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국제정치 교과서에서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발생한 동시다발테러 사건은 국제정치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꾼 결정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일본의 대외 정책 또한 이를 계기로 크게 전환했다. 전환된 외교정책은 일본외교의 전통적 관심 공간이었던 동아시아의 근린 아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의 원린 아시아를 실천 무대로 전개되었다.
일본의 신 아시아 정책을 논하고자 하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9.11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중앙아시아가 강대국 국제정치의 중앙무대로 재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일본 자위대의 전시 해외파견에 물꼬가 트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연구자도, 일본외교 연구자도 이 두 가지 사실이 일정한 관련 속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기껏해야, 미일동맹 신자인 고이즈미 수상이 많은 일본 국민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한 미국에 이끌려 일본 외교에 있어 미지의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정도의 인식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인식에는 일본 외교에 대한 오래된 오해 또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즉, 일본 외교의 수동성 또는 피동성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다. 이런 가운데 2002년 9/10월호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실린 헤진보탐과 사무엘스의 논문 「일본의 이중 게임」은 다소 생뚱맞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헤진보탐과 사무엘스는 위 논문에서, 자위대의 전시 해외파견으로 대변되는 일본 외교안보정책의 결정적 전환이 미일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서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 일본의 주체적 손익계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까지는 한국과 중국 등의 일본 관찰자, 그리고 일본 안의 이른바 평화주의자들 가운데 일부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즉, 9.11이 일본의 군사적 보통국가론자들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헤진보탐과 사무엘스가 이들과 다른 점은, 일본의 손익계산이 군사안보적인 국익이라기보다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킨 데 있었다. 즉, 9.11 이후 일본의 외교 행보가 겉으로 나타난 현란한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그 내실에 있어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종합안보정책적 고려가, 조신하게 그러나 확고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헤진보탐과 사무엘스는, 다자중심적인 경제외교 또는 자원외교가 안보외교의 중심이었던 일본의 전통을 잊고 미일동맹에만 눈이 팔려서는 일본 외교의 본질을 놓치기 쉽다는 경고였고, 이를 통해 미일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일본 당국자가 아니라 일본 연구자들이라는 점을 드러내 주었다. 이하, 일본의 새로운 아시아정책의 전개와 그 특징을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전개되고 있는 일본의 적극적 관여 정책 속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태평양에서 유라시아 대륙으로 눈 돌리는 일본
일본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1997년 7월 24일, 하시모토 수상이 일본 경제동우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유라시아 외교' 구상으로 표명되었다. '신뢰', '상호이익', '장기적 시점' 등 3개의 원칙을 기본으로 대러 외교를 전개하며, 아울러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지역에 대해서도 새로운 외교를 전개할 뜻을 밝혔다. 특히 중앙아시아 각국에 대해서는 다양한 수준의 양자간 교류 확대를 천명, 이른바 양자주의에 입각한 '신 실크로드 외교'의 출발을 선언했다.
일본 외무성이 발간하는 외교청서 1998년도 판에 따르면, '유라시아 외교' 구상의 배후에서 해양진출 외교에서 대륙진출 외교로의 전환이 모색되고 있었음을 읽어 낼 수 있다. 즉, 외교청서에는 '태평양에서 바라본 유라시아 외교'의 추구가 주창되고 있는 바, 이는 '태평양에서 바라본 태평양 외교'의 졸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서 일본은 제국주의시대 이래 처음으로 '대륙외교'에 다시 나섰고, 90년대 이래 추구해 온 '대국외교'에 탄력이 붙게 되었다.
또한 '유라시아 외교'는 '대러 관계개선'의 기회 및 '대중 카드'의 확보를 추구하는 것이기도 했으며, '대미 의존에서의 탈피와 일본 외교의 독자적 공간 확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또한 이와 동시에, '유라시아 외교'의 일환으로 일본이 중앙아시아에 관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국제 석유자본을 방패로 삼은 미국, 유럽의 주요국, 러시아, 중국 등이 전개하고 있는 파워 게임에 일본이 관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양자주의에 기반한 '유라시아 외교'는 일본 국내외의 정세 변화와 중앙아시아에서 전개되는 복잡한 지역주의 움직임에 부딪혀 기능부전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지역주의 주도권을 둘러싼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경쟁관계는 일본의 개별 국가에 대한 양자관계에서 운신의 폭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90년대 이래 중앙아시아 역내 지역협력기구 창설 노력은 다원적으로 전개되고 있었으나, 이 지역 국가들의 경제 지리적 유사성 또는 보편성으로 인한 보완관계 성립의 어려움 등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 제기되고 있었다. 따라서 지역통합의 성공을 위해서는 역외국가의 리더십이 필요한 실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의 이러한 사태전개에 조응한 새로운 외교 구상을 모색하고 있던 일본에게 9.11 이후의 사태전개는 또 다른 기회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렇듯 중앙아시아의 역내 지역통합 노력과 그 어려움의 극복 과제에 대응하는 형태로 중앙아시아에 대한 관여정책을 지속하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2004년 8월 가와구치 외상의 중앙아시아 4개국 역방에서 표명된 '중앙아시아+일본 대화' 구상이었다. 가와구치 외상은 첫 방문국인 우즈베키스탄 타시켄트의 세계경제외교대학을 방문, 이 자리에서 정책연설을 통해 5개의 중심축으로 구성된 새로운 대 중앙아시아 정책을 표명했다.
그것은, 종래의 중앙아시아 각국과의 양국간 관계 증진에 더해, 중앙아시아 지역 전체와의 대화를 새로이 시작하겠다는 선언이었으며, 이를 위해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협력의 틀로서 중앙아시아+일본 대화'라는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내 협력을 위한 자조노력을 일본이 지원한다는 형식의 외교노력을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아세안 지역에서, 그리고 90년대 이후에는 서부 발칸 지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 구 유고 구성국 4개국 및 알바니아)에서 이들 지역에서의 지원 협력 사업을 통해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일본 당국자는 이러한 지적 자산을 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듯하다.
한편,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은 9.11 이후 미국의 새로운 대 중앙아시아 정책과 비교하여 독자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루옹과 웨인탈은, 미국의 중앙아시아 정책이 중앙아시아 경제공동체의 창설 운영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다자주의적 접근에서 벗어나 우즈베키스탄을 지역적 패권국가(헤게몬)로 추대하여 이를 통해 지역의 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보다 현실주의적인 접근으로 그 중심이 이동하고 있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필자들은 논문에서, 후자의 정책은 이 지역의 안정을 가져오기 보다는 오히려 독재 정권을 지원함으로써 국내의 반발을 키우고 이것이 이슬람 과격 세력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위험한 정책이라며, 클린턴 정권이 선호했던 전자로의 회귀를 촉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책은 이들의 권고에 반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중앙아시아 정책에 대한 미국 내 비판은 이와 정반대의 입장에서도 개진되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연구소 소장인 프레데릭 스타는 미국의 대 중앙아시아 정책으로서 장기적 적극 관여정책을 옹호하고, '대 중앙아시아 협력 및 개발을 위한 파트너십(Greater Central Asia Partnership for Cooperation and Development, GCAP)'을 통한 적극 지원의 실시를 권고했다. 스타의 이 지역에 대한 인식은, 이 지역에서 미국을 배제시킨 모든 다자간 협의의 틀이 대부분 기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예컨대, CIS, 중앙아시아 공동시장, 유라시아 경제공동체 등). 설혹 기능하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해도 결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미국의 관여가 이 지역의 안정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다자간 협의의 틀 창출 노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스타의 글은 오히려 일본의 대 중앙아시아 진출 시도에 미국이 긴장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는 듯하다.
일본 내 두 가지 입장: '지정학파'와 '지경학파'
일본의 대 중앙아시아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식자층 가운데, 강대국의 '거대 게임'적 요소와 현실주의적 권력정치적 요소를 강조하는 그룹을 편의적으로 '지정학파(地政學派)'로 부르기로 한다. 전 주카자흐스탄 대사였던 마츠이 아키라(松井啓)와 키르기즈스탄 등 중앙아시아 3개국 경제고문인 다나카 데츠지(田中哲二), 연구자로서는 와지마 요시키(輪島美樹)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마츠이는 '거대 게임'의 시대와 현재를 평행선상에 놓고 일본의 적극적인 관여정책을 권고하고 있다. 즉, '거대 게임'의 시대에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계기로 영ㆍ러간 세계분할 경쟁의 중심이 되었으나, 현재는 카자흐스탄의 풍부한 천연자원과 소련이 남기고 간 경제 인프라, 높은 교육수준이 주목받고 있으며, 구미의 석유 재벌이 자원획득을 노리고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진출이 두드러지고 있어, 과거 영국이 했던 역할을 대신하며 게임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보고, 이러한 미국의 자원획득 노력을 '서부개척사 제2부'의 개막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진출 이외에 독일과 한국의 진출이 두드러지고 있다면서, 이에 비해서도 못 미치는 일본의 느린 행보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이들의 진출에 대해 경계하고 대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와지마는 카스피해 연안국의 석유 및 천연가스 매장량과 생산량에 대한 정밀한 조사와 그에 대한 분석을 통해, 중앙아시아의 경제적 의미가 의외로 작으며, 오히려 국제정치적 영향력 경쟁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카스피해 자원이라고 하는 것은 매장량이나 생산량 모두 애초에 기대되었던 만큼의 양적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오히려 해당 지역의 중요성은 지정학적 측면에서 찾아진다는 것이 와지마의 주장이다. 즉 자원 획득을 위한 경쟁이라는 측면보다는, 파이프라인 부설을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 중국, 이란 등 주변국의 이해관계 조율 문제가 이 지역의 정치 경제적 안정에 긴요한 문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나카의 주장은 가장 '지정학'적이다. 그는, 자원 경제 외교의 면에서 보아도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찾기 어려운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원을 왜 주장하는가라고 자문하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답하고 있다.
첫째, 거시역사적 시각에서 과거 문화전파의 은혜를 입은 데 대한 보답으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발전한 산업문화의 전파자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 둘째, 유엔외교를 전개하는 데 5표(몽고와 터키를 포함한 광역 중앙아시아의 경우 10표)를 잃느냐 얻느냐의 차이는 매우 크다는 점. 셋째, 가장 중요한 결론으로서, 장래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중러 대립 갈등이 일어날 경우, 일본의 운신의 폭은 매우 좁아질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셋째 사항과 관련해서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지원을 지렛대로 이 지역에서의 정치 경제적 공백을 메움으로써, 중러의 일방적 개입과 그로 인한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고 중러간의 완충지를 정치적으로 안정시키는 것이 일본의 안보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중러 간의 갈등을 방지하는 것은 한반도의 안정에도 기여할 것이며, 결국 유라시아 내륙의 평화와 안정의 혜택은 일본에 직접 미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한편, '유라시아 외교' 이래 일본의 외교 노력을 평가하는 식자들은 일본의 대 중앙아시아 외교를 실리적 차원에서 '지경학(地經學)적'으로 풀어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전 주우즈베키스탄 대사 마고사키 우케루(孫崎享)이다. 그는 대 중앙아시아 외교의 요람기에 우즈베키스탄에서 겪은 일들을 토대로, 해당 지역에 대한 일본의 외교정책이 탈이념적 실용주의를 기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학부적(工學部的) 외교론'을 제안했다.
'공학부적 외교론'은 와타나베 코지(渡邊幸治, 95년 당시 러시아대사)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받은 교시를 마고사키가 나름대로 이론화하고자 한 것으로, 이론(이념) 중시의 '이학부적(理學部的) 외교론'에 대한 비판으로 나온 것이었다. 즉 현장을 중시하고, 따라서 현장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중심으로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지식인 중심의 논단 외교론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외교현장의 구체적 현실과 괴리될 위험히 상존하며, 때때로 논단에서 전개되는 지식인들의 구상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용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배려를 결여한 지적 유희에 불과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마고사키는 현장 외교관으로서의 경험에 비추어 일본-우즈베키스탄 양국관계의 현실과 전망을 분석하고 있다.
IMF의 융자정책을 바꾼 일본의 독자적 대중앙아시아 외교
독립 이후 우즈베키스탄의 최대과제는, 국내경제에 대한 소련붕괴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경제의 안정적 발전기조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독립 직후 우즈베키스탄에 대한 서방진영의 대응은 대단히 냉정한 것이었다. 다른 국가에 비해 우즈베키스탄은 국내외 사정을 이유로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시장자유화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정치적 민주화의 지체에 대해서는 영국과 미국이, 경제적 자유화의 속도조절에 대해서는 IMF가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고, 급기야 1994년 6월, IMF는 시장자유화 움직임이 더디다는 이유로 융자교섭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는 데 출구가 되었던 것이 일본이었다. 특히 일본의 대장성 관계자 가운데 경제원조에 대해 IMF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첫째, 자기 고유의 경제정책을 가진 국가만이 결국 발전을 이룩한다. 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IMF 등 외부의 지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국가에서 경제발전을 이룬 예는 없다. 둘째, IMF는 단기 금융지표를 중시하기 때문에 장기적 공업육성책은 경시되기 마련이다. 세째, IMF 모델은 결국 미국 모델이며, 이는 여러 시장경제 가운데 한 형태에 불과한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정치면에서도 일본정부는 우즈베키스탄 지도부에 관대했다. 나가토미 유이치로(長富祐一郞, 전 재정금융연구소장)는 카리모프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즉,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 서구와 미국은 200년, 일본은 100년 걸렸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수 년만에 민주주의의 확립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서서히 전진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배경으로 일본정부는 94년의 IMF 융자철회결정 직후, 우즈베키스탄이 가장 중시하는 석유 가스 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융자를 결정했다. 그 뒤에도 일본정부는 석유정유소 건설 등에 대한 수출입은행 융자, 엔차관 등을 결정, 실시했다. 95년 현재, 일본은 우즈베키스탄의 최대 융자국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적극 지원책의 영향을 받고 IMF는 융자중지 정책을 철회, 95년 봄에는 전무이사를 파견, 융자를 실시하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시켰다.
마고사키는 이 사례를 일본의 외교가 종래의 IMF 추종에서 벗어나, 거꾸로 IMF의 정책을 전환시키고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만들어낸 예로 기록했다. 나아가 이러한 일본외교의 적극성이야말로 센노 다다오(千野忠男, 전 재무관) 등 대장성 관계자를 비롯한 '현장의 사람들'이 일구어낸 업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공학부적 외교'의 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태도에 대해 우즈베키스탄은 95년 5월,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의 방일 1주년 기념사 가운데, '일본은 가장 신뢰할 만한 나라'라는 최고의 찬사로 감사받기에 이르렀다.
또 하나 일본에게 유리했던 점은, 탈정치적 입장에서의 지원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특히, 미국의 중앙아시아 정책 입안자 그룹이 한편에서는 안보상의 고려에서 접근하려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에서는 인권과 민주화의 시각에서 접근하려는 사람들이 양분되어 종종 미국의 정책 자체가 혼란에 빠지곤 했고, 중앙아시아의 당사국은 이러한 미국의 정책에 휘둘리게 되었으나, 일본의 '색깔없는 지원'은 이러한 혼란으로 인한 공백을 메워주었다고 높이 평가받고 있다. '색깔없는 지원'이란 종래 군사적 보통국가론자들이 ODA를 중심으로 한 종합안보정책을 비난할 때 동원하는 상투어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마고사키에게는 '색깔없는 지원'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지원으로 보였던 것이다.
한편, 시즈오카 현립대학 교수인 미야타 오사무(宮田律, 1999)는 지경학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만큼, 걸프지역의 석유에 대체할 새로운 자원 공급지로서의 중앙아시아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안정적인 자원 공급로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지정학적 안보적 고려가 필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중앙아시아가 대러, 대중 정책의 지렛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를 배제하거나 고립시키는 형태의 중앙아시아 접근은 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미야타는 지경학파와 지정학파의 입장 차이를 조율하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이끌어 가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본 아시아외교의 중심, 동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로 이동할 수도
일본은 소련 해체로 인해 새로이 국제정치의 무대로 등장한 중앙아시아에 대해 요인 왕복과 ODA를 지렛대로 양자간 협력관계를 유지해 가면서, 97년에는 하시모토 수상의 리더십 하에 '유라시아 외교' 구상을 내 놓고,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양자간 협력관계를 강화시켰다. 그러나 9.11 이후 국제정세가 급격히 변화하고 외무성 스캔들로 국내적 추진력을 잃어가는 가운데 일본은 '유라시아 외교'의 기조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한 조정 작업의 결과 '중앙아시아+일본 대화'라는 다자간 협력의 틀을 마련해 내 놓았다.
중앙아시아 외교와 관련해서 일본의 여론에는 지정학적 고려를 중시하여 대국외교를 펼칠 것을 요구하는 그룹과, 전통적인 경제 자원외교의 적용을 통해 실리외교를 추구해야 한다는 그룹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서로 대립적이라기보다는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그 결과, 일본 외교에 새로운 흐름이 창출되었던 바, 이를 필자는 '강대국 실용주의'로 부르고자 한다.
한편, 일본의 외교영역 속에 중앙아시아가 새로이 독자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일본의 대 아시아 외교에 분할선이 그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앙아시아 외교가 성공적으로 전개된다면 일본은 '근린 아시아' 외교로부터의 이탈하여 '원린 아시아' 외교로 도피해 버릴 가능성이 있다. 고이즈미 정권 등장 이래 일본이 아시아 외교의 상대국으로 한국과 중국을 중시해 왔던 태도를 버리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여 마찰을 일으키면서도 이른바 '일본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되받아치는 배경에는 이러한 '거대 아시아' 전략이 숨어 있는 듯하다.
메어셰이머(J. Mearsheimer)는 탈냉전 이후의 국제정치를 '미래로의 회귀(Back to the future)'로 설파했다. 21세기 동북아시아의 탈냉전 구도가 다시 '강대국 패권경쟁'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의 통찰이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독도 문제를 둘러싸고 갈수록 꼬여가는 한일관계를 바라보며, 19세기 말의 동북아시아 국제정치를 기억해 내고는 기시감(déjà-vu, 旣視感)에 사로잡히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그러나, 일본이 운요호를 파견하고 그 사후처리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를 세계적 불평등조약체제에 강제 편입시키는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전개되는 영러간 패권경쟁을 일본이 세밀히 관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그 뒤에 니시-로젠 협약(1898년)으로 한반도에서 전개되는 러일간 각축의 한 장면을 장식했던 니시 도쿠지로는 1880년, 상트 뻬쩨르부르그에서의 주러 공사관 생활을 마감하면서 중앙아시아를 낱낱이 여행하고 돌아왔다. 물론 그의 여행 목적은 이 지역에서 전개되는 영러간 대립에 대한 관찰과 학습이었다. 다시 1896년에는 후쿠시마 안세이(福島安正)라는 군인이 중앙아시아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후쿠시마는 1894년 주조선 공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며 대청 강경책을 주장하여 청일전쟁을 유발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말 일본은 중앙아시아를 소재로 세계 권력정치의 작동원리를 학습하고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가 온통 일본을 상대로 하여 버거운 생존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일본의 시야는 중앙아시아를 매개로 하여 세계 권력정치의 현장을 조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와 21세기의 한일관계는 분명 다르며, 달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시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21세기 한일관계의 복잡다기한 전개 속에서 나타나는 제반 문제를 역사문제로 환원하여 풀어가려고 할 때, 결국은 시야가 차단되어 반드시 관찰되고 분석되어야 할 현실이 간과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한일관계에서 우리가 꼭 분석해야 할 현실은 일본의 대 한반도정책 만이 아니다. 일본의 '거대 아시아' 정책과 그 방향을 대상으로 한 정교한 분석이야말로 꼭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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