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논술 문제를 분석해보자.
[논제] 오늘날 돈은 단순한 교환 수단이나 재화 축적 수단 이상의 복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래의 제시문들을 논의의 근거로 삼아 현대 사회에서 돈이 지니는 의미를 개인이 추구해야 할 삶의 질과 관련시켜 논술하시오. (2000년 이화여대 정시 논술) [가] 바다에 나갈 때 나는 한낱 선원으로서 나간다. 그래서 돛대 앞이나 갑판 아래, 또는 제일 높은 마스트의 꼭대기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한다. 물론 무슨 일이든지 명령을 받아야 하는 신세이니, 5월의 초원에 뛰노는 메뚜기처럼 이 마스트에서 저 마스트로 바삐 뛰어다녀야만 한다. 이것은 확실히 괴로운 일이다. 특히 지방 명문가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더욱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배를 타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기 직전까지 어느 시골 학교에서 교사로 으쓱대며 아무리 몸집 큰 학생이라도 두려워 쩔쩔매도록 한 경험이 있다면 교사에서 선원으로의 변신은 참으로 참담하기 그지 없으리라. 세네카나 스토아학파 식의 높은 수양을 쌓지 않고선 적당히 코웃음을 치며 참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경고하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런 마음도 차츰 사그라든다. 시골뜨기 늙은 선장이 내게 비를 들고 갑판을 청소하라는 명령을 내린들 어쩌겠는가? 신약성서에 비추어 보면 이 정도의 굴욕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노예 아닌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느냐고 나는 묻고 싶다. 늙은 선장이 아무리 나를 혹사하고 괴롭힌다고 해도, 나는 다른 사람들도 나름대로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의미에서는 노예라고 자위하면서 스스로 만족해한다. 결국 온 세상이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고 있으니 각자는 서로 어깨를 다독거리며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언제나 일반 선원의 자격으로 바다에 나간다. 선원 일은 나의 노고에 대해 대가를 지불해 주기 때문이다. 동전 한 푼이라도 승객에게 돈을 지불한 예는 없다. 반대로 지불하는 쪽은 오히려 승객이다. 돈을 지불한다는 것과 돈을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차이인가? 돈을 받는다는 것, 이를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는가? 돈은 지상의 온갖 악의 근원이므로 돈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우리의 뿌리 깊은 믿음을 생각하면 사람이 돈을 받기 위해 행하는 갸륵한 수고야말로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아아, 얼마나 즐겁게 우리는 그 파멸에 몸을 맡기고 있단 말인가? ―허먼 멜빌, (모비 딕) [나] 가난은 일정한 화폐경제 단계에서만 지극히 순수하고 특수한 형태로 나타난다. 아직 화폐경제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자연적인 조건하에서 그리고 농업생산물이 상품으로 등장하지 않는 경우에는 개인의 절대적인 궁핍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화폐경제의 영향이 미약한 지역에서는 개인적인 궁핍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가난은 하나의 일반적인 현상으로서, 사람들은 화폐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최소한의 필수품을 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이 도덕적인 이상으로 나타나게 되면 그에 상응하여 화폐의 취득은 가장 위험한 유혹, 진정한 악(惡)으로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영혼의 구원이 최종 목표로 간주될 때 많은 교리에서는 가난이 긍정적이며 필수적인 수단으로 해석되고 왕왕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넘어 그 자체가 중요하고 타당한 가치로서의 권위를 가지게 된다. 가난을 절대적인 가치로까지 고양시켰던 그러한 내적인 마음자세는 초기 프란시스코파 수도사들에게서 가장 열렬하고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들에게 가난은 독립적인 가치 혹은 심원한 내적 요구의 상관 개념이었다. 이 교단의 초기에 정통한 한 역사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프란시스코파 수도사들은 가난 가운데서 안전과 사랑, 자유를 발견하였다. 이 새로운 사도들이 필사의 노력을 다해 이 귀중한 보배를 보전하려고 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난에 대한 그들의 숭배심은 거의 무한한 것이었다. 그들은 불타는 열정으로 그들의 애인에게 날마다 새로이 구혼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가난은 적극적인 소유물이 되었다. 가난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신성한 재화의 획득을 매개했고 다른 한편으로 경멸적이고 세속적인 재화를 얻기 위해 돈이 수행하는 것과 똑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돈과 마찬가지로 가난은 실제적인 일련의 가치가 흘러들어가고 다시 풍성하게 되어 흘러나오는 저수지였다. 가난은 지고한 의미에서 「세계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에게 속한다」는 사실의 표현인 것이다. 돈을 포기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 속에서―마치 탐욕스러운 사람에게 돈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모든 사물 중에 가장 순수하고 정묘한 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프란시스코파 수도사들은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불리어졌다. ―게오르그 짐멜, 『돈의 철학』 [다]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부(富)가 가져오는 불행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꾸며낸다. 마이다스는 자신의 딸을 황금으로 변하게 했고, 모든 것이 손대는 족족 황금으로 바뀌는 바람에 음식조차 먹지 못했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부자가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고 그것은 최근의 사회과학적 조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부유해질수록 그만큼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부는 많은 소비재를 구매할 능력을 부여하지만,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에게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부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고용하거나 해고하고, 승진시키거나 좌천시킬 수 있으며, 사업을 시작하거나 그만둘 수도 있고, 사업체를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옮길 수도 있다. 부유한 사람은 주위의 물적?인적 환경을 통제할 수 있다. 반면에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주위의 환경에 순응해야 한다. 부유한 사람은 정치적 영향력 역시 아무도 모르게 돈으로 살 수 있다. 선거 기부금을 통해 한 표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정치권력을 손에 넣을 수도 있다. 미국 상원의원의 반수 이상이 인구의 상위 1퍼센트 이내의 부유층이며, 저명한 상원의원과 주지사들 다수가 엄청난 부의 소유자들이다. 선거 자금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부를 소유하지 못한 정치가가 부패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는 부자가 유일하게 정직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선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혼을 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사회적 서열을 매기는 중요한 척도 중 하나였던 부는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의 가치를 재는 거의 유일한 척도가 되었다. 부는 자신의 패기를 입증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달려 들만한 유일한 게임이다. 부는 치열한 경합장이다. 그 곳에서 시합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2류로 규정된다. ―레스터 C. 서로우, 『부의 구축(構築)』 |
위의 논술 문제는 정시 논술에서 보편적인 유형에 해당한다. 논제 자체에서 요구 사항이 비교적 일반적이고, 조건이 까다롭지 않다. 대부분의 정시 논술의 표준적인 형태이므로 자신있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논제 중 '오늘날 돈은 단순한 교환 수단이나 재화 축적 수단 이상의 복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부분은 논술의 방향성, 즉 주제를 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서 '돈의 복합적인 의미' 파악이 논술의 주제인 셈이다. 이와 같은 복합적 의미를 개인의 삶의 질과 관련지어 서술하라는 것이다. 이때 제시문들을 논의의 근거, 즉 본론을 전개하는 기초적인 틀로 삼아 활용하라는 건이 깔려있다. 이와같은 요구를 해결하는 첫 단계로 제시문의 주제와 요지 파악이 필요한 것이다. 각 제시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분석해낼 수 있다.
제시문 <가>에서 멜빌은 '지상의 온갖 악의 근원이 돈'이라는 도덕적 믿음과 '사람들이 이 돈을 받기 위해 갸륵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놀라운 현실' 사이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돈은 악의 근원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거야. 돈의 개인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제시문 <나>에서 짐멜은 '돈을 포기함으로써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로 가난을 적극적 소유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물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영적인 구원을 얻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돈이 많을수록 삶의 질도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시문 <다>에서 서로우는 부(富)가 곧 행복임을 강조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부는 정치 사회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규정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에 해당한다는 의미이다. 돈이 곧 행복을 결정짓는 요소는 아니지만 행복을 위한 필요 조건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멜빌이 주장한 물질적 욕망에 대한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짐멜과 서로우의 주장 중 하나의 입장을 선택해 논증하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때, 두 가지 입장을 절충할 경우에는 논리적 전개가 흐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다음의 문제를 통하여 논제 분석과 제시문 분석으로부터 시작하여 본문 완성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자.
[논제] 다음 제시문에 담긴 '슬픔'의 정신적 가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자신의 의견을 논술하시오. (가)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나) 1. 명예가 값진 기름보다 좋고,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좋다. 2.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좋다. 산 사람은 모름지기 죽는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3. 웃는 것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좋다. 얼굴에 시름이 서리겠지만 마음은 바로 잡힌다. 4.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이 잔칫집에 있다. -성경전서 중 전도서 7:1~4 (다) 장자의 친구 혜자(惠子)가 장자의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弔問)을 갔는데, 장자는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鼓盆而歌]. 혜자는 장자에게 부인이 죽었는데 슬퍼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건 지나치다고 말하였다. 장자는 "아내의 죽음에 금방은 슬펐지만 인간은 본래 생명이 없었고 형체도 기(氣)도 없었으며 나중에 기가 생기고 기가 유형으로 변하고 형체가 생명을 갖추었다가 죽음으로 바뀌게 되었으니 사계절의 변화와 같은 것이다. 아내가 죽은 뒤 천지 사이에서 편히 쉴 테니 통곡하면 천명에 통하지 못하므로 울음을 그치고 동이를 두드린다."고 하였다. -《장자》중〈지락편(至樂篇)〉 (라)
-루벤스, 평화와 축복 알레고리 (마)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사람은 죽어서 저승으로 가게 되는데 타나토스라는 저승사자가 죽은 이의 영혼을 인도해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에레보스(Erebus)는 이승과 저승 사이의 암흑세계를 뜻하는데, 본디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어둠의 신을 말하며, '어둠' 또는 '암흑'을 뜻한다. 하데스가 자신이 관장하는 저승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는 죽은 자들이 잠시 지나가는 곳은 에레보스, 티탄 등을 감금한 무한 지옥은 타르타로스라 불렀다. 에레보스에는 5개의 강이 있다. 1. 아케론(Acheron) 첫 번째 강은 '비통의 강' 또는 '슬픔의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아케론이다. 이 강에는 카론이라는 뱃사공 영감이 있다. 이 영감은 바닥이 없는 소가죽 배로 혼령들을 강 건너 쪽, 즉 피안으로 실어다 준다. 그런데 이 소가죽 배를 얻어 타려면 적어도 엽전 한 닢이라도 내지 않으면 절대로 이 강을 건널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세상을 떠난 사람의 입에다 꼭 엽전 한 닢을 넣는다고 한다. 여기서 영혼이 슬픔을 버리고 간다고도 한다. 2. 코퀴토스(Cocytos,Cocytus) 두 번째 강은 '통곡의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코퀴토스이다. 깊고 검은 시름의 강이라고도 하며, 특별한 이야기는 그리 전해져 오고 있지 않다. 3. 플레게톤(Phlegethon) 세 번째 강은 '불의 강', '불길의 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플레게톤이다. 용솟음치는 불길의 폭포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곳이며, 이전의 강에서 느꼈던 비통과 시름을 불로 정화해 깨끗한 영혼을 얻는 곳이기도 하다. 4. 스틱스(Styx) 네 번째 강은 '혐오스럽다'는 뜻도 있는 증오의 강인 스틱스이다. 저승을 일곱 바퀴 돌아 흐르는 강이며, 원래는 이 강의 여신의 이름이다. 5. 레테(Lethe) 마지막 강은 망각의 강으로 유명한 레테이다. 스틱스처럼 원래는 신의 이름으로, 분쟁과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딸이라고 한다. 스틱스를 건너고 나면, 죽은 망령은 지상에서의 기억을 모조리 지워 버리도록 레테의 물을 마시도록 강요당한다. 죽은 자는 이 강물을 마시고 이승에서의 기억을 모두 잊는다고 하며, 영혼이 새로운 육체 속에 들어가 다시 태어날 때 이 강물을 마시고 이승의 기억을 모두 잊는다고도 한다. 이승의 일, 전생의 번뇌는 까맣게 잊고 저승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곳이다. |
1단계: 제시문 분석
정신적 가치에 관한 학생들의 다양하고 심도 있는 주장을 전개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제시문 (가)는 정호승의 시, (나)는 성경전서, (다)는 동양의 고전, (라)는 루벤스의 명화, (마)는 그리스 신화 등 시대별, 장르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제시문들은 슬픔이라는 주제를 명시적으로 밝히는 내용보다는 학생들의 사고의 폭을 확장하고, 접근 방법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간접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학생들은 제시문을 그대로 인용하기 보다는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아 자신의 주장을 단계별로 완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시문 (가)는 정호승 시인의 작품이다. '슬픔이 기쁨에게'는 시의 제목이 동시에 79년에 발간된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시인은 박정희 독재 정권 하에서 이 시를 썼다. 이 시에서 '슬픔'은 가난과 억압에 시달리는 민중의 슬픔을 함께하고 고통을 감싸 안으려는 의지가 담긴 말이다. 냉철한 현실의 너를 증오하지 않고 함께 걷겠다는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암담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극복할 수 있다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신뢰를 보여주고 있다.
제시문 (나)는 성경전서 전도서의 일부이다. 본문 3절에 보면 "웃는 것보다 슬퍼하는 것이 좋다. 얼굴에 시름이 서리겠지만 마음은 바로 잡힌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슬픔이 주는 유익함을 암시해 준다. 슬픔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여 겸손해지게 하고 절실한 마음을 갖게 한다. 슬픔은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상심을 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 영혼을 정화할 수 있다.
제시문 (다)는 鼓(북 고) 盆(동이 분) 之(갈 지) 痛(아플 통)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된 일화이다.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장자(莊子:BC 369∼BC 289?)가 쓴 《장자》〈지락편(至樂篇)〉에 등장하는 이 고사성어는 술그릇(물동이)을 두드리는 아픔이라는 뜻으로, 아내 상(喪)을 당함 또는 상처(喪妻)한 슬픔을 의미한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슬픔의 지경에서도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슬픔의 근원인 죽음을 수용하는 관조적 태도라 할 수 있다.
(라)의 그림은 루벤스의 '평화와 축복 알레고리' 라는 작품으로 인생 역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슬픔을 딛고 평화를 얻는 경우를 상정한 것이다. 슬픔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고 한다면 극복한 이후의 평화는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극복 의지를 북돋는 근저에는 가족이라는 정서적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도 나타난다. 슬픔을 느낄 때 인간은 혼자라는 고독 상태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 등 함께 하며 위로와 사랑을 나눌 존재가 있을 때 슬픔의 어둠은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시문 (마)는 그리스 신화에서 묘사되고 있는 죽음의 과정이다. 죽음을 경험하게 되면 먼저 슬픔의 강이 흐른다. 곧이어 슬픔이 응집된 통곡의 강이 흐르게 되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아쉬움과 분노, 증오마저 폭발한다. 하지만, 결국 망각의 강에 이르면서 이승에서의 기억을 모두 상실하게 된다. 이때 저승 백성으로 다사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죽음이라는 운명적인 슬픔조차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2단계: 출제 의도 생각하기
본 문제는 주어진 제시문과 자료를 읽고 난 후 그 핵심내용을 파악하고 논제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자신의 독창적인 사고를 담아 표현해낼 수 있느냐가 문제 해결의 관건이다. 그림 이미지를 포함한 것은 문자 언어 뿐만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감상 능력과 해석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서이다.
'슬픔'이라는 소재는 인간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언제나 경험하게 되는 정서적인 상황이다. 친숙한 면도 있겠지만 평소에 자주 다루지 않는 논제일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평이한 주제에 대하여 어느 정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평가 대상이다.
3단계. 구상하기
논제에서는 제시문에 담긴 슬픔의 정신적 가치에 대하여 설명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이 요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슬픔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 슬픔은 인간의 여러 감정 중 기본적인 반응에 해당한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정서적 행복을 만조하기 위해서는 음지의 분노와 슬픔에 대한 성찰과 내면화가 필요한 것이다. 슬픔과 기쁨은 감정의 양극단에 위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슬픔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기보다는 삶의 연장선에서 반드시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슬픔에 젖어 정서적인 균형을 상실하게 되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자신만의 문제로 삼게 되면서 세상과 고립된 상황에 처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극복의 의지로서 슬픔에 대한 냉정한 해석과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정서적 안정이 필요하다.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슬픔의 그늘에 빠진다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수 있으며, 심하면 좌절감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슬픔에 삶이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슬픔을 기쁨과 즐거움을 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생활의 일부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4단계: 논리적인 답안 전개
논제의 해결 방향은 슬픔의 정신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슬픔의 속성과 문제 상황에서 발생하는 관련 현상, 이러한 현상에 대한 자신의 극복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제시문에서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먼저, 제시문 (마)에서 슬픔은 언제나 망각의 강으로 흘러버릴 것이므로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제시문 (나)에서 슬픔이 자신을 성찰하고 영혼을 정화시키는 긍정적인 기회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슬픔에 대한 기본 인식을 토대로 하여 극복 방안을 모색하면 된다. 제시문 (가)처럼 슬픔의 대상을 포용하고 적극적으로 맞서는 태도나, 제시문 (다)처럼 슬픔을 자연스러운 신의 섭리로 수용하는 태도, 아니면 자신만의 극복 방안을 제시하면 된다. 이러한 슬픔의 극복 이후에는 마음의 평화와 함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하여야 한다. 즉, 비애→자기성찰→고독→극복→여과의 단계를 거쳐야 진정한 극복의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있다.
<모범 예시답안> 인간의 온갖 감정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 '희로애락(喜怒哀樂)'이다. 이 말 중에 슬픔은 기쁨과 더불어 대표적인 인간의 감정으로 포함되어 있다. 인간은 복잡미묘한 감정을 지니고 그것을 표출하고 교류하는 가운데 삶을 유지해나간다. '슬픔'이란 고통과 불만족과 연결되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화'와도 떼어놓을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느낌이다. 제시문 중 (가)와 (나)는 슬픔의 긍적적 측면을 암시한다. (가)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이라든가 '슬픔의 힘'과 같은 표현을 통해 슬픔은 기쁨만큼 가치 있는 감정이라는 점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이 시에서는 슬픔을 지닌 자의 굳센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슬픔이 상심의 심연으로 인간을 끌어내리거나 현실 도피의 원인이 되는 부정적인 측면만을 지닌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나)에서는 웃는 것 보다 슬퍼하는 좋고,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좋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슬픔 뒤에 숨은 유익함을 알려주는 말이다. '산이 깊으면 골짜기도 깊다'는 말이 있다. 깊은 슬픔을 겪고 그것을 이겨낸 사람은 세상을 살아갈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나)에서는 슬픔을 초극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값진 대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다)와 (마)는 인간 삶에 있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죽음'을 통해 슬픔에 대응하는 인간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다)에서 장자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노래를 부른다. 인간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것이 사람들의 보편적 반응이겠지만 장자는 이를 초월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울음을 그치고 동이를 두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남다른 관점 때문이다. 이처럼 슬픔은 주관적 감정으로서 똑같은 상황에서 각자가 다르게 경험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마)에서는 죽음에서 재생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겪는 감정의 변이를 보여준다. 여기서 슬픔은 죽음의 순간에 가장 먼저 표출되는 감정으로 묘사되고 있다. 슬픔은 분노나 증오보다 즉각적인 감정이며 망각에 이르는 첫 관문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그림 (라)는 슬픔을 극복한 후의 평화와 안식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슬픔을 겪는 과정에서 인간은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지만 이겨내고 난 뒤에는 그간의 고통을 보상할 상대적인 평화와 기쁨이 주어지는 것이다. 제시문에서 드러나듯이 탄생에서 죽음까지 인간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떠나서 살 수 없다. 슬픔을 통해 인간은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개인은 더욱 성숙해지고 더 큰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래서 우리는 슬퍼하지 않는 삶이나 슬퍼할 줄 모르는 삶은 진정한 삶의 가치를 상실한 상태라고 본다. 특히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여 함께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고귀한 품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진정으로 슬퍼할 줄 아는 자만이 약자를 위해 자신의 일부를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슬픔은 유약한 감상이나 이유 없는 절망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 감정은 넓은 범주의 슬픔에 포함될 수 있으나 인간을 절망에 빠뜨리고 더 나아가 건전한 인간 정신을 잠식한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감정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의미의 '슬픔'은 인간 정신 영역을 확장하고 숭고한 인간애를 가능케 하는 의미있는 경험이라 하겠다. |
전홍식 에플논구술연구소장, 에플교육미디어 대표, 프레시안 논술 칼럼니스트, 영남사이버대학교 논술지도학과 강사, 경원대학교 사회교육원 논술지도사 양성과정 강사, 교육사랑·유니텔 교원연수 논술과정 강사, 중앙일보NIE연구소 논술 자문위원, 한국학원총연합회 논술강사 연수회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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