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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30ㆍ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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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일기-동티모르 주둔 1년<30ㆍ끝>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참 많은 게 변했어요. 처음 입대했을 때엔 내일이라도 통일될 듯 남과 북의 국가 원수가 악수하고 얼싸안았죠. 동티모르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 눈물 흘렸죠. 그러더니 갑자기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졌고,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9.11 이전과 이후의 세계는 몹시도 달라졌죠.

하지만 세계가 어떻게 변했건 상관없이 무엇보다 저 자신이 많이 변했네요. 가까이는 우선 그토록 무시하고 익숙해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태국 음식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 일이 있고요, 피지(Fiji)가 어디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고, 동티모르와 호주가 5백 킬로미터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이라는 사실도 동티모르에 다녀오기 전엔 전혀 몰랐는데 그런 지리적인 지식도 얻었습니다.

캐나다 사람들이나 호주 사람들이 자기들은 '유럽적'이라는 자부심에 미국인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처음으로 깨달았고, 아무리 서양 사람들이 합리적이다 개인적이다 떠들어봐야 '국가이익'이란 것 앞에서 동양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국수적이 되고, 당장 인사 관리하는 상사가 눈앞에 없는 한에야 한없이 관료적으로 변해 가는 모습도 생생히 지켜봤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폐허 속에서도 항아리 단지 속에 돈을 잔뜩 쌓아두고 사는 어쩔 수 없는 중국인인 만물상 아저씨나, 비록 그저 통역이나 하고 운전 기사나 하고 있지만 저보다 훨씬 당당하고 커 보였던 동티모르인들의 모습도 스쳐 지나갑니다.

이 모든 변화 중 가장 스스로를 기쁘게 만드는 건 아마도 태국 음식을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얄팍한 영어 실력이 조금 늘어난 것도, 통장에 잔고가 조금 더 쌓인 것도, 유엔에서 일해봤다는 증명서 쪼가리도 모두 태국 음식을 좋아하게 된 것과 바꾸라면 기꺼이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요. 참 우습게도 왜 노란 얼굴, 검은 머리, 짧은 다리를 가지고 그렇게도 백인들 흉내를 내려고 하며 살았는지 싶어지거든요.

아무렇지도 않게 포크와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고, 너무 익숙하게 샐러드 접시에 야채를 덜어 드레싱을 살짝 뿌릴 줄 알면서 왜 태국 음식은 그렇게 낯설어 했는지. 처음 먹어보는 곰팡이가 퍼렇게 설은 치즈와 몇 달이고 벽에 걸어 둔 돼지다리 햄에 절은 술집 냄새엔 그렇게 쉽게 적응했으면서 왜 태국 향료와 인디카 쌀에는 그리도 질색을 했었는지.

그 대답들이 태국 음식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몇 십번이고 물어봐 놓고서도 발음하기 어려운 대부분의 음식이름은 다시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그 음식들이 제게 아시아를 가르쳐 줬다는 건 잊지 못할 겁니다. 우리 못지않게 고단하게 살아왔고 우리 못지않게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너무나 비슷하게 생긴 이웃 나라들을 저는 이제야 겨우 발견했거든요. 지도 위의 동티모르는 그저 작은 나라일 뿐이지만, 근시안이던 제게 있어서 동티모르는 아시아 혹은 저 자신을 바라보는 안경과 같았는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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