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도자기와 공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 인터넷 검색창에서도 쉽게 확인되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간략한 이력이다. 아사카와 다쿠미, 그는 1980년대 말 무렵 내가 우리 고미술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이것저것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마주친 이름이다.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볼수록 그는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조선 도자기와 민예품 탐구에 바친 그의 열정이, 세상을 하직하기에는 너무나 이른 나이 마흔하나에 삶을 마감한 그의 일생이, 그 짧은 삶을 살면서 그가 남겨놓은 몇 편의 글이 내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 나는 속으로 "아! 이렇게 한국미술을 사랑하고 헌신한 삶이 있어 지금 우리가 한국미술을 이야기할 수 있고, 또 한국미술은 그 생명을 잃지 않고 아름다움의 빛을 발하는구나!"하고 독백했다.
▲ 아사카와 다쿠미. 그는 1914년 조선에 건너와 1931년 급성폐렴으로 사거하기까지 17년간 오로지 조선의 도자와 민예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조선도자명고>와 같은 소중한 연구 자료를 남겼다. ⓒ한길아트 |
1914년(24세) 조선으로 오기 전까지는 그는 고향 야마나시(山梨) 현에서 소학교와 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아키다(秋田) 현의 영림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식민지 조선으로 오게 되는 것은 7살이 위인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와 깊은 관련이 있다. 7살이라는 상당한 나이 차이도 있었지만 다쿠미에게 노리다카는 형 이상의 존경 대상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먼저 조선으로 떠난 형을 늘 그리워하면서 함께 지내고 싶어 했다고 전한다. 당시 노리다카는 경성(서울)에서 남대문 공립 심상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의 미술에 매혹되어 조선 도자기를 수집하고 있었으며 야나기 무네요시(柳 宗悅 1889∼1961) 등과도 가까운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에 건너온 다쿠미는 일본에서의 영림서 근무경력을 인정받아 임업 시험소의 용원으로 자리 잡는다. 그의 업무는 조선에서 자생하는 수목과 외국에서 수입된 수종들을 재배하며 묘목 기르기에 관한 실험과 조사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다쿠미의 주 업무는 양묘였으므로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게 되어 자연히 조선 사람과 조선 문물을 많이 접촉하게 되었고, 또 그 일은 전국에 산재한 도요지를 찾아 자료를 수집하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형 노리다카의 조선 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에 깊이 공감하고 함께 도자기를 찾아 조선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도자기는 물론 조선의 민예품에도 큰 관심을 두고 몰두하게 된다.
조선민족박물관 설립으로 이어진 야나기 무네요시와의 만남
한편 조선으로 건너와 3년째 살던 중 1916년 8월, 그의 생애에 큰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찾아온다. 야나기 무네요시와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이 만남은 그의 형 노리다카의 소개로 이루어졌는데, 이때 야나기는 직감적으로 다쿠미가 수집해놓은 조선 민예품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 공예에 눈을 뜨게 된다. 결과적으로 다쿠미는 야나기가 공예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동기부여를 해준 장본인이 된 셈이고, 그 후 야나기의 조선미술품 수집에 최고의 안내자 역할을 하게 된다.
또 야나기가 1920년 무렵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결심하게 만든 사람도 다쿠미였으며, 실제 그도 설립에 필요한 기금마련과 전시유물 수집에 열정을 쏟는 등 크게 기여하였다. 그 결과 1924년 4월 경복궁의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이 정식으로 개관하였고, 그 후 이 미술관은 조선 도자기와 민예품을 중심으로 봄, 가을의 정기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조선 미술, 그중에서도 공예의 아름다움과 전통을 알리고 그 맥을 잇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우리 미술과 공예의 연구와 전시가 우리 손이 아닌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된 사실에 불편해할지도 모르겠다. 또 당시 그들의 활동이 일제에 의해 저질러지는 조선 문화 파괴에 반대하고 조선 문화 보존을 바라는 몇몇 양심적 문화예술인들의 소박한 조선 문화 사랑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그런 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시대상황을 감안하고 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도미모토 켄키치(富本 憲吉, 1886∼1963) 등 당시 이 일에 관계한 사람들의 뜻과 활동내역을 잘 살펴보면 그러한 오해는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믿는다. 참고로 조선민족미술관은 태평양전쟁과 일본의 패전으로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으나 대부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지금껏 소중한 민족문화자산으로 남았으니 이 부분에서도 우리는 그들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다쿠미가 17년간의 조선 생활에서 이룬 최고의 업적은 조선민예에 대한 연구 성과다. 그는 1920년 중반부터 <시라카바(白樺)> 등의 잡지에 조선 도자와 민예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1929년에 <조선의 소반(朝鮮の膳)>을, 1931년에는 <조선도자명고(朝鮮陶瓷名考)>를 잇달아 출간했다. 그는 이 두 권의 책 외에 그의 사후에 야나기 등 가까운 지인들의 주선으로 <공예>에 발표된 유고 '조선 다완'을 포함해 7편의 글을 남겼다.
바야흐로 그의 경험적 조사연구 성과가 본격적으로 발표되기 시작할 무렵 그는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으니, 한 개인으로서 지극히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의 열정과 축적된 지식을 더는 볼 수 없게 된 우리로서도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보아도 그의 저작들은 경이로운 데가 많다. 특히 <조선도자명고>는 기물의 쓰임새와 종류에 따른 명칭, 도자기를 만드는 도구와 원료, 그리고 가마터의 조사 등을 세밀하게 수록한 교과서 같은 책으로 조선 도자 연구에 소중한 문헌이 되어왔다. 야나기는 이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업적을 높게 평가했다.
"이 저술만큼 지은이 스스로 기획해서 만들어낸 예는 드물 것이다. 아직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고 시도하지도 않았으며, 앞으로도 아마 해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거가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오늘날, 만약 이 저술이 10년만 늦었더라도 여기 모아져 기록된 명칭의 수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지은이는 잃어버리게 될 인간의 기억을 교묘하게 보완해주었다. 즉 묻혀버릴 뻔한 진리를 사라지지 않는 문자로 담아둔 것이다"
당시 이 분야 연구 성과가 거의 축적되어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 더욱이 이 분야와 관련이 없는 농림학교 졸업 학력의 일본인인 그가 이 정도의 연구 보고서를 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나는 오직 조선 도자와 민예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이유로서도 설명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 이 땅에 묻혀 조선의 흙이 되다
조선 도자기와 민예품을 수집하고 연구한 것을 빼면 다쿠미가 조선에서 산 삶은 지극히 평범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을 황폐화하고 절망케 한 식민지 고위 관료나 군인 경찰도 아니었다. 총독부 산림과 용원, 임업 시험소 평직원으로 17년간 일했을 뿐이다. 그런 그가 우리가 미처 우리 전통미와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우리보다 먼저 알고 느끼고, 또 몸과 마음으로 그 아름다움과 하나가 된 사람이다.
우리의 소반과 장롱을 닦고 어루만지며 조선 민예품의 고아하고 편리한 쓰임(用)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였고, 전국의 흩어진 가마터를 두 발로 뒤지고 다니면서 조선 도자기의 역사를 정리하고 거기에 녹아 있는 조선 도자기의 특질을 탐구했다. 거기에는 일본도 조선도 없었다. 다만 조선 도자기와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열정이 있었을 뿐이다. 진실로 그는 조선과 조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조선 사람을 사랑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에게서 흔치 않은 사랑을 받았다.
1931년 4월, 그는 그의 유언대로 한 줌 조선의 흙이 되고자 그가 살았던 경기도 양주군 이문리 마을 뒷산에 묻혔다. 많은 조선인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못다 한 일들이 많았음을 아쉬워했다. 그래서일까, 그와 함께 살아보지 못한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삶을 그가 사랑한 조선의 아름다움만큼이나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서울 중랑구 망우동 공동묘지에 이장되어 그를 사모하는 한국인들의 손으로 관리되고 있는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 망우동 공동묘지에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지. 매년 4월 초 그의 기일에는 그를 추모하는 한국인들의 모임이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한길아트 |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저자 김치호
195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77년 연세대학교상경대학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통계학 석사(1983), 경제학 박사(1987) 학위를 받은 뒤 20여 년 동안 한국은행, 예금보험공사 등에서 한국의 거시경제, 통화정책, 금융위기를 연구했다. 정리금융공사 사장을 역임했고, 연세대학교, 서강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한국의 거시경제 패러다임>(2000, 한길사) , <고미술의 유혹>(2009, 한길아트) 등을 저술하고 논문 50여 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했으며, '유망 미술작가 해외진출 후원모임'을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우리 미술시장 저변 확대를 위한 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