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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후임자, 석굴암 문화재 훔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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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후임자, 석굴암 문화재 훔쳐갔다?

[일본은 왜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는가?] 제2부 ⑯ 석굴암 오층석탑 반출 용의자, 소네 아라스케

일본인들에게 알려진 석굴암

조선을 침략한 일본인들이 석굴암의 존재를 알기 시작한 것은 1907년 경부터이다. 을사늑약 체결 전후로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이 각각 1902년에 1906년에 불국사 등 경주 일대의 유적과 유물을 조사했는데, 당시 이들은 석굴암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소네 아라스케가 부통감으로 재임하던 1907년 즈음에 경주의 한 우체부가 우편배달을 하다가 무너져가는 석굴암을 본 후 이를 일본인 우체국장에게 전했고, 이 일을 계기로 일본인들에게 석굴암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후술하는 바와 같이 1909년 4월 말에 소네 아라스케가 경주를 방문했을 때 석굴암을 직접 찾아오기도 했고, 같은 해 12월 8일부터 15일까지 세키노 타다시가 석굴암을 조사하기도 했다.

▲ 일제강점기 당시 보수 공사 이전의 석굴암의 모습. ⓒ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조선총독부는 한일강제병합 이후 세 차례(1913년~1915년, 1917년, 1920년~1923년)에 걸쳐 석굴암의 수리·보수 공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콘크리트 사용 등으로 인해 결로와 누수, 화강암 부식 등의 여러 문제가 발생했고, 공사 관련 기록을 남기지 않는 등 석굴암 보존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또한 일제강점기 당시 석굴암에 있었던 오층석탑, 감불(龕佛), 백호(白毫) 등이 사라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소네 아라스케의 석굴암 방문

소네 아라스케는 일행과 함께 1909년 4월 26일에 경주에 도착한 후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등 여러 유적을 방문했다. 1910년 2월에 간행된 <조선미술대관>(朝鮮美術大觀)은 아래와 같이 소네 아라스케와 그 일행이 석굴암 본존불 앞에서 찍은 사진을 수록하고 있다.

▲ 석굴암 앞에서 사진을 찍은 소네 아라스케와 그 일행 ⓒ<朝鮮美術大觀>

사진에서 소네 아라스케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를 포함한 10여 명의 일본인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석굴암에 사용된 돌 위에 앉아 있거나 맨 뒤에 본존불 위에 올라가 앉아 사진을 찍은 자도 보인다. <조선미술대관>은 이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설명도 덧붙이고 있다.

(전략) 제작 시기 등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신라 왕조가 융성하던 시기에 제작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난해 소네 통감 일행이 이 석굴암에 이르러 처음으로 이를 발견한 일 이외에 일본인 학자 및 조사원 등도 아직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다. 조선의 석조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걸작이며 제1의 걸작임이 틀림없다.

위와 같은 소네 아라스케의 석굴암 방문과 석굴암에 대한 높은 평가는 석굴암이 세간에 크게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석굴암은 경주 분황사 구층탑과 함께 일본의 국보로 편입하기 위한 조사 대상으로 정해지기도 했고, 통감부는 석굴암을 통째로 서울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석굴암 오층석탑 반출의 유력한 용의자

한편 조선총독부가 1913년에 석굴암을 처음으로 수리·보수할 때까지 석굴암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소네 아라스케가 석굴암에서 사진을 찍었을 때는 석굴암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스님이 말하기를 근래 이 산사에 오는 사람의 발길도 끊기고, 심한 경우에는 돈을 던져 놓고 굴 안의 유물을 가져가 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같이 천 년 전의 문화를 헐값으로 쓸어 가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지금은 국가가 나서서 보존하고 있다"고 기록한 자료가 있는데, 조선총독부가 석굴암을 관리하기 전까지 석굴암을 누구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고, 유물을 함부로 가져갈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소네 아라스케가 석굴암을 방문했을 당시 석굴암은 그 존재가 막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가 석굴암에 있던 오층석탑을 몰래 가져간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십일면관음상 앞에 대리석으로 제작한 오층석탑이 있었는데, 그가 석굴암을 방문한 후 이를 올려놓는 대석(臺石)만 남겨진 채 오층석탑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오층석탑의 행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소네 아라스케가 석굴암을 방문하면서 이를 가져간 것 같다는 기록이 있다.

구면관음(九面觀音) 앞 현존하는 대석(臺石)위에 불사리(佛舍利)가 봉납되었다고 구전(口傳)하는 소형(小形)의 아름다운 대리석제(大理石製)의 탑이 있었는데, 지난 메이지 41년(1908) 봄 존귀한 모대관(某大官)이 다녀간 후 어디론지 자태(姿態)를 감추어 버린 것은 지금 생각하니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전략) 또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십일면관음상 앞에 작고 뛰어난 오층탑 한 개가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후에 아라스케 통감이 가져갔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분명치 않다.

첫 번째는 초대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두 번째는 미술사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기록이다. 먼저 모로가 히데오의 설명을 살펴보자. 여기에서 '존귀한 모대관'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메이지 41년은 1908년인데, 1909년인 메이지 42년의 착오라고 봤을 때 앞에서 설명한 소네 아라스케가 경주를 방문한 4월 말, 즉 1909년의 봄이 된다. 1909년 봄이 맞다면 당시 석굴암을 방문한 일행 중 '존귀한 모대관'이라고 부를 만한 높은 직위를 가진 자는 부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이다. 즉 그냥 '대관'도 아닌 '존귀한'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한 것을 보면 1909년 4월에 석굴암을 방문한 '존귀한 모대관'은 소네 아라스케일 것이다.

'존귀한' 소네 아라스케 부통감이 석굴암을 방문한 후에 오층석탑이 그 모습을 감췄다고 했는데, 야나기 무네요시는 목격자의 말을 빌려 소네 아라스케가 오층석탑을 가져갔을지도 모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909년 11월 24일에 야쓰이 세이치는 통감 된 소네 아라스케를 만나면서 그가 "한국 예술에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경주를 잘 알고 있어 소박한 어조로 거리낌 없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봤다. 부통감 시절인 1909년 4월과 통감 시절인 1909년 11월은 7개월의 차이가 있지만, 조선 예술에 대한 흥미와 경주를 잘 알고 있는 소네 아라스케가 경주의 석굴암에 있었던 '아름다움 대리석제 탑'인 오층석탑이 마음에 들어 이를 가져갔을 것이라고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해방 이후 석굴암에 대한 수리·보수가 이루어졌는데, 1967년에 발간된 <석굴암 수리 공사 보고서>(1967)에서도 위와 같은 자료들을 토대로 소네 아라스케가 오층석탑을 반출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굴내 감불좌상 2구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문헌을 들 수 있을 것이며, 본존 후면 12면 관음 앞의 소석탑은 이곳을 찾은 소위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 의하여 약탈됨에 이르렀던 것이다.

석굴암 오층석탑의 행방은 지금도 여전히 알 수가 없고, 소네 아라스케가 이를 반출했는지도 확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위와 같은 여러 자료들과 함께 신라 옥적을 경성으로 반출한 그의 행적을 봤을 때 그가 경주에서 석굴암 오층석탑을 반출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 참고문헌

문화재관리국, <석굴암 수리 공사 보고서>, 1967.

朝鮮古書刊行會, <朝鮮美術大觀>, 1910

아라키 준, 「일제강점기 경주의 유물 반출·훼손과 조선인의 대응-신라옥적과 일승각의 사례를 중심으로-」, <고고학지> 제26집, 2020.

야나기 무네요시,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 <조선을 생각한다>, 1996.

한국원자력발전 연구원, 「원우」 Vol.304, 2026.

<동아일보>.

<황성신문>.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井上直樹, 「石窟庵と近代日本-曾禰荒助韓国統監·寺内正毅朝鮮総督を中心に-」, <京都府立大学学術報告 人文> 第72号, 2020.

菊池謙讓, 「慶州雜記」, <朝鮮>, 朝鮮硏究會, 1913.

木村静雄, <朝鮮に老朽して>, 1924.

朝鮮總督府, <佛國寺と石窟庵>,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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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봉 강원대학교 교수

엄태봉 교수는 문화재 반환 문제, 강제동원문제,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의 역사인식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한일 관계 전문가다. 역사인식문제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로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 <교과서 문제는 왜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가?>, <일본 '영토·주권 전시관'의 영토 문제 관련 홍보·전시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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