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항쟁은 김경재 개인에게도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 6.29선언을 놓고 이런저런 말이 아직까지 많지만 이후 전반적인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김경재씨도 그토록 원했던 여권갱신이 이루어져 입국을 하게 된다.
뉴욕 영사관에 나와있던 대학 후배가 "한번 여권신청 해보시죠"하는 말을 해왔고, 속는 셈 치고 신청했더니 재깍 여권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래서 그는 73년이래 만으로 14년만에 귀국하게 된다.
***14년만의 귀국, '입주특보' 되다**
귀국한 그는 곧바로 동교동을 찾았다.그 무렵은 야권의 대통령 후보를 놓고 양 김씨간에 줄다리기가 첨예하게 계속되던 시절. DJ는 특별한 거처가 없었던 그에게 특보라는 직함을 주고 아예 동교동 자택에 기거하게 했다. 그래서 그 무렵 그의 별명은 '입주특보' 였단다. 밖에서 고초를 격었던 그에 대한 DJ의 배려와 신임이 만만치 않았음을 엿보게 한다.
지하실 방이 그에게 배정 됐엇다는데, 역시 미주 출신인 유종근씨며 박지원씨가 자주 찾아와 어떨 땐 자고 가곤 했는데 당시까지는 체인스모커였던 그를 놓고 유종근씨가 "담배좀 그만 피우라"고 하면 왜 남의 방에 와서 이래라 저래라 하냐며 다퉜던 기억이 새롭단다.
그 얼마 후 김대중씨가 민주당을 나와 평민당을 창당하면서 대권을 향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그만큼 후보 단일화에 대한 논의와 열망이 높았던 것을 우리도 기억하고 있다.
김경재씨는 평생을 DJ맨으로 살면서 그의 뜻을 쫒고 따랐으며 또 자신이 먼저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이 총재의 뜻에 따르고 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고 보스의 의중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다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 만큼은 자신의 예상이나 생각이 DJ와 달랐다고 술회한다. 그 역시 단일화가 필연적이라고 생각 했었고, 결국은 김대중씨가 양보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적지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었던게 사실이다. 그랬더라면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싶기도 한데, 어쨌든 이는 다 지나간 얘기고 일단 편을 갈라 승부에 들어가게 되면 승리를 위해 힘을 모으게 되고 내부에서는 일부러라도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를 고양하기 마련인데 선거 국면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 한 법이다.
김경재씨도 이 87년 대선 과정서 후보 특보겸 선대위 홍보위원장을 맡아 불철주야 뛰면서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에 편승하게 됐지만, 아는 대로 선거는 김종필씨까지 포함 4파전으로 치러졌고 결과는 군부통치 종식의 실패였다. 패배의 회한을 안고 있던 그 무렵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단다.
***정치적 로맨티스트**
실제 그 무렵까지 가족은 미국에 남아 있었다. 미국서 태어난 두딸의 교육문제가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애오라지 조국을 향했던 자신의 정성과 노력은 조국 에서의 활동만이 자신이 살길이라는 다짐을 다시금 하게 했으며 이듬해 봄에 있은 총선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의 출마지는 어이없게도 자신의 고향인 전남 순천이나 평민당 표가 많다는 다른 수도권 지역이 아닌 신정치 1번지 서울 강남갑.
그때 DJ의 평민당은 백척간두에 서 있는 형국이었다. 대선 패배 단일화 불발의 책임이 온통 김대중총재와 평민당으로 쏠려 있던 상황이었다. 김씨는 자신의 당시 선택이 총재와 당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그때 김총재가 전국구 11번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당이 총력으로 득표전에 나섰을 때였습니다. 고향에는 현실적으로 현역인 선배가 있었기에 김형욱 수기 <혁명과 우상>으로 다소 지명도가 있는 나라도 표갈이에 나서야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이왕이면 종로나 강남에서 하자고 마음을 먹었던 겁니다."
그땐 전구구의원 배정이 당선자수가 아닌 전체 득표율로 되었던 모양이다. 지금보다는 합리적이었던 셈이다. 첫인상이며 화법이 다소 거만해 보이기도 하지만 달변과 세련된 메너를 지닌 그는 강남 갑구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누비고 다니며 표를 호소했지만 결과는 2등 낙선. 그때 평민당에서 뛰어나가 무소속으로 함께 출마한 장기욱씨와의 표를 합치면 당선자였던 황병태씨의 표를 훨씬 능가했다는 게 그의 아쉬움이지만 이 또한 지나간 버스일 수밖에 없는 일.
***김경재의 사람들**
자신은 낙선했지만 그 총선에서 이른바 '황색 돌풍'이 불면서 평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했고 김총재도 넉넉히 의회 입성을 했었기에 대선 패배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하지만 원외와 원내의 차이는 엄청난 법 아닌가. 총선이 끝나고 올림픽이 시작될 무렵, 뉴욕 세계일보에 있었던 필자는 서울 취재를 나갔었다. 미주출신 인사들을 차례로 만나 인터뷰 기사를 송고했는데 당시에도 총재 특보, 당무위원을 맡고 있었던 김씨도 당연한 취재대상이었다. 그때 동포 출신으로 꼽혀 필자가 만난 사람들은 통민당의 백남치, 권헌성, 김한규 의원, 평민당의 조순승, 이돈만 의원 등 국회에 입성한 사람들뿐 아니라 서경석 목사며 임정규 이석규씨 등 다른 분야에서 활약하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김경재씨에게 연락을 취했더니 "싫다"는 대답이었다. 현역들 뒤에 꼬리로 붙는 인터뷰는 사양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땐 김의원 성정에 그런 부분이 남아 있었다. 인터뷰는 그렇다 치더라도 얼굴은 봐야 할 것 아니냐고 해서 광양에서 평민당 공천으로 금뱃지를 단 이돈만의원과 함께 강남의 한 밥집에서 저녁을 함께 했었다 사실 이돈만 전의원이야말로 김경재씨 덕에 금뱃지를 단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필라에서 작은 사업을 했던 그는 김경재씨와 '독립신문'에서 함께 일을 하기도 했었는데 김씨의 소개와 추천으로 김 총재를 만났고 또 공천까지 받았던 터였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자주 만났던 기색이 아니었다. 처음엔 자리의 분위기가 묘했는데, 그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인지 아가씨인지 여 종업원 덕에 분위기가 반전돼 화기애애하게 저녁을 끝냈던 기억이 있다. 그곳이 강남갑구는 아니었는데도 그 아주머니가 김경재씨를 잘 안다면서 그를 '의원님 의원님'하면서 각별한 서비스를 했기 때문이다. 그 아주머니는 김경재씨의 책도 봤다는데 그가 당선된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이 의원에게는 "아저씨가 뭔 국회의원이에요 보지도 못했는데", 그러니 더 재미있어 박장대소해야 했다. 이 의원이 권하는 술잔을 연거푸 흔쾌히 마시면서 정치의, 인생의 선배로서 많은 조언 보따리를 푸는 그날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돈만씨 말고도 김씨의 '독립신문' 출신으로 서울에 진출한 사람이 몇 있기는 하다. 얼마 전까지 고한 카지노에서 고위 간부로 일했던 강준식씨도 '독립신문'에서 일을 하다 김씨의 추천으로 동교동 캠프에 가세해 민추협시절 김대중 공동의장의 공보특보를 했었고 동아투위 언론인 출신인 송경선씨도 '독립신문'에서 일을 했었다.
실은 필자에게도 '독립신문'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있었다. 대한일보 다닐 때였는데 하루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었다. 아마 '독립신문'만큼은 안돼도 당시 상황에서는 꽤 치고나간 연재였던 광주민중항쟁 진상을 파헤치는 필자의 글이 그가 보기에 좋았던 모양이다. 사실 좀 흔들리기는 했었다. 그러나 첫 딸을 낳은지 얼마 안됐던 그 무렵 생활고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때 김주필과 함께 일을 했다면 필자의 운명도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기도 하다. 그때 '독립신문'이 특히 재정적으로 참 어려울 때였는데, 그가 커피숍에서 연방 피우던 노란 필터의 '메릿' 담배가 생각난다.
씁쓸한 총선 패배 이후에도 그는 계속 특보로서 김총재를 지근에서 보좌하면서, 특히 외교 분야와 통일문제에 관심을 쏟으면서 당료 활동을 게속 했는데 실제 필자가 89년 방북취재를 떠나기 전에 김대중 총재에게 안내를 해서 동교동 자택에서 점심을 함께 하는 면담을 주선해 주기도 했었다. 그날 김총재와 단독으로 나눴던 북한문제에 대한 대담은 후일 다른 기회에 털어 놓기로 한다.
김경재 의원에게는 '정치적 로맨티스트'라는 별명이 있기도 하다는데 패배가 뻔한 지역에서의 분연한 출마가 그런 별호를 갖게 한 모양이다. 워낙 감성이 풍부한 그는 그런 결정을 심사숙고해서 하는 게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되면 즉각적인 감성에 따라 낭만적인 시각에서 결정을 내리기 때문인 듯 싶다.
그 스스로는 88년 이후 정치평론가로서 또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서도 이름을 꽤 날렸다는데 그 당시 서울 상황에서 다소 떨어져 있던 필자로서는 이를 확인할 길을 없지만 그런 낭인의 시절 그로서는 많은 일을 통해 많은 개인적 성장을 했겠구나 짐작은 간다.
***5전6기의 고난의 세월**
세월이 흘러 92년 총선, 그는 또 낭만적인 결정을 내리고 분연한 전사의 길을 다시 걷는다. 이번에는 종로에서 출마를 했던 것이다. 당시 그곳은 민정당(신한국당) 이종찬씨의 아성이었다.
당초 도지사를 노리고 있던 허경만 의원이 전국구로 가고 그가 순천 지구당을 맡기로 했다는데 끝까지 허의원이 지역구 출마를 고집했기에 당에서는 그에게 전국구를 제안해 그러기로 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순번이 밀리는 통에 욱하는 홧김에 저지른 결정이란다.
"총재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당 자금 사정을 이유로 들면서 '자네가 번호를 좀 양보해야겠네' 하면 2, 3번이 밀리고 또 다음날 그런 일이 또 있어 또 밀리고 그러다가 에이 난 출마할랍니다, 그래 버렸죠."
지금이니까 들어내놓고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실제 결과로는 마지막 밀렸던 그 번호로도 당선은 됐었다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도 더 밀렸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후회는 없단다.
그는 종로에서도 열심히 뛰었다. 미주의 동료였던 서길병 김엽씨며 뉴욕서 날아온 김진옥씨등이 열심히 도와줬던 것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단다. 하지만 결과는 또 실패, 그러고 보면 그가 관계한 선거란 선거는 그때까지는 모두 실패였다.
실은 한번 더 패배가 있어 내리 5패를 한셈이다. 92년 말 있었던 대선에서 그의 김대중 총재가 또 낙선한 일이 그것이다. 71년 대선, 87년 대선, 88년 총선, 92년 총선, 92년 대선 모두 5전을 패배하고 6전만에 96년 총선에서 성공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5전6기'라는 말이 적용되는 셈이다.
그 스스로는 종로 선거 때 엉뚱하게도 방송 진행자였던 이경재 변호사와 어느 여가수의 사랑스캔들에 큰 타격을 입었다는데, 상대측에서 '그 경재가 김경재'라고 몰아 세우니까 순진한 유권자들이 그대로 믿더라는 게 그의 낭만적인(?) 패인 분석이다.
그래도 그 선거에서 가장 기억나는 일은 경쟁자였던 그 상대측 이내흔씨가 선거후 "당신은 큰 정치가로 대성할 것"이라며 악수를 청해 왔던 것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내흔씨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단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 갚는다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92년 두 번의 선거 패배 이후의 그시기가 그에게는 가장 혹독한 시련의 시기였음직 하다. 다른 때와는 달리 보스인 DJ마저 은퇴를 선언하고 고국을 떠난 그 무렵 그의 상황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벌판에 발가벗고 서 있는 그런 상황이었으리라. 그래서 이시기 자신이 얼마나 미천한 존재였는지 깨닫게 됐다고 토로하는 모양이다.
마땅한 당직도 없었던 그는 이시기 집필활동에 매달려 몇 권의 평론집이며 소설까지도 출간했단다. 그의 소설과 관련해 남북청춘남녀의 사랑을 그리겠다는 얘기는 술자리에서 여러 차례 들은 바 있지만, 정작 웬일인지 필자 손에까지는 입수돼있지 않아 어떻게 소개할 수가 없다. 그의 저서 하면 <혁명과 우상>이 너무 크기 때문일까.
***5패뒤 내리 4연승**
그의 운세는 96년부터 활짝 피기 시작한다.
그 지루했던 인고의 생활을 뒤로 하면서 5전6기의 신화를 만들어 내듯 그는 그해 총선에서 마침내 대망의 금뱃지를 달게 된 것이다. 지역구 전남 순천갑. 그 지역구의 터줏대감이었던 허경만씨가 도지사로 나간 뒤였기에 일종의 무혈 입성이었지만 두 번의 패배를 거울 삼아 열심히 뛰었고 전국 최다 득표율을 이뤘다고 기염을 토한 바 있다.
한번 운이 트이면 활짝 열리는 법인지 그가 관계한 다음 선거인 97년 대선 또한 승리로 귀결돼 그는 국민의 정부의 한 멤버가 될수 있었고 2000년 총선에서 또 승리, 개인적으로는 재선 의정활동에 돌입했고 최근의 2002년 대선에서도 주요 포스트를 맡아 극적인 승리를 이끌어 내 이제 내리 4승을 올린 셈이다. 9전 4승5패, 손익계산으로 아직 제로섬 밑이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 아닌가.
또 최근의 4승은 진행형이다. 하지만 김의원 스스로는 손익이 이제 가까스로 분기점에 달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새 출발하는 각오로 자신을 다지고 또 다져 그를 주목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가 원내에 입성한 뒤의 의정활동이며 정치 행보에 대한 소개와 평가는 굳이 이곳에서 열거할 필요가 없을 듯 싶다. 초선 때 그는 산자위 에서 재선인 요즈음은 건교위에서 상위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 개인적으로는 남북 화해를 추구하는 '사랑의 자전거 보내기' 국민운동 본부 등의 조직을 운영하는 등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데 이런 활동에 대한 평가는 진행형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전후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그곳 고국의 유권자 국민들이 내려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초선이면서도 재선 삼선 이상의 역향력을 발휘했고 인정을 받았으며 재선 때는 4선, 5선의 일을 하고 있다는 그 표현으로 그에 대한 평가를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사견이다.
물론 선수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며 그에게도 적지 않은 잘못된 행보, 정치적 판단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은 그때그때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정치 발전을 바라는 국민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경재 의원은 원내에 입성한 뒤 금뱃지를 달고 몇차례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미주를 찾았다. 그때마다 필자는 거의 매번 그를 필자의 방송국으로 초대해 대담프로를 만들어 동포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의 달변과 해박함은 진행자며 시청자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했고 많은 새 소식들을 알게 했다. 국민의 정부 출범 뒤에는 특히 남북 문제 햇볕정책에 대한 소상한 설명으로 동포들의 이해를 도왔고, 2002년 대선 국면에 돌입했을 때는 틀림없이 정권 재창출을 이뤄낼 수 있다고 기염을 토해 당시로서는 동포들을 의아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의 호언이 맞은 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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