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과 다음 글에서는 약간 어려운 얘기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두도록 하자. 가능한 한 쉽게 글을 쓰자는 원칙을 세워두었음에도 독자들의 요청은 한결 같다. 좀 더 쉽게 글을 쓰라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 정책, 그것도 전략적 사안을 토론하는 것은 단순히 드러난 문제점을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당연히 설명해야 할 것, 제시해야 할 논거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연재 전체를 관통하는 이론적 토대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당장 읽을 때는 편할지 모르나 읽고 난 후 얻는 것은 없게 된다.
이번 글과 다음 글은 신자유주의적 대안을 넘어선 혁신적 산업-기술 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밝히는 글이다. 이번 글은 신자유주의 경제학 이론의 본질과 그 한계를, 다음 글에서는 기술경제학의 근본이 되는 기술 패러다임의 이론적 기초를 설명할 것이다.
***작은 정부, 큰 시장?**
언제부터인가 "작은 정부, 큰 시장"이라는 명제가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 되었다. 시장과 기업이 경제의 주체이며 이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는 각종 규제들이 사라진다면 효율적인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는 게 이 명제의 핵심이다. 이 명제에 따른다면 기업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이며, 정부는 국방, 외교, 행정만을 담당하거나 이것들조차도 민영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정부가 노동, 복지, 산업, 기술 등과 관련된 영역에 개입할 경우 효율적인 시장경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시장 경쟁의 논리가 제 아무리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시키고 노동 조건이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해도, 그리고 몇몇 대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는 재벌 구조가 더욱 심화되고 기업들의 기술 선택이 국가적 기술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해도, 정부는 기업 활동을 지원하되 경제에 대해 개입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결과는, 시장주의자들의 논리에 의한다면, 자유로운 경제 주체의 합리적 판단과 전체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변화의 방향을 가장 효율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한 시장의 최적자원 배분이 만들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명제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모든 경제학 교과서의 핵심이며 소위 말하는 주류경제학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 명제는 과학적 진리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이 명제를 논증하기 위해 제시된 이론적 근거들의 한계와 오류가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이지만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근본 전제의 부당함이다. 주류 경제학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독립적 의사 결정이 시장 경쟁의 토대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교환은 존재하지만 경쟁은 사라진다. 게다가 완전 경쟁의 가정은 경제 성장과 양립불가능하다. 완전 경쟁의 가정에서는 이윤이 없으며, 이윤이 없다면 투자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진실**
진실은 정반대다. 시장 경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경제 주체 간의 차이, 자원의 불균등한 배분이 필수적이며 시장 경쟁은 이 불평등과 차이를 확대 재생산한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차이와 불평등에 기초한 경쟁이야말로 경제 성장의 근본적 동력이며 경제적 가치가 변화하는 원천이다. 그런데 만약 제약 없는 시장 경쟁이 불균등과 차이를 확대시켜 승자 독식의 상태가 만들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럴 경우 경쟁은 양극 분해를 낳게 되며 성장은 중지된다.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적 생존을 위한 문제의 핵심은 불균등과 차이를 확대 재생산하되, 그것이 정체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갱신되도록, 불평등과 차이의 주인이 끊임없이 바뀌도록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어제의 노동자가 오늘은 혁신적 기업가로 등장하고, 내일은 또 다시 오늘의 노동자가 더 혁신적 기업가로 등장할 수 있어야 한다. 불평등과 차이의 내용 역시 생존의 불평등이 아니라 욕망의 불평등으로 변화 발전해야만 한다. 하지만 시장경쟁은 이와 같은 갱신과 이동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시장의 논리는 승자독식의 논리,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들로 인해 성실한 경제학자들, 특히 자유 경쟁의 논리를 누구보다 앞서 주창했던 슘페터, 하이에크 같은 사람들조차 효율적인 시장 경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시장 외부적 합의와 제도들이 필수적임을 인정했으며, 케인스의 경우는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한 유효수요 관리가 자본주의 체제의 장기적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점을 논증했다.
하지만 주류 경제학은 과학적 진리를 인정하기보다는 케인스주의적 개입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문제를 회피했다. 소위 말하는 '정책 무력성' 명제가 그것이다. 이 명제가 말하는 것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경제 주체들이 정부 개입의 내용과 그 결과에 대해 예측할 수 있게 된다면 정부 개입은 그것이 무엇이든 애초의 의도된 정책 효과를 거둘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 이론적 논거의 튼튼함보다는 시장 규모가 국제적 범위로 확대되고 각종 금융 및 경영 기법들이 발전하면서 현실적인 힘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정보와 지식의 질과 양에서 정부가 해당 경제 주체들의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시장 경제를 전파하는 국제적 전도사들인 각종 국제기구들은 국가의 정책적 개입을 불공정 경쟁이라는 이유로 모두 금지해 놓고 있다.
***손쉬운 대안, 치명적 결과**
이렇듯 일단 승기를 잡은 주류 경제학은 아예 한 발 더 나아가 '시장 실패'가 발생하는 영역에서도 정부 개입을 원천봉쇄 하고자 한다. 이것도 방법은 간단하다. 시장을 더 세밀하게 분할하거나 선물 시장, 기술 시장, 오염 시장, 내부 시장 등과 같이 전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면 된다. 이들에 의한다면, 시장 실패가 발생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적절한 소유권이 확립되지 않았거나 혹은 해당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시장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주류 경제학은 이렇듯 없는 소유권조차 새롭게 설정, 그에 맞는 시장을 만들기 위한 최신 기법에 온통 관심을 쏟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나라에서도 여지없이, 그러나 더 폭력적인 방식으로 관철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대안은 간단하지만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벌써 여러 해 동안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소득 불평등, 부의 양극화, 그리고 노동시장에서마저 나타나고 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양극화야말로 신자유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들어 정부에서 연이어 제출하고 있는 각종 경제 정책들을 보면 아예 신자유주의를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가려고 작정하고 있는 듯 보인다. 분배에 기초한 성장을 주장하던 노무현 정부 초기의 문제의식은 아예 사라지고 성장 제일주의에 '올인'하고 있다는 생각은 필자만의 우려에 불과한 것일까? 승자독식의 시장질서가 지금과 같은 양상으로 진행된다면 성장은 고사하고 급격한 경제 붕괴가 닥쳐올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대안이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정책 무력성'과 국가개입의 방향**
선진 유럽 국가들의 경우 이미 지식기반 경제 구조가 정착되는 단계로 접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조밀하게 형성된 시민사회의 존재는 신자유주의의 흐름이 고스란히 관철되지 않게 만드는 방어막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이 가지고 있는 질 높은 사회 보장 시스템, 시민사회의 존재는 신자유주의를 적절하게 운용할 경우, 오히려 그동안 정체되어왔던 사회질서를 허물고 생성과 변화, 혁신을 자극하는 기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진돼온 국가 계획 경제, 직접 개입형 산업 정책은 현재의 민주주의적 질서와 양립할 수 없으며, 지금과 같은 국제적 경제 질서 하에서 폐쇄적 계획 경제 시스템을 운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 재정, 조세, 통화를 축으로 운용되는 케인스주의적 유효수요 관리 정책을 취하기에는 우리나라의 경제가 지나치게 세계화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할 시민사회 역시 성숙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시장영역의 급격한 확장과 세계의 금융자본에 대해 활짝 열려진 우리 경제는 '정책무력성 명제'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일개 기업 연구소의 보고서가 국책 연구기관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현실은 이를 방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책무력성 명제는 경제학 이론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 거시경제 정책이 더 이상 유효한 대안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신자유주의는 막을 수 없는 대세이며, 그것 외에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과연 산업-기술정책은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할 뿐, 지금과 같이 지구화된 경제 질서 속에서는 용도 폐기되어야 마땅한 것일까? 전혀 아니다.
***미국에게 배워야 할 것**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산업 정책이 가장 잘 발달된 나라는 미국이다.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독점 방지 위원회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 사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한 몸에 안을 정도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20세기를 지배했던 대부분의 근본 기술 혁신이 바로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세기의 혁신적 기업가들이 세상에 등장한 것도 같은 시기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1980년대를 전후해서 장기적인 경제 성장을 결정하는 것은 자본과 노동의 투입량이 아니라 지식과 기술이라는 점을 주장한 '신성장 이론'이 거시경제학의 대세를 장악했지만, 기실 그 이론의 실질적 구현은 이미 1940년대부터 관철되고 있었다. 바나버 부시에 의해 주도된 과학기술 입국 전략과 그것을 뒷받침해온 수많은 산업-기술 정책들이 바로 그것이다. 혁신적 기업가, 혁신적 산업-기술 정책을 통한 시장 경쟁의 만개, 그리고 이를 적절하게 조절했던 유효수요 관리 정책이야말로 전후 미국의 장기 성장을 가능케 했던 핵심기반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대 이후 혁신과 경쟁을 주창하며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2000년의 닷컴 버블이 붕괴한 이후 혁신과 경쟁은커녕 미국 경제의 구조적 불안정성을 심화시켜 가고 있다. 지면의 제약으로 자세하게 논증하기는 어렵지만, 심각한 구조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미국 경제가 여전히 지탱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세계 모든 국가를 엄청난 차이로 앞서고 있는 미국의 독보적인 과학기술 역량에 힘입은 것이다. 미국의 산업-기술 정책이 갖고 있는 선진성은 그들의 보고서나 정책안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으며, 세계의 국가들이 미국의 전략적 설계역량을 따라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산업-기술 정책의 현대적 혁신을 위해**
최근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대안을 따라 기술 가치 평가, 기술 금융 등을 통한 기술 및 지식시장 육성책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것 역시 하나의 대안일 수 있다. 하지만 기술 및 지식의 고유한 특성상 시장 가격 변화를 통해 형성되는 기술 시장은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다.
특히 기업의 생존과 관련된 전략 기술이나 지식, 불확실성이 큰 범용기술의 경우는 시장평가를 통해 거래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산업-기술 정책의 시장 근접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정책 무력성 명제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고, 이럴 경우는 정부가 개입하기 보다는 민간 시장을 육성하는 게 효과적이다.
이에 반해 우리의 관심 대상인 근본 기술 혁신은 그 본질상 시장 가격의 변화에 의해 조정되기보다는 오히려 시장 가격 변화의 토대인 시장 구조의 변동을 선도한다. 전략적 설계를 담당하는 산업-기술 정책은 바로 이것, 기존의 시장 질서를 뒤흔들면서 등장하게 될 보다 많고 다양한 혁신기업을 생성하기 위한 기반, 즉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올 근본 기술 혁신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전략적 설계조정(Strategic architectural coordination)의 성격이 강할수록 정책 무력성 명제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육성해야 할 시장의 형태와 주체 역시 학·연이 주체가 되고, 시장가치 평가가 아니라 전략가치 평가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전략적 설계 기능을 갖는 산업-기술정책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족해야 할 사활적인 조건이 있다. 패러다임 변화의 흐름을 읽고, 미래를 예측하며, 산업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 즉 미래설계의 능력이다. 그렇다면 과연 1980년대 이후 다학제 간 연구를 통해 성립한 기술경제학이 과연 이 사활적 조건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인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