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가 늦어지고 있다는 독자들의 원성이 들려오는 가운데 박지원씨 수행비서의 집을 특검팀이 전격 수색해서 컴퓨터며 자료들을 압수 해 갔다는 소식과 관련해 이미 보냈던 원고를 다시 불러와 앞부분에 몇자 새로 적는다.
압수수색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특검이 외곽에서 본령으로 들어가는 수사기법을 동원한 모양이다' 싶으면서 이제 박씨를 향해 본격적으로 옥죄어 들어가는 국면이 전개되지 않을까 생각됐다. 그런데 다시 전해지는 얘기는 특검팀이 전날 2000년 3월 박 전 실장이 싱가포르에서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원장을 접촉할 당시 수행한 것으로 알려진 하모씨 오피스텔에서 압수한 압수물에 대한 분석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씨에 대한 압수수색은 대북송금 의혹을 풀기 위한 단서를 포착하기 위해 실시한 것으로, 당시 여권 고위인사에 대한 소환을 앞당기기 위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박씨를 소환을 하기는 할 모양이지만 그 시기가 조만간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 국내 언론인의 전언에 따르면 박씨는 특검의 수사와 관련, 최근에도 "내에게서 새로 나올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자신감을 피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차피 진행돼야할 수순이라면 변죽만 울리고 시간만 끌 게 아니라 빨리 진행돼 최소한 제기된 의혹에 대한 전말만이라도 풀어졌으면 하는 것이 필자를 비롯한 다수 국민들의 바람일 것이다.
사실 특검에 대해서는 필자도 할말이 많다. 특검제란 법무부가 다루기 어려운 직위에 있는 사람의 혐의사실 조사를 위해 직위의 독립성을 가진 특별검사가 다루도록 한 제도로 미국이 그 본령이다.
한국의 특검제 도입은 정치권력이 깊게 개입돼 있는 중대사안에 대한 수사로, 실체적 진실 규명에 정치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검찰의 수사로는 한계가 있기에 중립적이며 강제력을 지닌 기구에 의해 조사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당위성을 분명히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에서 몇 차례 실시된 바 있는 한국의 특검이 과연 그 실효를 거뒀는지는 의문이다.
실은 미국에서조차 지난번 클린턴 부부를 7년이나 조사했던 케네스 스타 특검이후 그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돼 존폐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 폐지되지는 않았다. 케네스 스타팀은 엄청난 국고를 사용하면서도 정작 개인 사생활의 부분인 성 스캔들만 찾아내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미국과 백악관을 조롱거리로 만들게 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특검에 시달렸던 힐러리 클린턴 여사는 "특검팀은 할 수만 있었다면 우리 부부가 자는 침실에 작은 침대를 갔다놓고 같이 자려 했을 것"이라고 볼멘 소리를 던진 바 있다.
이른바 '대북송금 의혹사건'을 수사중인 한국의 송두환 특검팀은 현재 일단은 송금 절차에 집중적으로 매달려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특검팀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른바 통치권적 차원으로 초법적이며 은밀하게 진행됐던 이번 일을 어디까지 밝혀내고 또 어디까지를 어떤 식으로 기소와 처벌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며 그것이 과연 남북관계와 나라발전 전체, 좁게는 어차피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의 헌법체제며 앞으로의 대통령 임무수행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필자로서는 염려가 앞서는 게 사실이다. 특검수사에 대한 얘기는 다시 다루기로 하고 박씨의 얘기로 돌아간다.
박지원씨는 DJ가 97년 대선에 승리, 정권을 잡기 전에는 민주당에서 국민회의로 이어지는 야당의 최장수 대변인으로 그의 눈과 입이 되었고 당선자 시절까지 포함해 김대중 대통령에게서 7번이나 공식 임명장을 받았다.
그는 대통령 인수위에서도 대변인으로 일했고 ‘국민의 정부’ 출범 뒤엔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대통령 정책특보, 그리고 청와대 비서실장의 직함이 적힌 임명장을 받았는데 이는 아마 전무후무한 기록일 것이라는 게 정부와 정가 안팎의 얘기다.
이 가운데 박씨 개인사적으로나 세간 평판의 한 분기점이 됐었던 것이 99년 5월의 문화관광부 장관 부임이 아니었나 싶다. 그 이전 야당 대변인 시절이나 청와대 공보수석 시절만 하더라도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막말성 논평이며 유력신문사 야밤 사장실 소동 등으로 쉼 없이 논란거리, 얘깃거리를 만들기는 했어도 기자들에게나 또 세상 사람들에게는 DJ의 부지런한 최측근 심복으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겨지면서 혹독한 비난이나 질
시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었다는 것이 필자의 관찰이다.
물론 집권세력 내부에서의 그것들은 외부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권력자의 총애와 주변의 질시며 눈총은 비례한다는 점에서 그 무렵부터도 적지 않은 뒷 얘기가 있으라는 것은 익히 짐작이 가기는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는 참모형이라고 얘기를 한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고 세상의 많은 평가는 결과론적으로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다지만 적재적소라는 점에서 보면 그는 청와대에 그냥 남아 참모역할을 계속 수행했었던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김대중 전대통령이 정계 복귀를 행하고 국민회의를 만든 뒤였던 97년 2월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박씨는 국민회의 기획조정실장이라는 직함으로 김총재를 수행해서 뉴욕에 왔었는데 아스토리아메너라고 한인동포가 경영하는 큰 연회장에서 동포 초청행사가 열렸었다. 한 천명 가까이 모였는데 비서진이며 부총재급을 위시한 현역의원 등 기라성(?)같은 국민회의 멤버들을 제치고 김 총재를 수행하고 안내하는데는 박 실장이 단연 씩씩한 선두였다.
그때 박씨는 96년 총선에 국민회의 공천으로 경기 부천 소사에서 출마했다 낙선한 뒤여서 의기소침해져 있을 것으로 여겼었는데 전혀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기에 필자도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면에는 총재의 신임이 실려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그날 모임을 생중계를 했기에 시종 집중을 하면서 지켜보았는데 박대변인은 사람들을 소개할 때도 어떨 땐 총재보다 앞서 활기있게 인사를 나누고 농담을 던지는 데도 총재는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곤 했었다. 장소가 뉴욕이라 그랬기도 했겠지만 김 총재의 그에 대한 신임에 더해 애정까지도 느끼게 했던 광경이었다.
김대중 총재는 그날 정치를 다시 하게된 소회를 중심으로 자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올 것으로 믿으며 그땐 정말 준비된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는 자신감을 피력해 입추의 여지없이 연회장을 메웠던 뉴욕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았었다.
박씨와도 그날 생방송 인터뷰를 했었는데 고향에 온 것 같다고 운을 뗀 그는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면서 더 낳은 세상을 만드는데 뉴욕 출신 동포가 활약하는 모습을 봐 달라고 했고 또 뉴욕의 동포들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신을 찾아달라고 얘기했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 때문에 후일 구설수에 오르고 몇몇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는지도 모른다.
연설을 마치고 행사장을 나서는 김대중 총재를 쫒아가기 위해 급히 마이크가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나가는 박씨의 뒷모습을 보면서 뉴욕의 언론계 선배 한사람과 나눴던 대화 한토막.
"저 친구 이젠 완전한 DJ맨이 됐구먼."
그 선배와 박지원씨는 동년배로 20대 초반 한국서부터 절친하게 지냈던 사이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박회장 저 친구 젊었을 땐 김영삼 총무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했었어."
"그래요? 나한텐 기자가 되고 싶었다고 했었는데..."
박씨는 젊었을 때부터 정치에 꿈이 있었단다. 그것도 의정 활동을 통한 정치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 당시 원내총무로 이름을 날리던 김영삼 총무 얘기를 자주 하면서 자신의 정치의 일차적 목표가 신민당 원내총무 라고 했다나. 이 말을 전해준 그 선배는 언젠가 자신의 기사에서 이 얘기를 썼다가 박씨로부터 쓸데없는 옛날 얘기 썼다고 핀잔을 들었다는 얘기까지 전해줬다. DJ맨의 꿈이 김영삼 총무였다는 것 어울리지 않기는 하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참모보다는 리더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인지상정인지 모른다. 적재적소를 얘기하면서 박씨는 참모에 더 어울린다고 했지만 이는 결과론적인 얘기고 스스로 국회의원 원내총무, 그 이상의 것을 꿈꾸었다는 것은 비난할 이유가 없다.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 얘기가 나왔을 때 박씨는 고사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리고 장관 재직시였던 2000년 4월 총선 때도 지역구 출마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알려진 것도 다 이런 개인적인 꿈과 연관이 있었던듯 싶다. 그런데 그런 꿈, 어려운 일, 힘든 일을 하려 하기 때문에 고초를 겪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 아니가 싶은데 따지고 보면 박씨에 쏟아지는 비난과 질시도 이 때문일 터다.
박씨의 자전적 에세이집 서문에서 DJ가 '신언서판'을 얘기하면서 박씨에게 이 네 덕목에서 후한 점수를 주면서 박씨에게 빚을 갚겠다고 한 얘기는 전술한바 있는데 이와 관련, 특히 그의 용모와 관련해 DJ가 그를 더 아낄 수 밖에 없는 사연이 하나 더 있다. 워낙 개인적으로도 안쓰럽고 미묘한 일이라 명확하게 날짜까지는 확인하지 못했
다.
박씨의 용모가 친근감 있고 옷을 잘 입는다해서 90년대 초반 어느 유명여성잡지가 선정한 베스트 드레서 정치인으로 꼽히기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 그런데 필자도 느꼈지만 언제부턴가 TV 화면에 비쳐지는 그의 모습이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95년 무렵부터였다고 기억되는데 바로 그의 눈 때문이었다. 지금 그의 왼쪽 눈은 시력이 없는 의안이다. 그런데 그가 시력을 잃게 된 것이 DJ를 보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과로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90년대 초반부터 눈 때문에 걱정을 하기는 했었다. 93년도 무렵 박씨가 그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민주당 대변인으로 있을 때 서울 마포의 길에서 필자와 만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길에서의 인연이 많은 편이기도 하다. 그때 그는 치과에 가는 길이라고 했는데 '바쁠수록 건강에 신경을 쓰셔야 한다'고 인사성 덕담을 던졌더니 그때 '요즘엔 눈도 큰일이야, 안압이 자꾸 높아진다는데....'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이후 병원도 다니고 그랬을 게다. 의사의 처방은 과로는 절대금물. 그랬지만 알려져 있다시피 그가 어디 마음놓고 하룻밤이라도 푹 잘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인가. 겹친 과로는 그의 눈을 더 악화 시켰고 그 무렵 DJ의 무슨 심부름으로 미국 아틀란타로 가던 비행기안에서 눈의 핏줄이 터져 버렸고 그 길로 시름시름 시력상
실까지로 이어졌던 것으로 필자는 측근을 통해 들었다. 이러니 냉철하다고 알려진 DJ인들 그를 더 애틋하게 아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김 전대통령이 박씨를 큰 인물로 만들겠다고 한 얘기는 필자에게도 이런저런 경로로 몇차례나 들은바 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DJ와 박 전실장은 코드가 맞는다는 얘기다.
DJ 사단 늦깎기인 박씨가 처음부터 코드가 착착 맞았을리는 없다. 이와 관련 박씨의 측근 한사람이 들려준 얘기. 야당시절이었던 어느날 박씨가 동교동에 갔는데 김총재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박씨를 따로 부르더니 이렇게 말하더란다.
"자네 뭐하고 다니는거야? 지금 K의원이 어떤 일 하고 있는줄 알아? 어제 누구누구 불러서 무슨 얘기 나눴는지 것 알아?"
이른바 비주류 당내 반대 그룹의 얘기였다. 총재가 나름대로 엄청난 정보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아차 했는데 이어 어떻게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 또 그런 반대 세력과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조목조목 일러 주더란다. 그러면서 박 대변인 개인 얘기로 돌입했단다.
"자네 요즘 좋지 않은 소문 들려오는데 그거 어떻게 된 거야?"
그 무렵 그런저런 구설수가 있었단다.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다고 고했다.
"자네가 먼저 풀어, 자네, 기자들하고 친하잖아, 술자리에서 자네가 먼저 지나가는 얘기처럼 그 얘길 풀어버려 그럼 스캔들이 안돼. 그렇지 않고 쉬쉬 하면서 막으려 하면 더 큰 파문이 되는 법이야."
그날 박씨는 총재 앞에 다시 무릎을 꿇어 감복의 표시를 했고 실제 총재가 일러준대로 했더니 그 구설수는 기자들이 먼저 '별 거 아니네' 하고 넘어가 줬다는 것이다. 그 이후 박씨는 자신의 모든 사유와 행동의 코드를 DJ에 맞췄고 그렇게 살아 왔다는 것이다.
어쨌든 박씨는 DJ의 집권 이후 그의 각별한 총애로 권력의 최중심에 있었고 떠났다가는 이내 눈총 따가운 화려한(?) 복귀를 행하곤 하면서 이른바 DJ의 해결사, 숨은 기획자 역할을 했기에 DJ 정권 5년의 공과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승승장구 했던 박지원씨도 국민의 정부에서 두번 낙마했다. 문화관광부 장관 시절인 2000년 하반기 한빛은행 불법대출 의혹에 휘말려 사표를 내야 했고 또 2001년 11월엔 인사쇄신 여론이 거세지자 사표를 던졌다. 당시 그에게 우호적인 여권인사나 언론의 표현을 빌면 두번 모두 뚜렷하게 박씨의 잘못이 명백하게 들어난 것은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한빛 은행건도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로 처리됐고, 인사쇄신 파동 때도 그저 막역한 감정과 소문들뿐이었지 구체적 비리가 드러난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 쇄신파동의 주 타겟은 권노갑 고문이었기도 했다.
청와대 주변서는 당시 “두번 모두 대통령이 그에게 사표를 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먼저 사표를 던져 국면을 전환시켰다. 김 대통령은 그런 점에 대한 인간적 미안함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 나왔었다.
인사쇄신 여론에 밀려 사표를 던졌다가 두어달만에 특보로 컴백한 2002년 '1·29 개각' 이틀 뒤인 31일 전 열린 국무회의. 관례에 따라 새로 임명된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의 신임인사가 끝나자 갑자기 김대중 대통령이 물었다.
"박지원 특보는 왜 참석 안 했나?”
잠시 국무회의장엔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 대통령 특보는 국무회의 참석대상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작은 소리라 잘 들리지 않았다. 그때 첫 여성 청와대 대변인으로 임명된 박선숙 공보수석이 마이크를 잡았다.
“박지원 특보는 국무회의 참석대상이 아닙니다.”
박 수석의 설명으로 국무회의장은 어색한 분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 사례는 김대중 대통령이 박지원 당시 신임 대통령 정책특보를 어느 정도 신임하는지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로 꼽혔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박 특보에게 ‘실세’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판에, 그 자리에 참석한 장관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김 대통령이 여론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인사쇄신 여론에 밀려 청와대를 나간 사람을 불과 두달여만에 다시 불러들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김 대통령은 왜 그렇게 박지원을 곁에 두고 싶어하는지 그 이유를 두고 당시 언론들이 이렇게 평한 바 있다.
그는 복잡한 사안을 간단하게 정리해내고, 일을 추진하는 데서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또 복잡한 문제들에서 핵심을 뽑아내 이해하는 능력은 감탄할 만하다. 또 일단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하면 화끈하게 밀어붙인다. 누구도 손대기 싫어하는 일이라도 피하지 않는다. '결국 각종 게이트가 지뢰처럼 터지는 지금 시점에서, 박지원이야말로 자기 몸을 던져 정권을 막아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김 대통령이 판단한 것 같다'는 것이 당시의 정설이었다.
그러면서 당시 언론은 그에 대한 비난의 여론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 대통령이 그를 좋아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그에겐 적이 많다. 박 특보처럼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이도 드물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인사들까지 그를 비난한다. 그에겐 대표적으로 두 가지 부정적 평가가 있다. 하나는 ‘김 대통령에게 직언을 못하는 예스맨’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가 대통령 주변에 인의 장막을 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끊임없이 권력을 독점하려고 하고, 이를 은근히 과시하려는 경향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청와대의 한 인사는 “박 특보는 비서실장을 하면 잘할 사람”이라고 평했다. 모든 부문을 관장할 수 있는 비서실장이 그에게 딱 맞지, 일정한 영역을 맡는 수석비서관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그가 자꾸 자기의 업무영역을 벗어나 모든 중요한 사안에 개입하려는 경향을 지적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에게 항상 ‘권력을 쫓고 즐기는 타입’이라는 평이 따라다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한겨레 21 2001년 2월호)
정치인으로서의 박지원 의원, 박지원 장관의 특기할 행적은 크게 다룰만한 것이 없다는 게 중평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국구 초선의원 시절에는 대변인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소회나 자질을 드러내기 보다는 당과 총재의 입장을 대변해야 했고 장관 시절에는 알려진 대로 고유의 문화발전의 일보다는 대북관계 일이며 언론과의 관계에 매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런 참모, 때론 밀사의 역할이 박씨 개인에게나 한국 정치사에 있어 더 큰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또 어느 순간부터 박씨는 확실하게 자신이 리더보다는 참모가 돼야겠다고 궤도수정을 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한국 정치상황으로 보아 기반도 허약한 해외파 늦깎기인 박씨가 의회에 계속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원했다는 원내총무며 그이상의 의회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개연성은 극히 희박하다.
박씨의 영욕은 "법(法)위에 정(情)이 있다"는 한국정치의 모순과 직면한 해외동포 출신 정치인의 영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 법위에 있는 정 때문에 더 크게 오를 수도 있었던 측면도 분명히 있다.
박씨는 국회에 있을 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이었는데 아마 이 인연으로 장관도 문화관광부로 나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박씨 자신은 의원 시절 중국동포 조선족 문제에 힘을 쏟아 이와 관련한 발언도 몇 차례 했고 또 법안을 제출 했던 것을 주변에 자주 얘기하곤 했다. 그 무렵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조선족 불법체류 동포들의 처우에 관해 관심을 쏟았는데 해외 동포 생활의 경험이 그들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갖게 했을 터였다. 박의원은 불법체류 동포들을 범법자로 다뤄 형무소로 보내고 즉각 추방하기보다는 수용소를 만들고 사안에 따라 정착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역설하곤 했다는 것이다.
세상 일은 새옹지마라고 할 수 있다. 복이 굴러 화가 되고 화가 굴러 북이 되다는 사실, 우리도 인생경험으로 느끼곤 하는데 박씨의 경우에도 그랬지 않았나 싶다.
총선에 나가 떨어지고 그래서 대변인 자리도 지킬 수 없었던 시절, 그 시절이 실은 그와 DJ를 더 가깝게 묶었던 시절이었고 그 시절의 정리가 이후 DJ로 하여금 그토록 박씨를 찾게 했던 튼튼한 계기가 됐다는 사실을 필자는 최근에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주 최근에 박씨의 가까운 측근에게 들은 얘기다. 얼만큼 과장이 있을 수 있다치더라도 정황상 그랬었겠구나 하는 고개 끄덕임을 하게 하는 진실이 담겨있는 큰 에피소드다.
국민회의 기획조정실장이란 직함으로 있던 그 시절에도 박씨는 매일 동교동이며 일산을 찾았고 주말에도 총재와 함께 일정을 보냈단다. 97년 대선 국면에 막 접어든 초봄의 어느 토요일, 김총재와 박실장이 서울 강남의 어느 중국집에서 함께 점심을 했을 때였다. 이날 박실장은 작심하고 자신의 생각을 총재에게 전하려 했던 모양이다. 그날의 그 장면을 재 구성해본다.
다른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박실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총재님, 이대로 해선 결코 대권을 잡으실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총재가 화난 얼굴로 박실장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그 무렵 박실장은 그정도 무례는 응석으로 부릴 만큼 총재의 애정을 확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총재님은 망치로 깨도 깨지지 않는 9백만 표를 갖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표로는 당선이 되지 않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래서 지금 애쓰고 있는 것 아니야?"
총재의 표정은 계속 굳어져 있었다.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게 뭔데?"
"JP와 손을 잡는 겁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DJP연합'이 처음 거론되는 순간이었단다.
"뭐라구, 이사람이 그걸 말이라고 해?"
"JP는 작게봐도 3백만표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선권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누군가? 어떻게 나 김대중이가 5.16 쿠데타 세력과 손을 잡는단 말인가? 우리 동지들과 지지자들이 용납을 하겠어?"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지지자들은 설득을 해야 합니다."
박실장은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5.18 광주 학살 세력의 밑으로 들어가 대권을 잡았습니다. 5.18은 17년전의 일이고 5.16은 벌써 37년 전의 일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말하는 총재는 굳은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지만 얼마 뒤부터 한광옥-김용환 라인이 가동된다.
필자의 생각으로도 김대중 대통령과 초기부터 신고를 같이 했던 이른바 가신그룹 멤버들은 그런 발상은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리고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DJ에게 차마 직설적으로 얘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에피소드 언급이 다소 자의적이라 치부한다 하더라도 DJP연합은 당시로서는 경천동지할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런 DJ의 발상의 대전환의 계기를 가장 측근이었던 박지원씨가 한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은 어색한 일은 결코 아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옥고를 치뤘다던지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던지 하는 5.16이며 5.18 군사정권으로부터 직접적인 박해를 받은 바 없는 박씨에게는 미국생활 15년이상의 경험이 더욱 실용주의를 체득하게 했고 그것이 이런 발상의 전환을 가능하게 했지 않았나 싶다. 또 박씨뿐 아니라 이런 저런 경로에서 올라왔을 수도 있는 그런 발상의 전환을 DJ가 고심 끝에 받아 들였던 것이 DJP 연합이었고 이는 국민의 정부 탄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계속)
***필자 안동일: 뉴욕 라디오서울 K-TV 뉴스앵커, 재외동포신문 해외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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