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양산 다방동유적은 청동기시대(후기)부터 4세기대까지 양산지역 정치체의 거점으로 기능했습니다."
이동희 인제대 교수는 지난 11일 양산 다방동 유적의 성격과 가치 규명 학술대회에서 이같이 피력했다.
이 교수는 "4세기대에는 금관가야 토기문화가 양산지역에 확산되어 김해 가락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금관가야 연맹체에 소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양산 다방동유적의 위상은 그대로 지속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또 "4세기대 양산지역 상위층의 무덤에서 가락국(금관가야)의 토기들이 확인되고 있다"면서 "이는 금관가야와 양산지역 가야세력의 긴밀한 연대를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다방동유적 인근의 지배층 무덤에 대한 발굴조사가 꼭 필요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른바 물금의 철광석은 가락국과 양산지역 가야세력을 잇는 매개체였을 것이다는 것.
이 교수는 "400년 고구려 남정 이후에 낙동강유역과 낙동강 이동 지역은 점차 신라의 영향권 하에 들어갔다"며 "양산지역도 그러한 큰 흐름에 포함되어 정치적 전환기를 맞이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양산은 5〜6세기대에 낙동강 동안 지역 가운데 창녕지역과 함께 가장 많은 고총이 확인된 지역이다"면서 "이는 신라가 대외적으로 급성장하던 5세기대에 양산지역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양산은 신라 경주에서 양산지구대를 통해서 낙동강 하구~중국·일본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목이자 낙동강하구를 통해 가야 경영을 도모할 수 있는 지정학적 거점이다"고 말했다.
"신라가 5세기 후엽을 중심으로 신기동 산성과 북부동 산성을 축조함은 직접지배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보여주는 상징적 자료이다"고 하는 이 교수는 "이 무렵에 들어서는 토착 유력세력과 관련되는 다방동유적은 쇠퇴하게 된다"고 했다.
이 교수는 "양산지역도 향후 발굴조사 성과가 축적된다면 이와 같은 고총(古墳)의 변천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며 "수장층과 정치체의 양상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동희 교수는 "다방동유적에 대해서 4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생활유적 중심이다"고 하면서 "생활유적 배후의 (추정)분묘유적(다방동유물산포지 1)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 당시 지배층의 무덤 양상을 통해 양산지역 고대사를 좀 더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