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들은 관객에게 대리 체험을 제공해 주는 데 아주 탁월하다. 한 명의 제한된 삶 안에서는 미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험이, 심지어 우리 마음속 깊이에 마치 내 것과 같은 강렬한 심정을 유발하며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영화를 통해 아킬레우스가 우리에게 친숙해졌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아킬레우스는 본인의 죽음으로 인해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예언을 받고 전쟁터로 떠난다. 그러나 승리의 명예를 앗아간 아가멤논의 배신으로 아킬레우스는 거대한 심리적 폭풍에 시달린다. 군인으로서 지켜야 할 덕성을 저버린 아가멤논의 행위를 향한 배신과 분노에 불 지펴져, 아킬레우스는 참전을 거부하였고, 극단적으로 협소한 관계로 맺어진 아군과 다수 적군의 이분법으로 관계를 인식하였으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둔감해진 상태에 들어선다. 그러한 상태에서 맞이한 동료이자 애인인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으로 아킬레우스는 배신감에 더하여 파트로클로스 대신 자신이 죽었어야 한다는 강렬한 죄책감과 울분에 사로잡힌다.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와 트로이인을 향한 복수심으로, 아킬레우스는 소위 '베르세르크' 상태에 들어서는데, 이는 마치 자신은 죽었다고 인식한 상태에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 전능감과 극단적인 격분 상태에서 무차별적인 잔혹을 저지르는 도덕적 붕괴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아킬레우스의 심리를 설명한 이는 바로 베트남 전쟁 참전 미군의 심리치료자이자 옹호자였던 조나던 셰이(Jonathan Shay)였다. 셰이는 전쟁터와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 권력자(지휘관)의 배신과 부도덕을 목격하거나 동료를 상실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참전 군인의 마음을 일리아드를 통해 읽어 내었고, 이를 '도덕 상해'(moral injury)라고 이름붙였다.
오늘날 도덕 상해는 트라우마 심리학 분야에서 널리 인지하는 개념이다. 도덕이 무엇이 올바르고 마땅한가에 관한 개인적 사회적 신념이자 공동체 윤리라면, 도덕 상해란 도덕 위반을 목격한 자로서 겪는 심리적 고통을 일컫는다. 셰이에 따르면 도덕 상해는 전쟁이나 트라우마와 같이 중대한 위기 상황에서, 권위와 권한을 가진 사람이 저지른 배신을 목격했을 때 겪는 강렬한 분노와 복수심 그리고 인간을 향한 무감각과 불신으로 특징지어진다. 아킬레우스를 보면 이러한 불신과 고립은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극대화되는데, 사랑하는 이의 상실로 인해 '내가 대신 죽었어야 했다'는 죄책감과 세상을 향한 혐오 역시 배신 트라우마의 결과이자 도덕 상해이다.
한편, 국내 임상가들은 'moral injury'를 도덕 손상으로 번역하기를 선호하는데, 도덕 상해가 더 적절한 용어라 필자는 생각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트라우마 심리치료 분야에서 일하면서 임상가들이 항상 어느 지점에서 실수를 하는가를 살펴보면, 트라우마의 정신병리에 집중한 나머지 그 트라우마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망각하는 상황에 있었다. 손상이라는 표현은 피해를 입은 결과물로서 피해자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함을 강조한다면, 상해라는 표현은 원인으로서 외부의 타격이 있었음을 잊지 않는 용어이다. 극렬한 죄책감과 울분이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를 잊지 말아야 하므로, 트라우마가 발생한 조건을 철저히 인정해야 하므로, 그리고 배신과 화해는 개인의 내면이 아닌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하므로, 손상 '됐음'이 아니라 상해가 '어떻게 일어났는지'가 중요하다.
셰이는 도덕 상해에서 권위자가 저지른 행위를 목격한 관찰자의 심리에 주목했다면, 심리학자 브렛 릿츠((Brett Litz)는 여기에 더해 본인이 위반을 예방하지 못했거나 스스로 도덕규범을 저버리는 행동을 했을 때 나타나는 도덕 상해에 주목했다. 릿츠가 주목한 도덕 상해의 주요 결과는 수치심이었다. 죄책감은 중대한 위기 속에서 규범이나 가치관을 어기는 행동을 하거나,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은 '잘못했다'의 정서이다. 수치심은 죄책감과 구분되는 정서로, 자신은 더 이상 사회 공동체에 소속될 수 없는 존재라는 낙인찍힘의 정서이다. 죄책감이 인정과 복구의 원동력이라면, 수치심은 은폐와 사회적 고립을 강화한다.
필자와 연구진은 국가폭력과 고문 피해, 성폭력, 재난 생존자가 겪는 도덕 상해에 관해 탐구한 바 있다. 고문, 성폭력, 재난과 같이 존엄을 위협받는 극단적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은 끔찍한 배신감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생존자를 향한 2차 가해와 피해자 비난, 그리고 '잘못은 밝혀졌지만 아무도 사과하지 않음'은 세상에 정의로움 따위 없다는 철저한 교훈을 남기는 배신 트라우마이다. 더 이상 인간에게 기대할 바가 없다는 극단적 고립감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배신당한 사람으로서 심리치료나 소위 회복을 거부한다면 그 역시 마땅한 심리이다.
또한 심리치료 과정에서 살펴보면 트라우마 당시에 초능력자가 아니고서야 누군가를 구한다거나 자기 목숨을 저버리는 행위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생명이 위협당하는 목전에 일어나는 사람의 몸과 정신의 반응은 인간 존엄에 관한 우리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참혹한 체험이다. 실상 그것이 고문이나 성폭력의 목적이 아니던가. 생존자의 존엄을 짓밟는 방식의 가해는 결국에 생존자가 인간으로서 지녔던 결백과 신념을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던 듯 구겨버린다. 그 결과 남는 것은 오명이고 수치심이며 이것이 도덕 상해이다. 또한 생존자들은 자신이 지킬 수 없었던 자들을 향한 무지막지한 죄책감으로 도덕성에 상해를 입는다. 그 경험이 무지막지한 만큼, 산 자는 남은 인생에서 도저히 타협을 허용할 수 없다. 단지 죄책감뿐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몸의 경험은 수치심을 일으킨다. 그러나 과연 당사자만이 도덕 상해를 감당해야 할까? 그것이 과연 '옳은가'?
모든 트라우마에는 도덕적, 윤리적 의미가 담겨있다. 사실상 모든 트라우마는 배신과 불신의 성격을 지니고, 불의로 인한 죽음이 끊이지 않는 공동체에서 무엇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무거운 질문을 사회 전체에 남긴다. 만약 심리학 영역에서 도덕 상해 개념이 남긴 의미가 있다면, 트라우마 결과는 단지 정신병리학이나 심리치료의 협소한 관점을 넘어서 곱씹어야 하는 문제이며, 도덕 상해는 개인을 치료하면 될 병리가 아니라, 부러진 땅을 어떻게 다시 복구하는가 하는 모두의 문제라는 점이다.
안전 사회의 기반이었던 민주주의의 붕괴, 내란을 가까스로 막아낸 우리 사회는 여전히 매일이고 새로이 보도되는 재난, 죽음, 폭력, 전쟁, 그리고 '책임지지 않음'의 소식에 휘청댄다. 극단적 트라우마의 교훈을 어떻게 곱씹을지, 도덕적 딜레마에서 어떠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에 관한 어떠한 논의 없이, AI, 반도체, 주식, 아파트 이야기가 공포보다는 조금 익숙한 불안감으로 사람을 내몬다. 어느 날 내란을 막아낸 영웅은 또한 어느 날은 내란 피의자가 되어버렸고 재난 생존자와 유가족은 나아질 기미 없는 몸과 마음의 건강 상태를 부여잡고 죄책감을 짊어진 유일한 책임자가 되었다. 불법을 저지르는 이는 있는데 사과하는 이 없다는 소식은 수년째 계속된다. 진실은 사과가 있어야 비로소 규명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에 의지하여 깜깜무소식인 도덕 치유에 기대를 걸어볼 수 있을까? 관찰자가 얻은 교훈이란 고작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트라우마에 대처했을지라도 그 공포는 끝내 이해받지 못할 것이고 인간인 이상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면 내 치욕을 은폐해서라도 살아남자는 처세이다.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스펙타클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극단적 트라우마를 겪고 살아 돌아온 이들의 죄책감을 어떻게 나눠 짊어질 수 있나? 우리는 중대한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서 무엇에 기대어 의사결정을 해야 할까? 어쩌면 각자가 마음속에 품은 도덕 상해의 공포를 묻어두고자 애쓰는 중은 아닐까? 지금은 각자가 목격한 도덕 상해 이야기를 나눠야 할 시기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피해자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희망찬 신념을 포기하더라도, 피해 당사자만이 짊어진 죄책감을 이제서라도 분담하려면 우리 모두가 도덕 상해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경고라도 던져야 할 것 같다.
식민주의와 전쟁, 군사정권, 그리고 보호받지 못한 재난 피해와 젠더 폭력의 역사를 지닌 나라에서 집단적 트라우마는 "나서지 말아라" "가만히 있어라" "각자도생"의 끔찍한 교훈을 우리에게 남겼다. 논의되지 못한 도덕 상해 앞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혼자서라도 잘먹고 잘사는 길밖에 없던가. 우리는 죄책감을 분담하기보다는 누군가를 탓하며 낙인찍고 수치심 주는 쪽에 능해져 버렸다. 극단적 딜레마 상황에서 인간이 내린 선택을 향해 영웅시하거나 낙인을 찍는 양극단의 해결책뿐이 없었던 듯 하다. 그러나 영웅과 죄인 사이에서 나머지는 방관자일 수밖에 없고 방관자에게 남겨진 교훈은 없다. 책임질 사람들은 수치심에 빠진 채 (혹은 수치심도 외면한 채) 미안하다는 한마디 않는다. 우리가 도덕 상해에 대처한 방식이다.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도덕적인가는 그 누구도 정답을 가진 이 없다. 극단적 상황에서 자신의 안위를 우선하는 행위와 도덕적 행동을 취하는 행위 사이의 딜레마는 점잖기보다는 공포와 수치심으로 가득하다. 신의 아들도 발목에 화살을 맞고 죽었는데 나약한 우리가 영웅이 될 수는 없으니, 우리의 두려움은 당연하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공포스러울 만큼 끔찍한 도덕 상해의 죄책감을 이야기하고, 또한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일뿐이다. 스펙터클의 재미가 가라앉았다면, 이제 극장 바깥에서 일어난 각자의 도덕 상해 이야기를 공유하고 감내해 보자. 그렇게 각자의 책임지기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혼란 속에서 희망을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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