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통적 지식 개념에 대한 도전
순수한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고 믿고 '인식 주체'에 대한 의심을 기반으로 했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나'가 바로 명석한 판단과 인식의 주체임을 확실하게 하였다. 그래서 지식의 개념은 절대적 확실성이나 절대적 오류 불가능성이라는 이념 아래 전개될 수 있었다. 이러한 근대이성은 산업사회에 지식과 과학적 원리를 제공하였고, 불확실성의 제거라는 지적 역량의 축적을 가속화 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개개인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인식의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지식의 본래 속성에서 축출해 내는 것이 지식이라는 관점을 확신시켰다. 이러한 지식 불변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정초주의(foundationalism)는 객관적인 세계가 언어에 반영되어 있고, 대화 행위를 통해서 객관적 세계에 대한 지식이 소통된다는 믿음, 혹은 언어 체계 자체를 엄밀히 분석함으로써 대상 세계에 대한 궁극적 앎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은 현대사회에 들어와서 크게 손상되었다. 구조주의 언어학이나 후기 구조주의 언어학이 이러한 인식 주체에 대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즉, 소쉬르는 발화자로서의 개인은 전체 문법 체계를 구현하는 하나의 부수적인 기능을 수행할 뿐이라고 주장했으며, 더욱이 후기 구조주의에 이르러 인간 자체는 결코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의미의 창출자가 아니라는 '주체의 죽음'이 선포되기도 하였다.
근대적 인식론 혹은 산업 사회적 지식론이 실제 과학자들의 지식 창조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 헝가리의 물리화학자 폴라니(M. Polanyi, 1891~1976)는 객관성과 외재성만으로 우리가 생활에서 접하는 지식들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인식론적 견해로 '인격적 지식(personal knowledge)'을 제창하였다. 즉, 사물 또는 사실에 대한 지식들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암묵적 차원의 방법지를 강조하였다. 또한 전통적인 지식 개념을 비판하면서 실천과 융합된 인식으로 '실천적 인식론'을 제안한 쇤(D. A. Schn)은 반성적 실천의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 문제 해결의 습관이나 패턴을 형성하는 암묵적 판단을 행위와 더불어 습득하는 행동지(knowing-in-action)를 새로운 지식의 양상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지식관에 따르면 과거 '가르침'에 비중을 두었던 전통적 교육주의 교육관은 바뀌어야 한다. 그 내용은 첫째, 지식은 각 인식 주체에 의해서 생산·구성되고 확장되는 것이지, 원자적 형태의 명제들이 축적되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지식을 고스란히 실어 나르는 매개체로서의 언어의 확실성이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교사에 의해 발화된 언어가 교사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또 그 지식들이 언어를 통해서 곧바로 학습자들의 머리로 이전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셋째, 교육과 학습에 의한 지식의 확장은 낱낱의 정보가 축적되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서의 구조가 확장되어 나가는 과정이다. 넷째, 지식이 개개의 명제로 표현된 언어를 통해서 일대일로 전달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라면, 지식 전달과 재생을 교육의 준거로 삼았던 전통적 교육관은 수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학습자들은 정보와 지식을 수용, 습득해 나가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새롭게 지식을 구성하고, 창조해 나가는 능동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즉, 교육의 중심은 전달된 지식을 얼마나 잘 저장, 재생하는가에 있지 않고, 기존의 정보와 지식을 활용하여 새로운 지식을 얼마나 잘 창조해 내는가에 있어야 한다.
2. 지식정보사회에서 논술교육의 의미
컴퓨터의 발달이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듯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지식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미래학자들은 2020년이 되면 매 73일마다 지식이 2배로 증가하고, 2050년에는 지식의 1%만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폭발은 사회를 구성하는 직업의 분화로 나타난다. 우리나라도 1964년에 약 1,300개였던 직업의 종류가 현재는 12,400개로 증가했다. 이는 그만큼 지식의 양이 늘어났고, 각 분야별로 지식이 전문화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미국 메사츄세츠 사회경제연구소는, 2010년경이 된면 미국의 직업 종류는 약 38만 가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전망은 이제 더 이상 교육을 통한 양적인 지식공급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기에 충분한 것이다. 또한 미래학자 나이스비트가 지식정보사회에서 사람들은 일생동안 3~4번씩 직업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현재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통해서 경험하고 있다.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지식 증가 속도는 완만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똑같은 교재와 교수방법으로 교육을 할 수 있었다. 즉, 지식의 이해·암기·회상·적용이 교육의 중심이었다. 다시 말해 산업사회적인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 시대의 요구였기에 거기에 알맞은 방식으로 교육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지식의 의미는 지식이 단순히 책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학습자 스스로 학습활동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구성 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많은 학자들은 최근 정보화의 진전을 묘사하면서 스톡(stock)과 플로우(flow)의 비유를 사용한다. 쌓여 있는 정보(stock)의 개념은 정보의 양이 희소하고, 그 유통 속도가 더디며, 정보에의 접근도 어렵던 시대의 지식을 대변한다. 그러나 플로우(flow)의 개념은 엄청난 양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유통되고, 이들 대부분의 정보가 자유로운 접근을 허용하는, 더 이상 고여 있지 않는 지식 정보를 의미한다. 즉, 스톡 개념의 정보는 일정한 공간 안에 쌓여 있지만 지식정보사회에서는 정보 자체가 물적 토대로서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보에 대한 접근 가능성이 힘의 원천이며, 가치 있는 정보에 보다 빠르게 접근하고, 급변하는 문제 상황에 창조적인 대안을 갖춘 개인이나 집단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쌓여 있는 정보'의 개념이 무너지게 되면, 교육에 대한 이미지들도 함께 무너진다. 그래서 교과서에 있는 지본적인 지식을 토대로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정보를 활용, 지식을 창조하고 확장해 나가는 능력을 신장시키는 논술 교육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즉, 교과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보들을 활용해서 더 최신의 정보로 발전시키고, 훨씬 더 세밀한 정보를 창출하여 획득할 수 있는 학습자들을 키워내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분석 능력, 이해 능력, 종합 능력, 판단(비판) 능력, 창의적 사고 능력 등의 사고 능력을 지도하는 논술 교육이 정상교육으로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것이다.
지식정보사회에 바람직한 학습자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첫째, 논술 교육을 통해 충실한 기초능력을 갖추게 하여야 한다. 즉, 정보 검색과 선택능력, 정보 해독능력, 자기 생각을 지식 공유자 사회에서 적합한 용어와 논지 전개방식으로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의사소통 능력을 키워 주어야 한다. 둘째, 논술 교육을 통해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을 키워 주어야 한다. 즉, 문제를 발견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셋째, 논술 교육을 통해 원만한 인성을 갖추고 있는 인격체로 키워내야 한다.
3. 논술 교육을 통한 인성 교육
과학 기술과 정보를 중요시 하는 사회, 새로운 지식만을 가치로 인정하는 사회에서는 인문교육의 부실화로 인해 무엇이 바람직한 인간 삶의 모습인지에 대한 도덕적 딜레마를 동반할 것이 자명하다. 즉, 지식정보사회에는 여러 가지 사회 윤리적인 문제점들이 예상된다.
첫째, 가상공간에서 현실의 자아와 분리된 자신을 소유함으로 인해 기존의 가치와 인격에 커다란 혼란을 수반할 수 있다. 즉, 인터넷을 통해 다른 사회의 상이한 규범들을 빈번하게 접촉함에 따라서 모든 윤리는 상대적이라는 윤리적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과 가면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 채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욱 증가할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 사회에서와 같이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고, 객관적인 자신의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고, 주관적인 자신의 모습만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결국 여러 개의 가상적 자아가 존재하게 되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지는 윤리적 자아가 위축될 것이다. 결국 쉽게 비윤리적 행동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 지식이나 정보 전달이 초고속으로 진행됨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새로운 가치의 확산이 전 지구적으로 확대 재생산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관적 해석과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개인의 도덕성은 자칫 물질만능주의 내지는 정보만능주의 사고에 매몰되어 도구적(비인격적) 인간화가 가속화될 수도 있다. 또한 개인 정보의 오·남용, 지식정보의 조작과 날조, 정보의 상업화 및 불건전한 정보의 유통, 인터넷 중독과 정보만능주의에 의한 부작용은 우리가 윤리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파생시킬 수 있다.
인성 교육으로서 논술 교육은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줄 알고, 남을 동정할 줄 아는 사람, 남과 협동하고 타협하며, 남의 지도에 따르는 태도와 남을 지도할 수 있는 리더십,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고, 타문화를 인정하는 태도, 어려움을 이겨내는 태도, 정직, 열정, 낙관적인 태도 등 원만한 인성의 품성을 키우기 위한 교육으로 더욱 그 의미가 있다. 즉, 인격 형성에 있어서 논술 교육은 자기실현의 원조, 자율성 조장, 자기 이해의 원조를 촉진 하는 교육이다.
자기실현의 원조는 논술과정에서 수집·파악하는 자료 등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바람직한 인간상을 정립함으로써 얻어진다. 자율성은 자아의 정체성을 스스로에 대한 질문과 성찰을 통해 발견하고 정립하듯이, 여러 가지 문제 상황에 직면한 학습자가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체득하게 된다. 자기 이해의 원조는 문제 해결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한 반성적 사고와 자기 정체성에 의한 자아성찰의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며, 자기 이해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더욱 성숙한 자아의 실현이라는 과정으로 연속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습자는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논술 교육의 과정에서 자신의 주관적 가치를 일반화하는 사회적 가치로 확장하게 된다.
논술 교육은 먼저 인지적 영역에서 도덕교육에 적합하다. 즉,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이나 사실들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실제로 발생했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면서 실제적인 결과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판단할지를 연습하게 하는 도덕적 판단 교육으로 적합하다. 둘째, 정의적 영역에서 논술 교육은 학습자 자신의 도덕적 판단이나 신념을 다른 사람과 토론하고, 그 정당성을 주장함으로써 도덕적 개념을 더욱 보편적으로 확립하게 한다. 아울러 주장을 정당화 하는 논술문 작성을 통해 자기주장을 객관적으로 평가 하고(자기 점검), 논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도덕적 규범의 내면화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셋째, 행동적 영역에서 논술 교육은 논술문 작성 과정에서 규범적 사고의 확인과 자기조정력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반성적 사고를 하게 한다. 또한 학습자의 논술문을 교사는 지도·첨삭하는 과정을 통해 그 내용에 대한 인격적 보상을 한다. 특히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 등을 기술하는 글은 자신의 행동·태도를 구속하는 학습 효과가 크다. 따라서 행동적 영역의 인격적 보상은 도덕교육에 강력한 동기를 제공한다.
장건태 에플논구술연구소 책임연구원, 맥 입시전략연구소 원장, 프레시안 논술칼럼니스트, 영남사이버대학교 논술지도학과 강사, 경원대학교 사회교육원 논술지도사 강사, 유니텔 교원 직무연수 논술 과정 강사, 교육사랑 원격연수원 논술 과정 강사, 한국학원총연합회 논술강사 연수 연사 <저서>논술지도론 외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