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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막을 수 없다던 왕, 사실은 제일 똑똑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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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막을 수 없다던 왕, 사실은 제일 똑똑했던 사람이었다

[인물로 본 세계사] 크누트 대왕이 한국정치에 던지는 질문

바닷가에 의자를 놓고 앉아 "파도야, 물러가라!" 외쳤다가 발이 흠뻑 젖었다는 임금. 학교 다닐 때 어리석은 왕의 대표사례로 배운 그 사람이 사실은 잉글랜드와 덴마크와 노르웨이, 세 나라를 한꺼번에 다스린 북해제국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지어 그 파도 일화조차 원래 뜻과 정반대로 후세에 전해졌다는 것을 알면 더 놀랄 것이다.

바이킹의 아들, 왕관을 세 개나 얻다

크누트(Cnut the Great, 약 995~1035)의 아버지는 덴마크 왕 스벤 포크비어드(Sweyn Forkbeard, 약 960~1014)다. 잉글랜드를 침공해 왕좌에 앉았다가 몇 주 만에 죽어버린 인물이다. 아버지가 급사하자 잉글랜드 귀족들은 원래 왕이던 애설레드(Æthelred the Unready, 약 966~1016)를 다시 불러들였고, 크누트는 함께 왔던 덴마크 군대를 이끌고 일단 물러났다. 보통사람이면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크누트는 몇 년 뒤 대함대를 이끌고 되돌아와 잉글랜드 전역을 휩쓸었다.

애설레드가 죽은 뒤 그 아들 에드먼드(Edmund Ironside, 약 989~1016)와 맞붙어 몇 차례 전투 끝에 나라를 반으로 나눠 갖기로 합의했는데, 에드먼드가 그해 안에 갑자기 죽으면서 잉글랜드 전체가 크누트 손에 들어왔다. 1018년에는 형이 죽으며 덴마크 왕좌까지 물려받았고, 1028년에는 함대를 몰고 가 노르웨이마저 정복했다. 스무 해 남짓 사이에 세 나라의 왕관을 쓴 셈이니, 당대 유럽에서 이만한 판을 벌인 인물은 손에 꼽을 정도다.

정복자가 화해자로 변신하는 법

흥미롭게도 크누트는 정복한 나라를 힘으로만 누르지 않았다. 잉글랜드 사람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죽은 애설레드의 부인이었던 노르망디의 엠마(Emma of Normandy, 약 984~1052)와 결혼해 정통성을 흡수했다. 이미 덴마크에서 얻은 부인 앨프기푸(Ælfgifu of Northampton)가 있었는데도 정치적으로 필요하니 두 번째 결혼을 감행한 것이다. 두 부인 사이에서 난 아들들을 각각 노르웨이와 덴마크 통치자로 앉히며 제국을 분담시키는 수완도 보였다.

잉글랜드 안에서는 귀족 고드윈(Godwin of Wessex, 약 1001~1053)을 중용해 현지세력과 손잡았고, 나라를 웨식스·머시아·노섬브리아·이스트앵글리아 네 개 백작령으로 나눠 통치를 분담시켰다. 덴마크 출신 군인들을 곳곳에 심는 대신 잉글랜드 관습법을 존중하는 법전을 반포해 원주민의 신뢰를 얻었고, 무거운 세금이던 데인겔드를 거두면서도 교회와 수도원은 후하게 지원했다. 심지어 자신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캔터베리 대주교 앨페아지(Alphege, 약 953~1012)의 유해를 성대히 재안장하며 화해의 몸짓까지 보였다. 정복자가 스스로 정복지의 관습에 녹아든,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사례다. 1027년에는 로마까지 순례를 다녀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트 2세(Conrad II, 약 990~1039) 대관식에 참석했는데, 이때 잉글랜드 상인들이 유럽대륙에서 통행세를 깎아 받도록 직접 협상까지 했다.

파도 앞에 앉은 진짜 이유

그 유명한 파도 일화는 사실 정반대의 뜻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다. 아첨하는 신하들이 "폐하의 명이라면 바다도 물러갈 것"이라 떠받들자, 크누트는 일부러 바닷가에 의자를 내오게 하고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물러가라 명령했다. 당연히 파도는 그대로 밀려와 발을 적셨고, 크누트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왕의 힘이란 이토록 보잘것없다. 참된 권력은 오직 하늘에 있는 이에게만 있다."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 신하들의 아첨을 꾸짖은 것이다. 그런데 훗날 사람들 입을 거치며 이야기가 완전히 뒤집혀, 오히려 자기 힘을 과신한 어리석은 왕의 상징으로 굳어버렸다. 겸손을 보여준 일화가 오만의 우화로 둔갑한 셈이니, 역사가 얼마나 쉽게 왜곡되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화려했던 제국은 왜 십 년도 못 갔나?

크누트가 1035년 죽자 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두 부인에게서 난 아들 해럴드(Harold Harefoot, 약 1015~1040)와 하르타크누트(Harthacnut, 1018~1042)가 왕좌를 놓고 다투다 둘 다 일찍 죽었고, 결국 잉글랜드는 애설레드의 아들이자 엠마의 아들인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 약 1003~1066)에게 넘어갔다가 1066년에는 노르망디 공 윌리엄에게 정복당했다. 세 나라를 한 손에 쥐었던 제국이 세대 하나를 넘기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아무리 능숙하게 화해의 정치를 펼쳐도, 다음 세대에 물려줄 제도와 정당성을 함께 갖추지 못하면 결국 모래성과 다를 게 없다는 교훈이다.

한국에 주는 몇 가지 생각거리

지금 한국을 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은 여럿이다.

첫째, 힘으로 자리에 오른 사람이 그 힘을 어떻게 내려놓고 나누느냐가 결국 역사의 평가를 가른다는 점이다. 2024년 12월 3일 밤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윤석열 세력과, 정복자였음에도 상대진영의 관습과 사람을 끌어안았던 크누트를 나란히 놓아보면 그 차이가 선명하다. 힘만 앞세운 통치는 반발을 낳지만, 상대의 정통성까지 흡수하려 한 통치는 지지를 낳는다.

둘째, 자기 힘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는 지도자가 오히려 존경받는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내 명령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착각에 빠진 권력일수록 결국 파도에 발을 적시고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역사 속에서 뒤집힌 우화로 남는다. 최근 한국정치에서도 자기 진영의 힘을 과신하다 발을 헛디딘 이들을 여럿 보지 않았나.

셋째,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권력구조도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순간이 가장 취약하다는 점이다. 승계를 둘러싼 다툼,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후계구도는 크누트의 제국을 10년 만에 무너뜨렸다. 지금 한국정치권 곳곳에서 벌어지는 계파다툼과 세대 승계문제를 지켜보노라면 천 년 전 북해의 이야기가 남 일 같지 않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파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왕은 대왕이라 불렸고, 그것을 몰랐던 이들은 결국 자기 발만 적셨다.

▲크누트 대왕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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