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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좌우명, "충성을 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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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그의 좌우명, "충성을 다하라"

안동일의 '태평양을 두번 건넌 사람들' <1> 박지원

이달 초의 일이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박공, 안녕하시오? 나 안동일이오." 무려 7년만의 통화였다. 더없이 반가운 목소리였다.

그와의 인연은 지난 89년 그가 세계 언론인 가운데 유일하게 평양에 들어간 임수경양을 열흘간 동행취재, 생생한 현장의 '통일의 소리'를 전한 뒤 국내에 들어왔을 때 지인의 소개로 만나면서 시작됐다. 그는 미국국적을 가진 까닭에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평양을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었고 이 과정에 특유의 친화력으로 폭넓은 인맥을 구축, 필자가 알기에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북한통'으로 통한다. 그런 연유에 그의 국내출입은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고, 그가 귀국할 때마다 몇명의 정보요원들이 24시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곤 했다. 90년대 중반 한때 그는 국내에 머물며 언론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여러 제약때문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후 연락이 뚝 끊겼었다.

그런던 그가 7년만에 전화를 한 것이다. 반갑게 만나보니 그는 현재 미국에서 언론활동을 계속하고 있었고, 이번에 들어온 것도 노무현 정부 출범 10부작 취재차였다. 그는 보름동안에 국내의 많은 여야 정치인들을 만났고, 김대중 전대통령과 박지원 전 대통령실장도 만났다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그 대단한 필력을 활용해 프레시안에 옥고를 좀 쓰라고 하자, 그가 꺼내든 구상이 '태평양을 두번 건넌 사람들'이라는 아이디어였고 '유리지붕에 다친 사람들'이라는 아이디어였다. '미국'을 매개로 격동의 세월을 살고있는 우리 정치인들의 얘기였고, 한국의 잘 알려지지 않은 현대정치사였다.

당연히 OK사인이 떨어졌고, 그는 미국으로 들어간 직후 17일 새벽 첫 원고를 보내왔다. 그는 이메일에서 "22년 기자생활의 정리입니다. 미국서 본 한국정치, 한국서 본 미국정치사회. 용미 지미의 시대를 열면서..."라고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를 밝혔다. 앞으로 그가 펼쳐낼 한편의 파노라마를 기대해보자. 편집국장 박태견 주

***'태평양을 두번 건넌 사람들'**

***<연재를 시작하며>**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요즘 주변은 온통 미국과 관련된 사안으로 얼룩져 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듯 싶다. 테러를 분쇄하겠다며 미국 대통령이 강행하려 하는 전쟁으로 인해 경제가 흔들리면서 사회 분위기 전반이 어수선한 가운데 반전 집회가 열리는가 하면, 오늘도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여중생들을 추모하는 촛불 시위가 당국의 불허방침에도 불구하고 광화문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대북송금에 관한 특별법이 끝내 공포돼 특별검사가 임명되고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모양이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직후의 야당과의 정면대결에 따른 정치권의 경색을 마주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는 얘기다. 특검제 실시 논란과 강행으로 상징되는 대북 문제의 어려운 사정 위에 초미의 현안으로 떠오른 북핵 문제의 한 축에 미국이 엄연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 대북 송금 특검제 실시에 따른 관심의 한 중심에도 재미동포 출신의 정치인이 자리잡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특검제가 실시되면 뉴욕동포 출신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당연한 조사 대상이 될 것이고 그에 대한 사법처리가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견강부회를 보태면 이처럼 한국의 관심사마다에 미국, 그리고 미국인 거기다 재미동포들 까지 개재되어 미국은 온통 한국을 규제하면서 뒤엎고 있다고도 할 것이다.

지난해 11월말과 올 2월말 두 차례에 걸쳐 보름씩의 일정으로 서울에 다녀왔다. 7년만의 귀국이었다. 11월말에는 대통령 선거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와중이었고 이번 2월말은 새 대통령 취임이며 새 정부 조각 등으로 사회 전반이 정신없게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한국 사회전반이 엄청난 발전을 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국민들의 생활수준, 의식수준이 특히 그랬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발전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 고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으며 특히 정치권에 볼멘 소리와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느낌이었다.

미국 생활이 어언 20여 년에 접어들고 있다. 그 동안 잠깐 서울에서 방송활동을 한 적도 있지만 대부분의 세월을 뉴욕 동포 언론계에 몸을 담고 동포사회와 고국의 동향을 살피면서 그를 글로 또 말로 옮기며 살아온 셈이다.

우리 재미 동포들은 태생적인 모순 속에 살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식물의 꺾꽂이나 이종에 비유되는 이민생활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해 새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려야 함에도 고향인 고국을 바라보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또 그 때문에 삶이 더 역동적이고 흥미롭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고국과 이곳 미국 사이에는 거대한 태평양이 가로 놓여 있다. 이 태평양을 두 번 건넌 사람들이 있다. 흔히 '역(逆)이민'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이민 왔다가 다시 서울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 때문에 이민자 특히 1세대가 이땅의 주류에 진입하기란 매우 어렵다. 때문에 자연히 고국을 더 바라보게 되고 고국의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역이민한 인물들 가운데는 언급한 박지원 전 실장처럼 한국 사회의 중심에 다시 선 인물들이 적지 않은데, 그들이야말로 동포 사회에서 때론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론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미국에서의 22년 언론 생활의 한 장을 정리하고 또 바람직한 동포사회의 모습과 그 주역의 상을 정립하는데 기여하고 고국의 독자들에게는 미국과 미국사회의 또다른 모습을 전하겠다는 뜻으로 연재물을 준비하고 있다. 두 번에 걸친 고국방문도 그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로 인물 중심으로 얘기를 풀어나가려 하는데 1부가 '태평양을 두 번 건넌 사람들'이며 2부가 '유리지붕에 다친 사람들'이다. 전자는 미국에서 바라본 한국정치, 후자는 한국쪽 시각으로 바라본 미국정치가 될 것이다.

태평양을 두 번 건넌 사람들로는 박 전실장 이외에도 민주당의 김경재 의원, 김혁규 경남지사, 유종근 전 전북지사, 민주당의 유재건 의원, 한나라당의 박원홍 의원, 그리고 김한길 전 문광부장관 등을 생각하고 있다. 모두들 필자와 작건 크건 개인적인 인연과 기억이 있는 편이기에 그를 중심으로 그들의 궤적을 살펴보고 그들의 활약(?)이며 영욕이 고국과 동포사회에 어떤 의미를 던지고 있으며 이곳에서 바라본 고국 정치의 문제점은 어떤 것들이며 그 해결책을 따져볼 생각이다.

그리고 한인 동포들의 미 주류사회 진출과 관련한 몇몇 중요한 사건과 그 주인공들의 행적이 연재의 2부인 '유리지붕에 다친 사람들이다. 기회 있을 때 마다 강조되는 얘기로 동포들의 미국 메인스트림(주류) 진출은 오랜 꿈이자 의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른바 유리지붕, '글래스 실링'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을 기회의 나라이고 자유의 신천지라고 일컫지만 큰 두께의 유리지붕이 존재하고 있어 눈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사회 주류 층에 오르려면 대개는 목이 부러지고 마는 현실을 빗대어 한 표현이 글래스실링이란 말이다.

이 글래스실링 문제와 관련해 최근 큰 관심과 논란을 불러 왔던 몇몇 사건이 공교롭게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밀어 닥쳤다. 미 연방 상원의 밥 토리첼리 의원을 사퇴하게 한 데이비드 장 사건,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해군 정보국 스파이 사건의 로버트 김 사건, 그리고 동포사회 청소년 문제와 연관돼 뉴욕주지사 선거캠프에 대한 일종의 뇌물사건인 유영수씨 사건, 어렵사리 연방 하원 3선을 이뤘음에도 4선에서 주저앉아야 했던 김창준 의원 케이스가 그것들이며, 여기서 '우리'라 함은 필자와 미 연방검사출신 변호사인 아내를 말한다. 이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미국의 정치제도 사법제도 선거제도 등을 함께 다뤄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제현들의 성원과 질책을 부탁 드린다.

그 첫 번째로 박지원 실장의 영욕과 부침을 살펴본다.

***박지원<1>**

박지원씨 만큼 세인의 이목에 그 이름이 등장한 이래 끊이지 않고 논란과 관심의 대상이 됐던 인물은 흔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DJ의 해결사'로 시작해서 '부통령' '인의 장막의 중심인물' '실세' '왕수석' '온갖 비리의 중심' '국민의 정부를 망친 장본인'등 그를 따라 수식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는 72년 미국으로 이민 와 87년 귀국하기까지 15 년간을 미국 뉴욕에서 살면서 사업체를 일궜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구축했으며 그후 부침은 있었지만 DJ의 최측근으로 지금까지 자리하고 있다.

80년대 초반 그의 뉴욕내 사업체였던 데일리 패션(가발및 잡화를 수입 도매하는 회사)에서 일했던 한 동포는 지금도 이런 기억을 되뇌이곤 한다.

"박사장 에게는 확고한 경영 철학과 모토가 있었습니다. 입사한 첫 날부터 이를 강조하곤 했는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첫째 충성을 다하라, 둘째 세일즈는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파는 것이다. 셋째 내일 큰일을 위해 기도하지만 오늘의 작은 일에 열심히 매달려라' 이것들이었습니다."

박지원씨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전 일산이며 동교동에 살 때 매일 새벽 가장 일찍 그 집 대문을 두드리는 이가 바로 박씨였는데 5년여의 그 기간 동안 단 두 차례만 아침 방문을 걸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DJ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주군인 DJ를 위해서라면 몸을 아끼지 않았고 굳은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력 신문사 사장실에 쳐들어가 호통을 치고 유리컵을 던졌다는 일화며 무슨 일만 터지면 먼저 사표를 던져 주군을 지키려 했던 것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충성을 다하고 자신을 던지며 작은 일에 열심이지만 내일의 큰일을 위해 기도한다는 그의 모토와 어울리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도 있다. 박씨를 잘 아는 일가 조카뻘 청년이 했다는 얘기다.

"목포나 광주에 가면 지원이 아저씨보다 부지런한 사람 5만명쯤은 더 있을 겁니다. 또 그곳에 가면 지원이 아저씨보다 김 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 5만명쯤 이상 더 있을겁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이 지원이 아저씨를 그토록 찾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봐야죠."

숫자야 자의적이라 해도 일견 맞는 말 아닌가. 그 충성심이나 부지런함으로 말하면 경천동지할 만큼 특출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중독증에라도 걸린듯 박지원을 다시 찾곤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심사는 무엇이었고 그 의중에는 어떤 것이 들어 있었을까?

DJ가 그를 가까이 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총애를 돈독히 하면 할수록 세간의 그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으로 쏠렸고 지금에 와서는 세상사람 거의 대부분이 그는 잘못의 화신처럼 여기게끔 되면서 그의 철창 행이 당연한 것처럼 운위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이번 서울 방문 때 야당의 한 의원은 "이번 북한 송금 파문 말고도 박지원 전 실장이야말로 온갖 비리에 다 연루돼 있다"면서 "그에 대한 사법처리는 불가피하다"고 했다. 뚜렷한 증거가 있냐는 질문에 있다고 자신있게 답했었다.

박 전 실장과 각별히 돈독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여당 민주당의 중진의원도 그의 사법처라를 당연시하면서 "그만큼 국정을 요리하면서 해볼 것 다해 봤는데 잠깐 교도소에 간다고 해서 아쉬울 것 뭐 있겠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

또 여권의 한 인사는 "박씨야말로 국민의 정부를 이 모양으로 만든 장본인"이라면서 "특히 인사부문에 있어 월권과 정실이 심했다"고 토로했다.

이같은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우선 작금의 언론 보도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근자의 언론 보도들은 결코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오히려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그가 정치권에 등장, 최 장수 야당 대변인의 기록을 세우고 있을 무렵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에 대한 보도는 옆에서 보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참으로 우호적이었다. 필자의 관찰로는 DJ 의 집권후 청와대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고 문광부 장관으로 부임했을 때부터 결정적으로 나빠지지 않았나 싶다. 권력과 대척점에 서야하는 언론의 소명상 그의 권력이 많아지면서 비판의 강도가 높아졌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비리의 부분에 있어 어떤 증거들이 앞으로 나타날지 모르지만 일단 차치하고 지금의 여론몰이식 예단의 상황을 보면서 필자는 현정치권이 똘똘 뭉쳐 박 전실장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인상을 받았다.

박지원씨의 실장의 공과는 앞으로 시일이 지나면서 밝혀지겠지만 재미동포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나이 30에 적수공권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서울 수준으로 보면 별 것 아니겠지만 남다른 노력으로 사업도 크게 일궜고 생기는 것 없이 골치 아픈 자리라는 한인회장을 거쳐 그 총연합회 회장에까지 올랐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정계에 진출, 흔히 말하는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권력자로까지 오르지 않았던가.

그는 이른바 연줄, 계보와도 크게 관계없는 사람이다. 한때 5공 실세에 접근해 여권을 기웃거리기는듯 했으나 그후엔 오직 김대중 전 대통령 한사람만을 애오라지 바라보며 충성을 바쳐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그에게 남들이 말하는 그럴싸한 학연이나 배경이 되는 다른 연줄이라도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십자포화에 직면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필자는 못내 지울 수 없다. 그에게 계보가 있다면 해외동포계보라고나 할까.

따지고 보면 그는 한국정치의 그간 기형적 행태가 만들어낸 돌출적 인물이다. 그래서 그토록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언론과의 관계로 돌아와 얘기를 풀어가면 선천적으로 박지원씨는 대인관계가 원만한,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특히 기자들과의 관계에서 이 친화력을 발휘해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썼던 흔적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필자의 박지원씨에 대한 첫 기억도 그의 언론관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언론과 관련된 그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시작된다. 벌써 21년전인 82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때 필자는 뉴욕서 발행 되는 뉴욕 동아일보의 햇병아리 기자였었다. 맨해턴 윗쪽인 브롱스에서 무슨 한인단체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 취재를 끝내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차에 동승하게 되었었다.

당시 박씨는 뉴욕 한인회장 임기를 막 끝낸 동포사회 지도급 인사였기에 나로서는 그를 알고 있었지만 특별히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기에 본격적으로는 첫 만남인 셈이었다. 그의 차는 미국산 올스모빌 하늘색 차로 기억되는데 그 차안에서 박씨는 이런저런 얘기를 꽤 들려줬었다.

자신은 젊은 기자들을 무척 좋아하고 또 기자들과 관계가 좋은 편이라는 얘기로 시작해서 언론계에 종사하고 싶었던게 꿈이었다고 했었다. 그러면서 당시 미주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맡고 있었던 진철수씨와의 걸끄러운 사연을 들려 줬던 게 생생하게 기억난다. 박씨는 한번도 언론인들과 사이가 나빠져 본 일이 없는데 유독 진국장과는 나쁜 기억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었어요. 본 뜻은 그게 아닌데 너무 흥분했었기 때문이지. 본인도 아닌 딸네미를 두고 그랬던 게 정말 잘못한 일이지, 안기자가 회사에 들어가면 진국장님 한테 다시한번 사과한다고 전해줘요."

사연인즉 이랬다. 매년 가을 개천절을 즈음해서 뉴욕 맨해턴 중심가에서는 코리안 퍼레이드가 벌어진다. 당시로서는 뉴욕 한인사회의 가장 큰 행사로 협찬사들이 꽤 있어 사업적으로도 쏠쏠한 행사였다. 그런데 그 퍼레이드의 주관처가 한인회가 아닌 특정 신문사였기에 다른 신문사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미주 동아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면서 당시 한인회장이었던 박씨를 신문사 눈치보느라 직무유기하고 있다는 쯤으로 비난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흥분한 박씨가 공개석상에서 마주친 진국장에게 폭언을 했던 것이 사건의 개요였다.

그때나 대변인시절이나 박씨의 입은 꽤 걸었는데 진국장의 10대 후반이었던 딸을 거론한 폭언이었던 모양이다. 큰 뜻은 담겨져 있지 않았겠지만 옮기지 못할 정도의 상소리였다. 그날 회사에 들어와 진국장에게 박씨의 사과 말을 전했더니 벌써 몇번이나 사과받았고 없던 일로 하기로 한지 오래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일로 박씨가 꽤 다혈질이기는 하지만, 뒤 없이 솔직담백한 사람이란 인상을 갖게 됐다.

그후 박씨는 각지역 전현직 한인회장들의 모임인 미주한인연합회 회장에 올랐기에 이런저런 취재 일로 자주 마주칠 수 있었는데 언제나 활달하게 인사를 건네며 각별히 기자들에게 잘 대해 줬다. 이처럼 유난히 정치적 인사에 능하고 언론에 많은 신경을 쓰는 그를 보면서 무언가 개인적으로 품은 뜻이 있으리라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알수 없었지만 당시 그의 사업체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언급한대로 가발을 주로 취급하는 회사였다. 그 무렵 가발경기가 사양길로 접어들기는 했었도 아직은 달러박스였었다.<계속>

***필자에 대하여**

1958년 서울생으로 서울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미국 뉴욕 시립대학 메스커뮤니케이션학과를 다녔고 현재 뉴저지 페얼리 디킨슨 대학 국제관계센터의 연구교수로 있다.
1982년부터 뉴욕에 거주하면서 미주 동아일보, 세계일보 등 교포 언론계서 활동했으며 서울 민주일보 주미특파원을 지냈다. 89년 임수경씨 방북 동행 취재기를 비롯 북한 쿠바 중국 소련 니키라구아등 공산권 국가를 방문, 각종 매체에 취재기를 발표했고 몇차례의 방북 경험을 토대로 한 통일염원 소설 <해빙>(서울 돌베개간 전 3권)을 93년 7월에 발표했으며, 이 소설은 그후 서울의 SBS-TV에 의해 16부작 미니 시리즈로 드라마화 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94년부터는 한국에 일시 귀국, 서울 불교방송에서 시사프로 '생방송 천수천안'을 진행했으며 96년말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동포 라디오 방송 라디오 서울의 시사프로 '시사자키'와 자매 회사인 K-TV의 저녁 종합뉴스, 주말 토크쇼 '토요초대석'을 진행하고 있다.
연락처 dongilah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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