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의 예상보다는 급박하게 시작된 첫 연재에 깊은 관심을 보내준 독자분들께 감사드리면서 한가지 먼저 알려두어야 할 것이 있다. 연재를 준비하면서 박지원씨를 만나 최근의 상황이며 불거진 의혹들과 관련 그의 육성을 통해 많은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작 그럴 본격적인 기회는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요청은 했었다. 하지만 워낙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박씨에게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라고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라는 생각도 하게된다. 조목조목 취재를 했더라면 그의 일방적인 얘기만을 전해야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부언하는 얘기가 되겠지만 필자는 이 글에서 박지원씨와 관련된 새로운 센세이셔널한 폭로라던지 흥미본위의 뒷 얘기를 파헤치겠다는 생각은 당초부터 없었고, 또 그럴 자료들도 갖고 있지 않다.
중립적인 시각을 견지하고자 애쓰면서 나름대로 관심을 지니고 지켜 본 그의 행적과 이를 둘러싼 평가며 의견들을 중심으로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찾아보고 이것이 동포사회며 한국정치, 한국 정치판의 새 지평을 여는데 보탬이 되는 케이스 스터디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두고 싶다. 이는 박전실장 부분 뿐이 아니라 앞으로의 연재 전체에 적용되는 얘기다. 필자주
***"한국사람에게는 한국이 좋지, 할 일이 많잖아"**
두 차례의 서울 방문에서 박 전실장과 두 번 얼굴을 마주하기는 했었다. 한번은 김 대통령 퇴임전 청와대에서였고 한번은 길에서였다.
지난 2월 24일 오후, 길에서 볼 수 있었던 모습이 내가 본 박씨의 가장 최근의 모습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기 전날. 김대중 대통령이 동교동 집으로 돌아오던 날, 바로 그날 동교동 그 집 앞 길에서 잠깐 동안이었다. 그날 오후 숙소에 있는데 뉴욕서부터 알고있는 지인이 김대중대통령이 동교동으로 들어가고 있다며 취재도 취재지만 거기가면 많은 사람 만날 수 있지 않겠냐고 전화를 해왔다.
부랴부랴 동교동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김 전대통령은 집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집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시도는 했지만 경호원의 말인즉 대통령이 너무 피곤하시기에 외부 내방객을 받을 수 없단다. 미국에서 왔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잠시 그러고 대문에서 떨어져 있는데 그때 박 전 실장이 박선숙 대변인과 함께 대문을 나오는 것이었다. 곤색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던 그의 얼굴은 오히려 그 몇달 전보다 환해 보였다.
정면으로 마주친 그와 웃으며 악수를 나누기는 했는데 그는 '언제 또 왔어?' 하는 기색만 보였고 나는 그저 "며칠 뒤 여유 있을 때 연락 드리겠습니다. 한번 꼭 또 뵈야 겠습니다."하는 말만 던졌다. 그는 내 등을 한번 툭 치고는 사람들 쪽으로 걸어갔다.
당시 집 앞에는 40~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아직 있었는데 의외로 박실장의 인기가 좋았다. 서로 그의 손을 한번이라도 잡아 보려 했고 수고했다는 인사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때 까지 거기 남아 있던 사람들의 성향이 그랬기는 했겠지만 작은 키의 한 중년 남자는 차에 오르려는 박씨의 뒤꼭지에 대고 "박실장님 정치 잘하셨습니다"라고 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결코 비꼬는 말이 아니었다.
그날의 만남은 그렇게 잠깐으로 끝났고 그후 며칠 서울에 더 있었는데도 박 전실장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열심히 찾으면 여의도 어디라는 그의 새집이며 마포 어디 쯤이라는 사무실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지난해 12월초 청와대 비서실 건물의 그의 사무실에서의 만남은 그보다는 길었다. 박씨가 뉴욕에 잠깐 다니러 왔을 때 그때도 잠깐 얼굴 본 이래 한 3년만의 만남이었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의 청와대내 사무실, 비서실장실은 생각보다 왜소하고 초라했다. 거기다 화장실 바로 옆이었다. 필자를 맞은 그의 첫마디는 "그래 뉴욕 어때?"였다.
"뉴욕이야 큰 변화 없지요, 다 그저 그렇게 잘 들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혼자 말처럼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 한국 사람한테야 한국이 좋지, 할 일이 많찮아 "
그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는 했는데 특별히 당면한 문제들 특히 정치적인 관심사는 별로 거론하지 않았다. 거의 서로 아는 사람들 근황 얘기로만 20여분을 보냈다. 나로서는 다른 기회가 얼마든지 있으리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라도 같이 할 기회가 있겠지 싶었는데 그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한국사람에게는 한국이 좋다는 말이 참 의미심장했다고 여겨진다. 박씨의 입장에서야 얼마나 많은 일을 한국에 돌아가 했겠는가 싶으니 말이다. 또 그 말속에는 자신이 한 일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서울행을 결코 후회하지 않고 있다는 속내가 들어 있었지 않았나 싶다.
***가발상인에서 시작해 한인회장까지**
하지만 박씨는 뉴욕에서도 바삐 그리고 열심히 움직였던 사람이었다. 박씨가 데일리 패션을 창업했을 무렵 가발경기가 사양길로 접어들기는 했었어도 아직은 달러박스였다. 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가발행상으로 하루에 3백달러를 벌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가발은 뉴욕 동포사회의 젖줄과도 같은 품목이었다. 당시 가발을 큰 가방에 넣어 맨해턴의 할렘이나 부르클린, 브롱스 지역의 흑인촌에 찾아가 노점에 벌여 놓기만 해도 흑인들이 앞다투어 사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가방은 달러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다.
그랬던 가발경기가 74년 3월 연방검찰에 의해 한인 모발조합이 독점금지법 위반혐의로 제소당하면서 찬 서리를 맞았지만 노점 판매가 상점내의 판매로 자리 잡았고 몇몇 한인들은 본격적으로 체제를 갖춘 도매업으로 변모했는데 80년대 초반 박지원씨의 데일리 패션도 그 중 하나였다.
한국의 공장에서 만든 가발을 들여와 미 전역의 소매상들에게 판매해 배달회사인 UPS를 통해 배달하고 수금하는 방식이었는데 가발의 부피나 무게가 만만치 않아 짐을 부려 창고에 정리하는 일, 매장 세일이며 전화로 세일하는 일, 또 세일된 품목들을 규격에 맞게 박스에 포장하고 품목명세서며 청구서 부착해서 UPS 지사나 차량까지 운반하는 일, 모두 힘들지 않은 게 없는 중노동이었다.
박씨도 아침 일찍 출근하면 도너츠를 문 채 반바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창고에 내려가 물건을 정리하는 일로 일과를 시작해 오후면 파김치가 되곤 했지만 높아가는 은행 잔고에 힘을 얻곤 했다고 그 무렵 동포사회를 특집으로 다뤘던 국내 어느 신문에 회고하기도 했었다.
박지원씨는 1942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60년 목포 문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서울 단국대학에서 69년 경영학 학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되어있다. 얼마 전에 그의 학력을 놓고도 몇가지 말이 있었는데 그때 박씨 측은 당초 고교 졸업후 광주의 교대에 진학했다가 단국대로 편입학 했다고 밝혔던 것이 기억난다.
그의 이력서를 보면 70년에 럭키 금성사(반도상사)에 입사했고 72년 동서양행 뉴욕지사장으로 도미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민으로 도미한 것은 아닌 셈이다. 75년에 데일리 패션을 설립했고 80년에 뉴욕 한인회장에 취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미국 온지 8년 만에, 자신의 사업체를 만든지는 5년만에 이민자로서는 상당한 지위라고 할 수 있는 한인회장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이는 최연소 뉴욕 한인회장의 기록이기도 한데 그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그는 빠른 시일 내에 동포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사실은 그 2년전인 78년에도 한인회장 자리에 도전했었으나 선거에서 근소하게 패해 뜻을 이루지 못한 바 있다. 그는 80년 4월 27일 퀸즈의 한 고등학교 강당서 열린 직접 선거에서 등록자(한인회비 정기 납부자) 9천92명, 투표참여 4천3백45명, 득표 2천6백표로 제16대 한인회장에 선출됐다. 당시에도 뉴욕 일원에는 10만이 넘는 동포가 살고있었지만 유권자는 1만명이 넘지 않았던 것이 눈에 뜨인다.
치러본 사람들은 한인회장 선거가 본국의 국회의원 선거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하곤 한다. 어떤 이는 그보다 훨씬 어렵다고 하는데 그 지역이 넓게 산재 돼 있다는 점, 유권자 계층이 너무도 다양하다는 점을 꼽는다. 뉴욕만 하더라도 뉴욕시뿐 아니라 롱아일런드며 뉴저지 북부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 넓이는 서울 경기도 충청도를 모두 합친 만큼이다. 또 그 유권자 계층으로 말하면 그 교육수준이나 생활 수준에 있어 상상을 초월하는 천차만별인 것이 사실 아닌가.
미주뿐만 아니라 한인 동포사회가 형성돼 있는 세계 각지 한인회의 회장 하면, 명예욕에 물들어 목에 힘이나 주면서 본국 쪽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성 인사들의 신분상승 코스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꼭 그렇게만 단정할 수는 없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나름대로는 동포사회에 봉사하겠다는 열정이 있어야 하고, 또 선거를 치루고 각종 행사를 주관해야하며 상근 직원의 급료 등 예산에도 일정부분 책임을 져야 하며, 또 자신의 이른바 품위유지에도 꽤 많은 돈이 들어가야 하기에 재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자리가 한인회장 자리다.
실제 한인회장 중에는 남다른 봉사정신과 소명의식으로 동포사회 발전에 헌신해 존경을 받는 인물도 적지 않다. 이런 저런 문제점이 노출되고 눈쌀 찌푸려지는 잡음이 들릴 때도 있지만 한인회가 동포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국내의 동포들에게는 생소하거나 관심 밖일 수밖에 없지만 해외 동포들에게는 꽤 연원이 있고 중요한 사안 중의 하나가 한인회의 바람직한 역할이며 그 위상에 관한 논쟁이다.
한인회 문제를 빌프레도 파레토의 심리주의적 사회학 논거를 빌어 현학적으로 추상화한다면, 인간의 사회가 끊임없이 균형을 추구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동포들에게 있어 한인회는 그 균형의 표상이 돼야 한다는 정서와, 이를 부정하거나 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대상이거나 그 장이 되어 있다고 파악한다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박지원 한인회장의 정치적 야망**
2년의 임기 동안 박씨는 경노잔치, 억울하게 살해된 동포의 신원운동, 청소년 선도 캠페인 등 일반적으로 한인회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크게 무리 없이 해냈다는 평을 듣는데 그동안 중구난방격으로 현실적이지 못했던 뉴욕 한인회칙을 정비한 것이 그의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한편 그가 회장으로 있던 시기인 1980년 10월3일 뉴욕 맨해턴의 개천절 한인 퍼레이드 행사가 첫번째로 열려 그후 연례행사로 굳혀졌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이 행사를 어쨌든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한인회가 맡지 못하고 특정 신문사 소관으로 넘어가게 했던 점은 논란과 아쉬움을 남겼다는 평가도 있다.
81년 1월30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했었다. 박씨는 한인회장 자격으로 각 단체를 아우른 환영위원회를 구성해 그 위원장을 맡았고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교민 리셉션을 주관하기도 했다. 그때 한쪽에서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환영했지만 한쪽에서는 "광주의 살인마를 처단하라"는 규탄 시위가 열렸었다. 그런데 참여자 수를 보면 전자가 20배는 더 됐었다. 그것이 한인사회의 당시 주소였다.
여기서 명기할 사실은 동포들의 정치적 의식수준인데, 동포들은 자신이 이민 온 시점에서 그 성장이 딱 멈춰진다는 것이다. 60년대에 이민 왔으면 그 수준 그대로, 70년대에 왔으면 그 수준 그대로 최루탄이며 통행금지, 철조망, 긴급조치를 그대로 가슴에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서울의 소식과 정보에는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자신의 가슴을 열고 그 변화를 받아드려는 자세에는 영 인색한 것이 일반이다.
이런 상황과 여건이지만 그 안에서는 또 나름대로의 사회적 지위며 영향력을 놓고 옆에서 보기에는 그렇게 심각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도 자신의 열정을 다해 이른바 파워게임에 몰두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개인생활과 가정생활을 희생하면서 한인회며 각 지역 단체, 또 직능 단체에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동포인사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들의 참여와 활동이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구에서 기인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박지원씨는 이민 10년만에 나름대로는 이룰 것을 다 이룬 셈이었다. 경제적 욕구가 큰 사람이었다면 사업에 더 정진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박씨는 그것보다는 권력, 명예 이런 것에 더 쏠리는 성향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가 눈길을 돌린 곳이 바로 한국 정치판이었다.
영국의 정치학자 버나드 클릭은 소스타인 베블렌의 크레덴다(credenda, 통치,정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지적 근거들)이론을 바탕에 두고 미국사회와 정치를 분석하면서, "미국 사회에는 정치를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장이라기 보다는 공통의 신념을 지닌 여러 사회세력들간의 이해 조정의 장으로서 파악하는 자유주의 이념과 과학의 가치나 기술문명에 대한 공동체 일반의 보편적 신뢰감이라는 두가지 문화적 특성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꽤 긍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10년 미국생활이 박씨에게 큰 갈등없이 5공 세력과 DJ로 상징되는 민주화세력을 등가치로 동시에 보는 실용주의를 자연스레 체득하게 했던 모양이다. 이런 점은 그후 그의 행적에서도 자주 보여진다.
박씨의 개인사적으로 볼 때 그가 한국의 정치권에 눈길을 쏟고 있구나 하는 인상이 짙었던 무렵인 83년 가을, 김대중씨와의 만남은 그의 운명의 지침을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DJ와의 만남, "선생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
박지원씨는 83년 워싱턴 근교인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의 아파트에서 김대중씨와 첫 대면을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에 있을 때 살던 아파트다. 그날 만남에서 박씨는 DJ와 시국관을 놓고 장시간의 토론을 했고 이에 감복해 '선생님'의 절대적 신봉자로 다시 태어 났다고 말한다.
박씨 스스로도 이날 김대통령과 자신의 첫 만남을 '운명적 만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선생님(DJ)과 나는 서로의 시국관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때로 내 생각과 다를 땐 반론도 펴고 하다보니 제법 열띤 토론이 되었다. …두 시간 여의 토론 동안 나도 많은 생각을 얘기했지만, 결국 그때까지의 내 삶과 생각이 크게 잘못됐음을 선생님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주로 시국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해방 후부터 그때까지 우리 현대사의 문제점을 너무도 명확하게 지적해주셨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시기도 했다. 80년 서울의 봄 당시 김영삼씨와 협력하지 못하고 분열했는데, 그것이 결국은 군부세력에 빌미를 제공한 계기가 되었음을 인정하셨던 것이다. 선생님의 얘기를 들을수록 내 가슴은 이상한 환희로 벅차 올랐다. 여태까지 잘못 살아왔다는 후회보다는 이제부터 정말 참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박씨의 자전적 에세이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그리고는 박씨는 DJ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선생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
박씨가 잘못 살아 왔다고 한 것은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겠지만 좁게는 그 무렵 전두환씨의 환영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고 그의 동생인 전경환씨와 여러 차례 어울리는 등 당시의 여권을 넘봤던 자신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으리라.
박씨와 전경환씨와의 관계를 놓고 박씨가 뉴저지 어느 식당에서 방미한 전씨와 함께 있을 때 일단의 동포 청년들에게 달걀세례를 받기도 했다는 얘기가 퍼져 있으나 며칠 전 그날 달걀을 던진 당시자의 한사람이었던 양호씨에게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 자리에 박씨는 없었단다.
어쨌든 그 무렵 전씨와 절친하게 지내고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어울려 그쪽을 통해 본국 진출을 꾀하려는 구나 하는 인상을 짙게 풍겼던 것은 사실이다. 나름대로는 이룰 것을 이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보다 큰 뜻(?)을 펴기 위해 눈을 돌리는 곳이 정치 쪽으로 귀결되는 것이 일반이다. 박씨로서는 여건상 각종 제약이 많은 미국 정계로의 진출보다는 모국 쪽이 더 쉽게 다가왔고 그 당시 한인회장 또는 미주한인총련 회장이란 직위를 이용해서 자연스레 접촉하고 접근할 수 있는 쪽이 당시의 여권이었을 게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런 행적을 두고 해바라기성 철새 행각이 아니었냐고 따가운 시선을 던지면서 그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삼기도 하는데,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박씨에게 할 말이 더 많다고 여겨진다.
당시 김대중씨는 망명자의 신분이었고 그의 장래를 밝게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박씨도 "당시만 해도 김대중씨가 다시 복귀해 대통령에까지 오르리라고는 정말 상상을 못했다"고 97년 대통령선거 이후 필자와의 생방송 전화 통화에서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술회한 바 있다.
당시로서 DJ의 지지자가 된다는 것은 보장이 전혀 없는 형극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박씨는 이 길을 택했고 그 이후 그의 행적에서 한눈을 팔았다던지 다른 생각을 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김경재 의원이 DJ에게 소개**
박지원씨를 DJ와 연결시켜 주었던 인물이 민주당 김경재 의원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듯했던 김 의원과 박 전실장이 어떤 경로로 그토록 친하게 되었으며 김의원이 박씨를 DJ에게 소개하게끔 됐냐는 점이다.
김경재씨는 당시에도 전형적인 DJ맨으로 알려져 있던 인사였다. 독립신문이란 주간지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주 광고 시장이며 배급처가 뉴욕과 필라델피아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포사회에서 언론활동을 한다는 것은 춥고 배고픈 일이다. 특히 독립신문과 같이 당시 군사 정권을 드러내놓고 타도대상으로 비판하고 특급 기피인물인 김형욱씨의 회고록을 대서특필하는 정치신문의 경우에는 그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후원자 광고주에 언제 목말라 있기 마련이다.
83년 여름 무렵 필자는 미주 동아일보가 두 개로 갈라져 떨어져 나온 대한일보(생각해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일종의 계약 리스 형태였던 뉴욕의 동아일보가 잘 운영되는 듯 싶자 사주측인 서울의 동아일보가 직접 나서 뉴욕 지사를 직영체제로 접수했던 것이다. 인촌의 아들인 김남씨가 사장으로 나섰고 기존의 미주동아는 대한일보로 지명을 바꿔 발행인 하장보씨가 계속 운영했다)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우연히도 하 사장이 아주 재미있는 저녁모임에 간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박지원 회장, 김경재 발행인이 함께 하는 저녁 모임을 주선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그 무렵엔 김 박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식이 팽배했다는 얘기다.
그랬는데 다음날 하 사장이 박지원씨를 잔뜩 칭찬하는 것이었다. 전날 모임이 아주 좋았는데(3차까지 흥겹게 어울렸단다) 박지원씨가 흔쾌히 김경재씨의 신문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박지원씨 통이 커." 하사장이 했던 말이다.
이런 필자의 기억에 따르면 김 박 두사람의 교분은 그 연원이 오래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은 맨해턴에서 자주 눈에 띄었고 이런 두 사람의 급진전한 교분이 박씨와 DJ와의 '운명적 만남'으로 이어졌던 모양이다. 이는 말하자면 당시 박씨의 정치적 소양이나 식견이 고정돼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람을 사귀거나 가슴을 여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된다.
이후 박씨는 김대중씨의 미국내 친위조직이라는 인권문제 연구소 뉴욕 지회장을 맡게 돼 본격적으로 DJ맨으로 변신하게 된다. 일단 조직에 들어오게 되면 충성을 다하고 세일즈는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자신을 파는 것이라는 그의 모토에 따라서였는지 일단 DJ맨으로 변신하자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던졌다. 그야말로 DJ의 분신이 돼 DJ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했고 DJ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 되기 위해 헌신을 다했던 것이 그의 이후 행적이다.
***가신정치 속의 박지원**
정치사를 봉건 군주제인 왕정정치에서 공화제로 넘어오고 또 시민시대의 민주정치로 넘어 오는 과정으로 본다면 이같은 박씨의 역할은 군주제와 민주정치의 중간쯤에 머물러 있는 특수한 과도기적 정치 행태, '가신정치' 체제 하에서였기에 가능했었고 또 힘을 받을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가신정치라 불리우는 3김 시대 한국의 정치 행태는 나름대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DJ가 사형언도 까지 받았던 망명자였다는 사실이 웅변하듯 그 시절의 한국 정치는 고전적 의미의 정치가 결코 아니었다. DJ사단의 활동은 민주화라는 추상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가치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무자비한 탄압에 대항해 생존을 꾀해야 하는 일종의 지하운동과 같은 성격을 분명히 띠고 있었다.
때문에 같은 가치를 내세우는 개인과 집단 사이의 정치적 이해를 위한 결속이라기보다는 혈연 이상의 끈끈한 동지애가 필요했고 구심점인 지도자를 보호하고 조직을 지켜내기 위한 위계질서와 충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됐던 측면이 있는 것이다.
앞서도 잠시 언급한〈정치과정론 The Process of Government〉의 저자 아서 F.벤틀리는 현대 미국 정치학계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군림한 인물이다. 그는 "모든 형이상학적 추론과 규범적인 공식체계는 허상이나 무가치한 정신의 폐물"이라고 단정한 뒤 "정치학의 연구대상은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관찰가능한 '사실'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정치학의 기본개념을 공동체를 형성하는 '내부 집단'으로 설정하고 '국가'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모든 가설체계들을 부인했다.
그러면서 "정치현상의 실질적 구성요소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행태'와 이들을 유도하는 복잡한 '과정'들"이며, "구성원들의 활동은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입법·사법·행정 기능으로 발현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정치 행태에 있어 심리적 요소를 중시해 정치학이 심리분석적인 통찰력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비슷한 시기 영국의 그레이엄 월러스가〈정치학에서의 인간본성 Human Nature in Politics〉에서 정치학은 계량적인 방법론에 기초하여 비정상적인 행태 및 무의식적인 단정과 같은 정치생활 내면의 심리적 요소(인간본성)에 유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월터 리프먼 역시 〈여론 Public Opinion〉에서 유사한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동교동계라고도 불리우는 DJ사단이 후일 집권 했을 때의 정치 행태가 과거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의 지하 운동적 구태를 일신하지못하고 폐쇄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근 문제가 되는 대북 송금 건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 슬로건으로 민주화를 내걸었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이를 일정부분 이루었다고 자평하면서도 실제 내부서는 전혀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민주화 운동 시절이나 야당시절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내부의 차이와 알력이 노출되고 서로의 신경전 내지는 반목으로 이어졌던 측면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와중에 주군 DJ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고속 성장을 한 박지원씨는 그런 정치행태가 내포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문제점들의 상징처럼 표면으로 돌출된 측면이 분명히 있다. 또 실제 박씨의 변신과 참여가 시의적절했는지 아니면 그의 운세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DJ맨들이 겪었던 고초를 그는 전혀 공유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질
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홍일, "아버님은 나보다 박실장을 더 좋아해"**
다시 박씨의 과거로 돌아가면 박씨는 85년 2월 김대중씨가 귀국할 때 같은 비행기로 동승해 귀국하지는 않았지만 그 무렵 이후부터 한국을 자주 들락이며 김대중씨를 찾았고 85년에는 아예 영구귀국을 단행한다. 태평양을 다시 건넜던 것이다. 그때는 아직 부인과 아이들 (두딸)은 뉴욕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85년 귀국이래 87년 총선을 거쳐 92년 전국구로 국회에 등원하고 수석 부대변인으로 각광을 받기까지 그는 7년 가까운 야인 생활을 해야 했다. 88년 국회의원선거에서도 전국구 지명을 받기는 했지만 당선권과는 먼 순번이었다. 87년 대선 때는 평민당 해외동포 특위 부위원장겸 고향인 진도군 대통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89년에 국내 조직화한 인권문제 연구소의 이사장을 맡았던 것이 그의 명함을 따라다닌 직함이다.
이 가운데 인권문제연구소는 요즘이야 천덕꾸러기처럼 돼버려 이제 아예 어느 대학교로 넘어 갔다고 하지만 바로 그 유명한 아태재단의 전신이다. 이 재단의 이사장이라는 직함은 대단한 것 아닌가. 얼마 전까지 아태재단 이사장이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쉽게 이해가 간다. 그만큼 초기부터 김 전대통령의 박씨에 대한 신임은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정작 김대통령 본인은 박씨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김대통령은 알려져 있다시피 대단히 신중한 편으로 공개적으로는 사람에 대한 평가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 그런 김 전대통령이 이례적으로 박 전실장의 자서전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첫머리에 '내가 본 박지원 대변인'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박씨를 묘사하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 놀라운 정치적 순발력.' 박지원 대변인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정치인의 최고덕목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이다. 생김새와 언변과 문필력과 판단력이 모두 잘 어우러지면 어느 분야에서든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법인데, 박 대변인이 그런 정치인이다."
김대통령은 "박대변인과 나는 처음 만난 그날부터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대화도 잘 통했다. 끈기와 인내력, 불굴의 성실성으로 그가 미국 한인교포사회에서 으뜸가는 기업인으로 성장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고 평가한 뒤 박 전대변인이 자신의 인권문제연구소를 헌신적으로 도왔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리고는 이제는 자신이 박 전대변인을 도울 차례라고 말한다.
"박대변인의 꿈은 귀국해서 정계에 입문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돕기로 결심했다. 나는 85년 귀국한 후 다시 정치를 시작했으나 그는 88년 총선에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등원하지 못했다. 92년에 그는 전국구로 국회의원이 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과감히 그를 대변인으로 기용했다. 전국구에다 초선 의원에게 어떻게 대변인을 맡기느냐는 주위의 만류도 있었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를 알기 때문이다. 일종의 도박을 한 셈인데 보기 좋게 성공을 거두었다. 재치와 논리정연함으로 그는 다른 당의 대변인을 쉽사리 따돌렸다."
마지막으로 정겨운 말투로 박전 대변인과 더불어 정치활동을 하는 즐거움을 묘사하고 있다.
"박대변인은 나의 하루 일과 중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다. 새벽 6시30분, 그는 정적에 잠긴 우리 집을 깨운다. 그로부터 온갖 보고를 다 듣는다. 내가 일일이 살펴보지 못한 모든 정치현안을 그로부터 알게 된다.…그의 하루는 어느 날이건 자정까지 이어진다. 석간을 챙기고, 식사는 거의 업무적으로 이뤄진다.…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는 나를 찾아서 알릴 것을 알려준다."
책 서문에 쓴 인사성의 글이라고는 하지만 형식적 언사가 아닌 박씨에 대한 애정과 신임이 그대로 묻어나는 표현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책이 나온 게 96년 총선 무렵이었는데 그후 시간이 지나면서 DJ의 신임과 총애는 더 깊어진다. 오죽하면 김 전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 의원이 "아버님은 저보다 박 수석을 더 좋아하시나 봐요" 했다고 하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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