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을 높은 지조와 벅찬 감격으로 활기차게 하는 것. 이것이 지도자가 이룰 인간관계다." <김대중 어록집> 75쪽
나는 최근 김대중재단에서 발간한 <김대중 어록집>에서 어록 한두 편을 골라 카카오톡에 올리고 있다. 위의 어록도 그중 하나로, 지난 6월 23일에 올린 글이다. 어록을 카카오톡에 올린 지도 어느덧 180회에 이르렀다.
매일 어록을 읽으면서 김대중 대통령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던 김대중은 훌륭한 정치 지도자였다. 그러나 어록을 통해 만난 그의 면모는 단순히 정치인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웠다. 정치를 넘어 인간과 사회, 역사와 문명, 도덕과 양심에 관한 오랜 사색과 깊은 성찰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라는 틀에 가두기에는 그릇이 너무 넓고 깊었다.
그러면서 어록을 읽을수록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되었다.
"김대중 정신은 계승되고 있을까?"
고 김대중 대통령의 탄신일과 서거일 그리고 선거일 등이 되면 민주당계 정치인들은 ‘김대중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다짐해 왔다. 그들의 다짐이 제대로 실현되었다면 우리 사회에는 김대중 정신이 상당히 뿌리내리고 정치문화도 지금과 다를 것이다. 과연 그런가?
내가 김대중 정신의 계승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어록을 읽으며 느낀 감동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8월 18일 김대중 대통령 서거 추모식에 참석했을 때, 젊은 세대의 모습이 많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추모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득 이런 우려가 생겼다. 지금 추모행사를 주관하는 세대가 언젠가 현장을 떠나고,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기억하는 사람들마저 줄어든다면 어떻게 될까? 김대중 정신이 역사 속에 기록되는 것과, 오늘의 삶과 정치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기억하는 사람이 줄어들수록 그 정신을 이어갈 기반도 약해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의 진면목을 알고, 젊은 세대가 ‘우리에게도 이런 정치 지도자가 있었다.’는 긍지를 갖기를 바란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을 정치적 뿌리로 삼는 민주당 정치인들이 그의 정신을 체화해 품격 있는 정치문화를 만들어가기를 바란다.
정치 9단·정책 9단을 넘어 철인 정치가 김대중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 9단·정책 9단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정치 지도자였다. 하지만 그를 정치적 역량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세계정치학회(IPSA)는 김대중 대통령을 민주주의 철학을 현실의 정책으로 구현한 '철인 정치가(philosopher-statesman)'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그의 정치와 사상을 기리기 위해 '김대중상(Kim Dae-jung Prize)'을 제정했다. 이 상은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 인권에 기여한 학자에게 수여된다.
이는 김대중의 정치와 사상이 한국 현대사를 넘어 보편적 가치의 차원에서도 평가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대중은 단지 뛰어난 정치인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고 이를 현실 정치 속에서 실천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신을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국민통합이라는 가치만으로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가치를 현실에서 어떻게 실천했는가이다.
적대와 대결의 한계를 넘어 대화와 교류를 선택한 햇볕정책,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를 모색했던 노사정 대타협, 지역주의의 벽에 맞서 국민통합을 추구했던 정치적 여정은 김대중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원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에서 가능한 길을 찾고, 갈등을 보복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으로 풀려 했던 태도야말로 김대중 정신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정신의 계승이란 무엇일까?
김대중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과거의 인물을 기념하고 그의 이름을 되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늘의 현실에서 그가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와 판단 기준을 실천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자유와 비판을 억누르고, 인권을 말하면서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며, 평화를 말하면서 갈등과 적대를 부추긴다면 김대중의 이름을 빌리고 있을 뿐 그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보기 어렵다.
김대중 정신은 정치적 정당성을 장식하는 문구가 아니다. 김대중은 정치인이었지만, 인간의 도리와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이를 정치 속에서 실천한 도덕철학자적 면모를 지닌 정치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정신은 권력의 유혹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치적 이해관계보다 국민의 삶을 앞세우며, 갈등 속에서도 공존의 길을 찾도록 하는 실천의 기준이다. 그것은 곧 행동하는 양심으로 나타났다. 그렇기에 김대중 정신은 어느 정당이나 정치세력이 독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이름을 얼마나 자주 부르는가가 아니라, 그의 철학을 오늘의 정치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실천하는가이다.
김대중 정신 계승의 세 가지 원칙
김대중 정신의 계승은 세 가지 방향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핵심 가치를 지키는 일이다. 인간의 존엄과 자유,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국민통합은 김대중 정신의 중심 가치다. 정치적 필요나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적으로 강조한다면, 그것은 정신의 계승이라기보다 이름의 차용에 가까워진다.
둘째는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는 일이다. 계승은 과거의 발언과 정책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가치를 기준으로 오늘의 문제를 바라보고, 변화된 환경에 맞는 정책과 수단을 찾는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현실주의도 원칙을 바꾸는 태도가 아니었다. 변함없는 가치를 지키면서 현실에서 가능한 방법을 찾는 태도였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의 발전, 불평등과 기후위기, 저출생과 지방소멸, 국제질서의 변화 앞에서 필요한 것도 과거 정책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해법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오늘의 현실에 있었다면 어떤 질문을 던졌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시대적 계승의 출발점이다.
셋째는 새로운 계승자를 길러내는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을 기억하는 사람의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의 정신을 오늘의 현실에서 이해하고 실천하며 다음 세대에 전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김대중 재단은 기념과 추모를 넘어 청년 연구자와 대학생들이 김대중 정신을 공부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넓혀야 한다. 재단의 연구와 교육, 기념사업에 새로운 세대가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조도 마련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 정신 계승의 중심에 있는 김대중 재단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인물을 기억하는 일이 특정 세대의 기억과 경험에만 머문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반은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대교체는 과거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김대중 정신을 미래로 이어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김대중 정신을 미래로 보내야 한다
세대교체는 김대중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김대중을 미래로 보내는 일이다. 김대중 정신이 미래로 이어진다는 것은 젊은 세대가 자신의 언어로 김대중을 해석하고, 오늘의 현실 속에서 그의 가치를 새롭게 실천한다는 뜻이다.
젊은 세대에게 김대중 정신을 전하려면 민주화운동의 역사나 과거의 업적을 설명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들이 겪는 노동과 주거, 교육과 기술 변화, 불평등과 미래의 불안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에 김대중의 가치가 어떤 의미와 현실성을 갖는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오늘의 청년들이 자신의 언어로 김대중 정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준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정신은 현재성을 얻고 미래의 가치로 이어질 수 있다.
김대중 정신은 오늘의 정치에서 작동해야 한다
김대중 정신을 계승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정신을 권력의 행사와 정치적 선택 속에서 실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핵심 가치를 지키고, 시대에 맞게 해석하며, 다음 세대에 전하는 실천이 없다면 ‘김대중 정신 계승’은 정치적 수사에 머물 수밖에 없다.
정치가 실종된 오늘의 여의도와 적의와 증오로 가득 찬 말이 쏟아지는 현실을 마주할수록, 품격 있는 정치가 그립고 김대중 정신의 계승이 더욱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말하는 품격 있는 정치란 단순히 말과 행동이 점잖은 정치를 뜻하지 않는다. 국민을 진영의 구성원이 아니라 존엄한 주권자로 대하고,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대화와 경쟁의 대상으로 인정하며, 원칙을 지키되 타협을 통해 현실적인 해법을 찾는 정치다. 또한 당장의 정치적 유불리보다 국민의 삶과 공동체의 미래를 앞세우고, 권력의 행사에 책임을 지는 정치다. 그런 정치야말로 김대중 정신이 오늘의 현실에서 구현되는 한 모습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대중 정신의 계승이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김대중 대통령을 중요한 정치적 뿌리로 삼아온 민주당이라면 그 책임은 더욱 무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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