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 의원에게는 꿈이 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도움(둥근지붕) 탑 위에 김대중 동상을 세우는 것이 그의 꿈이다.
"엉뚱한 소리라구요? 얼마나 좋은 아이템입니까? 평생을 민주주의와 조국의 통일을 위해 헌신했던 노벨평화상에 빛나는 국제적인 지도자, 6선 의원, 그런 멋진 아이템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아이템을 제대로 활용 못하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죠."
그는 그래서 도움 구조 위에 동상을 세울 수 있는지, 또 어느 정도의 크기가 가능한지 그런 기술적인 문제까지도 전문가며 의사당 관리 책임자들에게 묻곤 했었단다.
***김경재의 꿈**
그 꿈의 실현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은 현실이 김대중 전대통령 당신에게나 그에게 모두 무척 불만스럽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불가능 하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국면이 바뀌고 적당한 계기가 되면 DJ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같은 논의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아직 그는 굳게 믿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김대중 집권 5년 동안 야당과의 관계가 전례 없이 걸끄러웠던 것에 대해서 아쉬움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김 전대통령의 퇴임 고별연설도 국회에서 이루어 졌었더라면 하고 생각하고 있다.
"대통령이 지팡이를 집고 들어옵니다. 야당석에서야 크게 반기는 기색이 없겠죠, 하지만 의회민주주의와 국회의 권위에 대한 경의 표시로 시작된 6선 관록의 노 정치인의 연설이 자신이 처음 의사당에 들어섰을 때의 감회와 지금 의사당에서 고별을 고하는 감상으로 이어지면서 야당석도 숙연해집니다.
퇴임과 함께 초야로 돌아가는 절절하면서도 진솔한 감정이 담겨있는 연설이어야 합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신명을 바친 감회가 토로 된 후 국민적 관심사가 돼있는 남북문제며 북한 송금문제에 관한 자신의 솔직한 얘기가 나옵니다.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정착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라 믿었고 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으며 책임이 있다면 모든 것은 자신에게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뜻에 따랐을 뿐으로 그들에게 눈총을 주지 말라는 말을 꼭 해야 합니다. 국민과 야당에게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 밝히고 이해를 구하지 못했던 점은 진솔하게 사과하면서 거기에는 그간의 남북관계며 정치관행에 따른 고충이 있었다는 것도 이해를 구합니다."
그의 얘기는 계속 된다.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고 그의 눈빛은 빛난다.
"연설을 마친 노(老) 대통령은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지팡이를 집고 퇴장합니다. 야당의원들 쪽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별나게 비판적이었던 의원들을 일부러 찾아 악수를 합니다. 여당석에서도 박수와 환호를 보냅니다."
김의원이 꿈꿨던 김 전대통령의 퇴임 연설 광경이다.
***"내나이는 서른아홉"**
김경재 의원, 그는 의정생활로 치면 아직 재선의 신출에 속하지만 정대철 대표 같은 이도' 선배'라 호칭하는 중량감 있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실제의 연배도 연배려니와 그동안 각종 청문회며 토론회를 통해 쌓아올린 인지도가 만만치 않을 뿐더러 정치적 역량 또한 긍정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와도 통한다.
김의원을 다시 만난 것은 지난 5월10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에 때 맞춰 그도 미국을 방문했었는데, 시간여유가 있었기에 그가 묵고있는 뉴욕 시내의 호텔에서 장시간 이런저런 대담을 나눌 수 있었다.
그에게는 이제 원숙미가 진하게 풍겼다. 젊은 시절의 그는 사람을 푸근하게 하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이제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필자와 김 의원과의 인연은 수십 차례의 조우와 만남 그리고 사연으로 점철돼 있는데, 이날처럼 기분 유쾌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몇 번이나 들었던 얘기지만 그 얘기를 다시 되새김질해 들려주는 그의 진지하면서도 쾌활한 모습이 그랬다.
김의원은 우리나이로 치면 예순을 넘긴 노장이지만, 서울서 누가 그의 나이를 물을 때면 그는 흔쾌히 서른아홉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재미동포 출신이다.
한창의 나이인 20대 후반과 30대에 걸쳐 40대 초반인 87년 귀국하기까지 20년 가까운 세월을 고국을 떠나 물 설고 낯 설은 먼 타향 이국에서 지냈기에 그 기간을 고국의 나이에서는 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억지섞인 지론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젊다. 상상력 풍부한 그의 사고도 신선할 뿐더러 외모 또한 동안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에서의 세월이 속절없는 유배의 생활이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사이 그는 많은 일을 해냈다.
당초에도 대학 재학 시절부터 시작해 군복무 이후 사회 정치 활동을 통해 만만치 않은 경력을 쌓았지만 미국에 있었던 그 시기 언론활동과 각종 단체활동을 통해 고국의 민주화와 인권 문제에 정열을 바쳤고, 그 기간의 그런 절차탁마가 오늘의 그를 있게 한 큰 원동력이자 자신감으로 남아있게 됐다는 것을 그 스스로도 부인하지 않는다. 또 그 시기가 본격적인 DJ맨의 길을 걸었던 시기이기도 했기에 국민의 정부 출범에 한 몫을 했고 그후 늦깍기 소장 의원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박사월'이 말하는 김형욱의 최후**
그는 '박사월'이라는 필명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실제 필자도 그를 박사월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알았다.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그 무렵 한창 이목을 끌어 모았던 전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5권짜리 수기 <혁명과 우상>을 쓴 그의 필명이 박사월이었다. "박정희의 생각을 뛰어 넘는다" 해서 박사월이라 했다던가.
김경재 의원은 지금도 자신이 쓴 김형욱 수기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꾼 파장 높은 책이었다는 자부심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많은 조사와 증언을 통해 김형욱은 청와대 지하실에서 차지철의 총에 맞아 숨진 게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김형욱 실종사건과 관련한 그의 최종 증언이다.
"그때 박정희가 총을 뽑자 '각하 더러운 피를 묻히실 필요 없습니다' 하면서 차지철이 나선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 현장에 김재규 정보부장도 있었지요. 김형욱이 살해되는 모습을 보면서 김재규는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과 자신도 언제 저렇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함께 떠올랐기에 10,26 거사에서 총을 뽑을 결심을 했던 거죠."
그의 이런 조사가 맞는다면, 그가 쓴 김형욱 수기가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10.26의 한 촉발제가 됐다는 그의 말이 큰 과장은 아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김형욱의 수기 출판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쪽은 거액의 돈을 매개로 한 회유책, 또 한쪽은 공권력을 동원한 협박과 공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데 김재규 부장의 정보부 라인은 회유책에 나서고 있었고 차지철 라인이 공작조로 나섰다는 게 김의원의 증언이다.
그 시절 최고의 권부였다는 중앙정보부장을 장기간 맡으면서 박정희의 오른팔을 자임했었던 김형욱의 수기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으로서는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많은 얘기들이 담겨져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니 이 수기가 집필되고 있을 때도 이런저런 회유와 협박이 있었을 테지만 정작 집필이 완료된 78년 말부터 그 강도는 높아졌고 마지막 담판을 위해 김재규 부장의 중정 요원을 만나러 파리로 갔던 김형욱씨가 실종됐고 얼마 후 10.26이 일어나게 된다.
실제 김형욱 수기는 10. 26 이후에나 공개 됐다. 일본에서 <권력과 음모>라는 축약본으로 출판됐다고도 하는 데 많은 이들은 김경재씨가 발행하던 '독립신문'의 연재를 통해 이를 접할 수 있었고 후일 단행본으로 서울서 출판되기도 했다. 그와 김형욱의 만남, 어찌 보면 그와 DJ의 만남만큼 김경재 개인사에 의미가 있다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젊은 시절, 장준하-김대중과의 만남**
김경재 의원은 85년 김대중씨 귀국 때 동행하지 못하고 87년 6월 항쟁 이후에야 귀국하게 된다. 한국정부에서 여권을 갱신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87년 귀국이후에도 8년여에 걸친 각고의 낭인 생활 끝에 96년 등원했고 2000년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는 요즈음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1등공신의 한사람으로 꼽히면서 민주당의 신주류 일원으로 분류되고 있어 그의 행보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지만, 최근의 최대 관심사인 개혁신당 문제에 있어선 신주류와 다소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출신 지역구며 연원이 꽤 있는 DJ맨으로서 민주당 구주류와의 관계 또한 소원 할 수 없는 태생적 여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개인적 품성에서도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김경재의원은 42년 전남 순천생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활달한 성품으로 주위의 주목을 받았던 유망하고 똑똑한 소년이었던 모양이다. 순천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했는데, 대학시절 민비연이며 기독학생회에서 활동했던 것을 자랑으로 내세우고 있다.
정치적 소양이 남달랐고 토론과 발표에 뛰어났던 그는 대학 2학년 때인 61년과 3학년 때인 이듬해 육군사관학교에서 주최한 전국 대학생 학술 토론회에서 연거푸 대통령상을 탔던 것도 자신이 꼽는 하이라이트의 하나다.
그가 본격적으로 현실정치와 연을 맺게된 것은 69년 3선 개헌 반대 투쟁 때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 장교 시험을 거쳐 공군장교로 4년을 복무한 뒤에도 다른 취직 길을 넘보지 않고 기독학생총연맹 KSCF의 초대 학생부장을 맡아 종교 학생운동과 궤를 같이 하면서 비판적 안목의 권위지였던 <사상계> 편집부에 정치담당 에디터로 근무했으며 이런 인연으로 '3선개헌 반대 범투위'가 결성되자 그 대변인을 맡았던 장준하씨의 천거로 부대변인으로서 활동하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범투위의 활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10월 17일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면서 그는 신민당에 입당을 했고 71년 대선 때는 신민당 김대중후보 캠프의 공보비서와 당 선전기획위원으로 활동하면서 DJ맨으로서의 행보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또 실패였다.
"71년 대선 패배이후 일종의 공황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때 자연스레 생각했던 것이 유학이었습니다. 지금이나 당시나 젊은이들에게 유학은 큰 희망이자 활로인 것이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그는 그때 기독교단이 외국 교회기관의 후원으로 실시했다는 에큐매니칼 장학생 선발시험에 응시를 했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이 돼 73년 미국 버지니아 신학대학원으로 유학 길에 올랐다. 이렇게 시작한 유학길이 20년 가까운 망명 아닌 망명 생활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는 신학대학원의 입학허가로 유학길에 올랐으나 목회자의 길보다는 정치에 뜻이 있었던 터인지, 이듬해 유펜(펜실바니아 대학)으로 옮겨 정치학 박사과정에 들어가 본격적인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유학 길에 오르기 전 그는 학창시절부터 사귀어 왔던 두 살 아래의 이화여대 의대 출신의 여의사와 결혼을 해서 부부가 함께 미국으로 왔는데, 진작 미국유학에 올라 미국 의사 시험에 합격을 해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아내는 이때부터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김형욱과 지낸 2년3개월**
그의 표현을 빌면 78년 김형욱씨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간간히 미국에 온 민주화운동 동지, 야당운동 동지들과 어울리는 일은 있었어도 비교적 착실한 유학생으로 학교와 도서관을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박사과정 자격 시험까지 패스하고 논문 쓰는 일만 남았었는데 김씨를 만나 그의 자서전을 써주기로 하면서부터 인생의 궤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처음엔 한 3개월만 바짝 매달리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랬는데 그게 그만 그처럼 시간이 길어졌고 인생궤도 자체가 달라져 버렸죠. 하지만 결코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3개월을 생각했던 <혁명과 우상>일은 2년 3개월이 걸렸고 그 책이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된 셈이다.
김형욱씨를 만나게 된 것은 박순천씨의 아들이며 당시 필라 한인회장이었던 변상준씨의 소개에 의한 것이었다. 그 당시 김씨는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한국관계 증언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야당 청년 운동가였던 그에게 김형욱의 인상이 좋게 남아 있을 리는 만무였다. 하지만 김씨가 한국의 독재자의 비리를 폭로하고 있다는 점, 특히 자신뿐만 아니라 동지들의 큰 관심사인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 도움을 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고 몇 차례 만나 증언 원고작성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김씨가 "당신이야말로 내 회고록을 써줄 수 있는 문장가"라면서 강력하게 제안을 해왔기에 고심 끝에 수락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 2년 3개월 동안 그는 김형욱씨와 다투기도 많이 다퉜고 일을 때려치우려 했던 것이 한두차례가 아니었다. 김형욱씨의 자기 과시적인 태도와 성격 때문이었다.
한때 신학도였던 그에게 기독교적 사상이 베어있었는지 이 무렵 강조하곤 했던 것이 순교자적 자세였단다.
"김형욱씨에게 자주 말했던 것이 순교자적 자세와 정신이었습니다. 그런 자세만이 과거의 잘못을 속죄하는 길이고 영원히 승리하는 길이라고 했죠, 하지만 그에게 그런 말이 크게 먹힐 리 없었죠. 그래서 언성을 높이고 다투기도 많이 다퉜고 원고를 돌려주고 다신 안 만난다고 했던 게 몇 차례입니다. 그러면 며칠 뒤에 '김주필 날세, 미안하이' 하면서 전화가 옵니다. 그러면 못 이기는 체 하고 나갈 수밖에 없었죠, 그의 증언은 들어야 했기 때문이죠."
실제 글을 쓰면서 그는 자신 스스로도 순교자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몇번이고 되뇌곤 했단다. 많은 위험도 따랐다. 밤늦은 시각 혼자 길을 갈 때면 몸을 도사리게 됐고 주변의 상황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으로도 공관으로부터 김씨와 만나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전갈이 오기도 했으며, 밤늦게 괴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는데 실제적 위험도 몇 차례 있었다. 한번은 뉴욕 지하철에서 어느 흑인이 갑자기 다가와 자신을 밀치고 사라진 일이 있었는데, 가까스로 선로에 떨어지는 것은 면했지만 이 또한 그 원고와 관련된 청부가 아니었는가 생각하고 있단다.
"일을 시작할 때 계약서를 작성 했었는데 비교적 김부장은 나에게는 솔직한 편이었고 그 약속에 따르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와의 계약서 사본이 중정 김재규 부장 설합에서 나왔던 점, 또 일본에서 축약본이 출판된 점 등을 보면 그 사람 여러모로 약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돈 문제에 그랬는데, 그의 실종 죽음도 따지고 보면 돈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김씨가 파리에서 실종 됐을 때 가장 놀랐을 사람의 하나가 김경재 의원이다. 그의 실종이 확실시되면서 김의원도 각방으로 진상을 파악하려 애썼지만 국가 권력이 깊숙히 개입한 사건에 망명 유학생 신분으로서는 제대로 알아낼 길이 없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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