 것이다. 이 두가지가 게임 속에서 동시에 펼쳐진다. 휴가 무기를 조작하면 다이애나는 해킹으로 적과 맞서 싸우는 식이다. 그래서 우주보호복을 입은 휴의 등에 다이애나가 항상 매달려 있고, 플레이어는 둘을 동시에 조작해야 한다.

이런 식의 이질적인 매커닉은 대부분 게임을 피로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니어: 오토마타>같은 게임은 훌륭하지만 캐릭터와 드론을 동시에 조작는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과부하에 걸린다. <아스트랄 체인>은 주인공과 아바타의 기믹이 서로 달라 역동적이면서도 게임의 기능을 다 쓰고 있지 못한다는 인상을 준다. 반면 <프래그마타>의 휴와 다이애나는 시스템적으로 매우 유기적이고, 서로 다른 능력들을 간편한 조작 속에서 구현해 냈다. 그래서 장발장과 코제트의 절절한 가족애와는 전혀 다른 효과를 낸다. 플레이어들은 다이애나와 더블 페르소나를 형성한다. 지켜줄 대상이자, 든든한 동료인 동시에 주인공으로서 인식하게 된다.

시학의 오랜 전통은 '캐릭터가 곧 플롯'이라고 가르친다. 이 게임에서는 '캐릭터가 곧 플레이고, 시스템’이다. 다이애나는 단순히 판촉을 위한 캐릭터 마케팅이 아니라 그 자체로 캐릭터인 동시에 시스템이고, 동료인 동시에 주인공이며, 상호작용 대상이자 조작 대상인, 하나의 동역학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적대의 시대에 아무 사심 없이 자신의 무해함을 직접 플레이할 수 있는 공학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 게임에는 디자인이나 기획이란 용어가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휴와 다이애나를 동시에 조작하는 시스템이 다이애나라는 캐릭터를 통해 사회적 갈등을 뚫고 플레이어들을 봉합하는 방식은 공정(Engineered)되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3. 안드로규노스(Androgynous)와 심포이에시스(sympoiesis)

게임은 재현에 있어서 과거부터 탈이 정말 많았던 분야 중 하나다. 80년대 북미 아타리 쇼크발발 전후로는 조야한 포르노게임이 사회의 골머리를 썩였고, 이후에는 죽 여성 캐릭터의 과도한 노출과 성적 대상화가 문제시됐다. 흑인, 성소수자, 장애인, 비서구 지역과 남반구 시민들의 과소재현 및 왜곡된 표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여기에 대한 모든 비판을 수십년 간 당연한 것처럼 억눌러 왔으니 DEI(다양성, 평등, 포용)와 같은 당연한 보편 가치가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제도로까지 만들어지는 건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는 진화심리학적으로 ~하면 안 된다 라는 부정형 문장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프래그마타는 형식적으로만 DEI를 추구하는 것보다(예컨대 콘코드 같은 사례가 있다) 게임의 내적 매커니즘 속에서 플레이어가 능동적으로 공동선을 추구하게끔 만드는 디자인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게임을 즐기는 당사자는 남성인데 그가 조작하는 캐릭터는 여성이고, 플레이어는 그 여성 캐릭터를 속된 말로 '벗기고 싶어한다.' 여성 캐릭터를 고르고, 그 여성 캐릭터를 예쁘게 꾸미기 위해 수많은 남성 게이머들이 말도 안 되는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인다. 남성 플레이어들은 굳이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면서까지 신사모드(여성 캐릭터를 자신의 입맛대로 노출된 옷을 입게 하거나 누드로 변형시키는 모드)를 제작하고, 그들을 상대로 개발자는 비키니 갑옷을 비싼 값에 판매한다.

이런 심리는 도대체 왜 만들어지는가? 플레이어가 태생적으로 변태이거나 혹은 남성성 자체가 원죄라는 식의 접근은 별 효용이 없다. 그보다 유용한 설명은 이미 오래부터 있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의 성이 남/녀 2개가 아니라 4개라고 연설한 바 있다. 남성과 여성, 남성성과 여성성은 본래 하나의 신체였던 안드로규노스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며, 이들은 다시 이어지기 위해 각자의 에로스를 추구한다. 이후 카를 융이 정리한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생물학적인 남/녀 외에도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정체성(혹은 페르소나)인 아니무스(여성 속의 남성성), 아니마(남성 속의 여성성)는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연결된 채 순환하는 연결체이다.

이런 다층적인 측면은 게임을 플레이하면 할수록 심연으로 향한다. 플레이어는 곧 휴가 다이애나를 일방적으로 지켜주는 든든한 나의 아저씨가 아니고, 다이애나는 보호받기만하는 아이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휴는 전형적인 근육질 영웅처럼 보이지만 지난한 삶에 지친 고독한 중년 노동자이고, 다이애나는 위기 상황에서 언제나 재치를 발휘해 휴를 구해낸다. 우주슈트를 입고 유영하며 등에 업힌 다이애나의 해킹 능력으로 실마리를 해결하는 플레이어의 조작 속에서 대상화된 정체성이 아닌 잊혀진 안드로규노스적 감각이 돌아온다. 인간과 비인간(유기체적 인간과 기계인간), 정상인이라고 규정되는 것들(남성, 여성, 어른, 아이)과 비정상이 교차한다. 인간중심주의 바깥을 사유한 도나 해러웨이의 표현을 빌리면, 게임 속에서는 심포이에시스(Sympoiesis)가 생성과 전유가 잘 이뤄지고 있다(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옮김, 마농지, 2021). 생명이 타 존재와 함께 살고 함께-되며(becoming-with), 공-작(worlding)이 이뤄진다면, 망가진 지구는 비록 게임 속이라 할 지라도 편견과 경계가 허물어진 반려종(companion)의 세계로 상상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프래그마타>는 군더더기 없고, 어디 하나 잘못된 구석을 찾기 어려운 게임이다. 마감과 품질이 매우 훌륭하단 뜻이다. 하드웨어 최적화는 아주 잘 되어 있고, 버그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어렵거나 쉽지 않고, 게임 속 각 레벨의 난이도도 완만한 상승 곡선을 그리다 결말로 향한다. 닌텐도 스위치2에서도 별탈 없이 작동된다. AI 코딩, 미완성 게임 출시, DLC 장사와 마감으로 탈이 많은 최근 게임개발 현장이 배워야 하는 좋은 기준점이 생긴 셈이다. 모두가 자신의 무해함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공정된, 모두를 위한 작고 아름다운 게임이 아닐 수 없다.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저술로는 <게임의 이론>(공저), <인공지능, 플랫폼, 노동의 미래>(공저) 등이 있으며 계간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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