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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한국의 민주주의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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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저기 한국의 민주주의가 오고 있다"

안동일의 '태평양을 두번 건넌 사람들' <2> 김경재(2)

김씨의 실종이후에도 김의원은 몇 달을 기다린 뒤 자신의 신문 '독립신문'에 필명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알만한 사람은 알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박사월이 누구냐고 궁금해 하면서 다음호를 기다리곤 했기에 한때 "독립신문이 미주의 지가를 움직이고 있다"는 말까지 나왔었다.

필자가 뉴욕에 도착했던 81년 11월, 그 무렵이 연재에 한창 물이 올라 있던 시기였다. 필자는 뉴욕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원각사라고 퀸즈의 잭슨하이츠에 있던 절에서 우연히 독립신문을 보았는데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흥미진진했던 김형욱 수기 말고도 전두환 정권을 실랄하게 비난하면서 몰랐던 사실들을 생생하게 전했던 기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혹독한 한국의 언론 탄압과 통제에 익숙해있던 필자는 이런 신문도 있구나 하고 경이롭게 생각했었다. 그땐 한자 한자 치는 사진식자를 사용해 신문을 만들었었는데 시간과 비용 때문이었는지 육필로 제목을 쓴 것도 있는 등 편집이며 모양새는 조악했지만 '대단한 사람이 대단한 신문 만들고 있구나' 싶었고 행여 누가 볼까봐 가슴까지 두근거리기까지 했었다.

그 신문이 바로 김경재의 '독립신문'이다. 서재필 박사가 만든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신문 독립신문의 제호를 따 만든 김씨의 독립신문은 78년 12월 창간해 87년까지 명맥이 이어졌는데 한때 2만명에 가까운 유료 독자가 있었다고 김씨는 기염을 토한다.

김경재씨가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된 것에는 우연인 듯 하면서도 필연이 섞여 있는 사연이 있다. 김씨는 유펜에 적을 두면서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한민신보'라는 주간지의 객원 주필을 맡아 글을 기고하곤 했는데, 이 신문의 발행인인 정 모씨가 서울로 귀국을 한다면서 신문을 맡아달라고 제호를 싸들고 필라로 찾아 왔기에 맡아서 몇번 제작을 했었단다. 그런데 얼마 뒤 다시 와서 돌려 달라고 했고 그러고는 갑자기 지상에 대문짝만한 전두환 지지선언을 해 엄청나게 당혹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오명을 씻을 겸 새로이 신문을 창간하게 됐다는 얘기다.

실제 미주 동포사회에서는 창간 이후의 경영이 문제이지만 주간지나 격주간지 정도의 신문 창간에는 그리 큰 어려움이 따르지는 않는 것이 사실이다. 사무실과 식자기만 있으면 일단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인쇄는 중국인들이 하고 있는 전문인쇄소 맡기면 된다. 물론 신문 발송이며 광고수주 또 기사 취재며 작성 편집 등 발행인 한사람이 열사람 스무사람의 일을 해야하는 고통과 중노동이 따름은 필연이다.

김경재 의원은 기독교 신앙에 깊은 듯 하면서도 불교의 인과응보적 사고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김형욱 실종 사건도 그렇고, 이 한민신보 사건도 그렇고 많은 일들을 이런 인과의 차원에서 이해를 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어쩌면 무서운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김형욱 사건의 두 경쟁 조직이었던 중정 쪽과 경호실 쪽이 격돌했던 것이 10.26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사자들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형욱을 살해한 당사자격인 경호실측은 중정 측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고, 거사를 했던 중정 측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박흥주, 박선호 대령 등 중정측 요원들은 죽기 바로 전까지 자신들이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졌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전두환 신군부의 10.26 내통설이 나오기도 했지요. 어쨌든 김형욱 수기에 얽힌 저주는 대단했다고 할 수있습니다. 남의 눈에서 눈물을 나오게 한 사람은 자신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오게 된다고 할까요.

'한민신보' 했던 정기홍이도 깐에는 약삭빠르게 행동해 한자리 차지했다고 여겼을지 모르는데, 전두환 정권에서 국영기업 간부자리 잠깐했지만 지금은 아주 비참하게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과 응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필라델피아의 자택에서 발행하던 신문을 어느 시기부터는 뉴욕에 사무실을 얻어 뉴욕에서 발행을 했었기에 미주내의 그의 기반은 필라와 뉴욕 두곳에 나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맨해턴의 작은 사무실에서 신문제작에 몰두하다보면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습니다.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다 적막한 밤거리를 내다보며 내가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이 일이 과연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반드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저기 한국의 민주주의가 절름거리며 오고 있다"**

미주 동포들에게 있어 미국 주류사회 참여와 진출 모색이 바람직한 모습이고 큰 과제의 하나라고 했을 때 김경재 쯤 되는 인물이 그런 쪽에 나섰으면 어땠을까 싶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그런 쪽에서는 비켜서 있었다. 그에게 있어 조국은 언제나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이었고 그곳의 민주화와 발전에 먼저 눈을 돌렸고 또 쉼 없이 일이 밀어 닥쳤기에 그렇다.

79년 10.26이 일어나고 80년 서울의 봄이 왔을 때 그도 귀국해서 현실에 동참하려 했었다. 하지만 여권 갱신이 이루어지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터에 5.17이 터졌고 김대중씨의 구속-사형선고로 이어지는 격동이 시작 됐다.

80년 8월15일을 기해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한민통 주관의 김대중 구출 촉구대회도 그의 일생에는 한 하이라이트로 기억되는 부분이다.

대회 참석을 결심한 그는 한국 여권이 없었기에 어렵사리 영주권자 신분으로 미국 정부 발행의 여행 증명서를 발급 받아 일본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 정부에서 입국을 허가하지 않아 공항 인근 호텔에 억류되기도 했지만, 자신의 절절한 호소와 소식을 들은 각계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33시간만에 입국이 허가됐단다. 대회장인 도꾜 전국통신노조 회관에 도착했을 때는 대회가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이날 대회에는 윤이상씨며 김재준목사를 비롯 전세계에 산재해 있던 해외파 민주화 인사, 이른바 반정부 인사들이 대거 집합해 있었는데 그날 공항에서의 고초를 알고 있던 참석자들의 큰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 오른 그는 30분 동안 한국 군부의 폭압성과 김대중 구출의 당위성에 대해 열변을 토해 민주인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 그의 술회다.

김의원은 '평화의 자전거 보내기 운동'관계로 몇 년전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곳 방송국에 자신의 그날 연설 광경이 녹화돼 남아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는 얘기를 자랑삼아 들려주기도 했다.

이날 대회 이후 그는 한승인, 문동환, 이상철 제씨 등 명망가들과 함께 미주 민통연합 결성의 주축멤버가 되었고 후에 4대 의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80년 신군부의 등장 이후 미국이 한국 민주화 운동의 한 기지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국내 민주화 활동에 대한 지원이며 내외로의 소식 전달, 또 미국 정부를 비롯한 각 우방 정부에 대한 홍보 활동 등 많은 부분의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김경재씨는 미주 민주화 운동의 3 대축으로 한국으로 치면 국민운동 본부격인 민통연합, 김대중씨의 사조직 성격이 짙기는 했지만 가장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인권문제 연구소, 그리고 독립신문이며 캐나다 민중신문과 같은 민주화 계보의 언론을 꼽으면서 이 가운데 두 부분에서 자신이 주축의 역할을 했던 것을 큰 자랑과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곤 한다.

83년 겨울 김대중씨가 미국으로 오던 날 그는 자신의 '독립신문'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저기 한국의 민주주의가 오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피투성이가 된 채 절름거리며 오고 있다. 그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불사조처럼 살아남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상처를 안고 여기로 오고 있다. 오늘 우리는 뜨거운 마음으로 뜨거운 눈물속에서 상처 난 한국의 민주주의를 맞는다. 오늘 우리는 울고 있지만 기필코 한국의 민주주의가 다시 우뚝 서 비상하게 될 것을 굳게 믿고 있다."

김대중씨의 미국 체류는 그를 더 바쁘게 했다. 워싱턴에 자리를 잡은 김대중씨는 얼마 후부터 뉴욕이며 로스엔젤레스 시카고 등 미주를 순회하면서 강연활동을 했는데, 이 때마다 대부분 그를 수행했으며 또 안부를 묻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해야 했고 또 사람들을 김대중씨에게 소개해서 지지자로 만들게 하는 등의 일이 그가 스스로 맡았던 임무였다. 박지원씨를 김대중씨에게 소개한 이가 김경재씨라는 것은 전호에도 상술한 바 있다.

옥스퍼드와 브라운대학 출신으로 이코노미스트의 수석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프랜시스 캐언크로스 여사는 경제학 전공이기는 하지만 최근 들어 정보화시대, 디지털시대를 맞아 이와 관련한 주목할 만한 논문 저서들을 내고 있는데 그녀는 <거리의 소멸>이라는 최근 저서에서 디지털 시대의 정치를 독특하게 규정 묘사하고 있다.

그녀에 의하면 정보화 시대를 맞아 국가와 정부의 권위는 약화 될 수밖에 없는데, 이같은 디지털시대의 정치는 상반된 이해 관계를 지니고 있는 집단과 개인을 서로 연결해 '공동의 선'을 도모하는 네트워크 형성에 공헌할 때만이 그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설파하고 있다. 정치가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라는 철학은 동양사상에서도 보여졌던 바이지만, 그녀의 논리는 많은점에서 새삼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여겨진다.

김경재 의원은 자신의 정치 철학을 '상식이 통하는 정치' '늦더라도 옳은 길로 가는 정치'로 요약하고 있다.

유펜에서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동남아 정치의 명암'을 생각했었다는 그는어떤 정치가 국민을 이롭게 하고 정치 지도자의 어떤 철학이 국가에 보탬이 되는지 늘 생각해 왔다고 말한다.

새옹지마, 인과응보의 진리를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그는 요즘 87년 귀국이후 88년 총선에서의 낙선, 그리고 다음번인 92년 총선에서의 낙선으로 이어진 8년의 세월이 자신을 또 한번 키운 훈련의 시기였다는 깨달음을 토로하곤 한다.

"그 시기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지만, '받기만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시기가 없었더라면 이땅의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몰랐을 겁니다. 그 때 달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알았고 못 배운 사람들의 서러움을 알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나만 해도 부모 친지들의 보살핌 속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미국 유학도 할 수 있어 선진 문물도 접할 수 있었지만,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허덕이며 살고 있다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돌아보면 세상에 늦은 법은 없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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