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획 문서 중에는 평양중앙우체국에서 노획한 개인 편지 1200여 통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인민군에 입대한 동생이 중국 길림성(지린성) 집의 형에게 쓴 편지, 평남 안주 고향집의 아내가 '해방구'인 서울에 내려가 있는 남편에게 쓴 편지, 인민군 나간 아버지가 평남 용강 고향의 아들에게 '이제는 네가 오마니와 토론해 집안일을 다 해 나아가라'고 부탁한 편지도 있다. 고향을 떠나 자강도 만포의 직장에 가 있는 남편은 황해도 서흥의 고향집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몸 풀 날이 다 되었는데 안녕하신지'를 묻는다. 편지 대부분이 전쟁 직후인 10월에 쓰인 것들이다.
<프레시안>은 10월부터 기획 특집으로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되어 있는 이 노획 편지 가운데 20여 통을 골라 10회로 나누어 소개하고, 전체 노획 편지 616통의 주소록도 새로 공개한다. 편지가 쓰인지 62년이 지났고, 미 NARA 서고에서 일반에 공개된 지 이미 35년이 흘렀다. 그 모진 세월을 용케 견뎌내고 살아남아 한 번 더 '주인'을 찾아 나선 '잊혔던 편지들'이다.
필자 이흥환은 미 워싱턴의 KISON 편집위원으로, NARA의 노획 편지들을 모아 지난 4월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도서출판 삼인)라는 제목의 책을 엮었고, 책에 소개되지 않았던 편지들을 <프레시안>의 이 특집을 위해 다시 한번 가려 뽑고 주소록을 만들었다. 모두 616통이다.(☞관련 기사 : "미군 노획 인민군 편지, 62년만에 주인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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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남편이 편지를 쓰게 만든다. 집에 있는 아내에게. 남편에게 편지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그 익숙하지 않았던 편지를 전쟁은 쓰게 만들었다. 헤어져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지 물어봐야 하고, 살아 있다고 알려줘야 하기 때문에.
평남 강서군에서 남편 문태석이 평남 순천군 자산면 집의 아내한테 쓴 짤막한 글도 평소 편지쓰기가 낯설기만 했을 남편이 쓴 전쟁 편지이다. 맞춤법은 헝클어져 있고 어수선하지만, 전보 치듯 할 말만 정확하게 추려냈다. 게다가 글자 한 자 한 자를 연필로 꼭꼭 눌러 가며 돌판에 새기듯 썼다. 필체와 문장이 한 모양이다. 어떤 남편일지 눈에 선하다. 1950년 10월 11일 자이다.
내자에게
(보내는 이 : 평남 강서군 증산면 무본리 문태석 / 받는 이 : 평남 순천군 자산면 인풍리 문태석) |
아내 이름 석 자는 불러본 적 없는 남편이었지 싶다. 이런 남편들은 편지 겉봉에 아내 이름 박아넣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문태석이다. 자기 이름이다. 드문 일 아니다. 흔했다.
남편 문태석이 노부모와 처자식을 남겨둔 채 집 문을 나선 건 1950년 9월말경이다. 편지를 쓴 곳은 평양 서쪽의 강서군. 고향 순천보다 훨씬 남쪽이다. 10월6일에 북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국군 2군단이 중부 전선에서 북진하기 시작한 날이다. 북으로 쫓기면서 편지를 쓴 10월11일은, 역시 쫓기는 김일성이 인민군에게 최후의 저항을 하라고 명령을 내린 날이다. 전세가 긴박하다. 위태롭다. 하지만 이 편지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편이 지금 '내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리 많지 않다. '다시 편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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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편지도 남편이 아내에게 쓴 것이다. 하지만 앞의 편지와는 사뭇 다르다. 우선 글이 길다. 집안 사정 궁금한 게 많고, 들려주고 싶은 내 얘깃거리도 많다. 또 이 편지는 '내자'에게 보내지 않고 아내 '리경주'한테 보냈다. 아내 대하는 말씨며 분위기가 나긋나긋하다. 한동네 살던 이들의 안부까지 챙기는 사람이다.
남편 반현수는 38선을 넘고 서울을 지나 충북 충주에까지 내려갔다가 후퇴해 다시 북으로 올라왔다. 북으로 쫓겨온 경로와 경위를 꽤 세세하게 적었다. 편지 내용대로라면 반현수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어제야 겨우 평양에 도착했고, 불과 여섯 시간 전에 서평양의 상흥 파출소로 배치를 받았다. 한숨을 돌린 남편은 이제야 아내의 이름 석 자를 불러본다.
리경주 앞 기간 어린 자식을 다리고 몸은 편안하신지요. 저는 후창을 8·15에 떠나서 현재까지 신체 건강하여 있으니 그리 아시요. 그러나 당신게와(당신한테와) 강계 고산진에 수차에 걸쳐서 편지를 여러 번 하였으나 그 편지를 받아 보시지를 못하였는지 또는 받아 보고 회답한 것을 제가 밨지(받지) 못하였는지 하흥에(?) 편지 거뢰가(거래가) 없어 집에 소식을 알지 못하여 매일갗이(같이) 그리는 집에 생각할라기에 근심뿐입니다. 그러나 자강도 일대는 공습이 없다기에 안심하오나이다. 그리고 후창에 계신 숙부님과 고모님네 가정에서도 다 편안하신지요. 편지는 못 하오나 소식이나 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생활을 여하히 하고 잇음니가. 또는 식량 배급과 나의 월급을 타고 있는지요. 알고 십슴니다(싶습니다). 여하한 일이 있뜨라도 경숙이의 몸조심하여 주시기를 절시리(절실히) 부탁이요. 나는 매일갗이 보고 싶워(싶어) 사진을 보고 있음니다.
그리고 나의 소식을 말하려 함니다. 제가 후창을 8·15에 떠나 강계 와 있다가 18일 강계를 떠나서 평양에 20일 새벽 도착되었다가 밤에 떠나서 동평양 역전에서 자고 21일에 동평양 역전에서 떠나 경기도 장단군 역전에서 비행기가 5대 와서 기총사격을 하기에 차에서 내려 호무에(?) 음페(은폐)하였다가 산에 올라가서 하로(하루) 종일 있다가 밤에 내리왔음니다. 그 기차의 기관차 및 도리고은(?) 폭격으로서 파괴되고 마랐슴니다(말았습니다). 그럼으로 장단에서 야간을 리용하여 서울까지 약 1주일을 거려서(걸어서) 갔음니다. 서울 가서 또다시 하사는 전라북도, 군관은 충청북도로 가라기에 27일 밤에 떠나 9·3까지 거려서(걸어서) 충청북도에 도착되였든 것임니다. 충청북도에 가서 사업에 추미를(취미를) 어더서(얻어서) 열성적으로 하다가 인민군대는 퇴각함으로 미군의 진공함으로 9·24 오후 10시경에 출발하여 충청북도 충주에서 적한테 포이(포위)당하여 히생당할 번하고(희생당할 뻔하고) 또는 강원도 원주에서 포이(포위)당하여 시간전(시가전?)할 적에 몸만 피하여 산으로 올라 홍천군으로 하여 38선을 넘게되였다. 38선은 강원도 인제군으로 10월 3일에 넘어서 인제군에 두려가다가(들어가다가) 포이당할 번하고(포위당할 뻔하고), 다시 뛰여서 내금강-회양-안변-원산-양덕-성천-강동군으로 하여 평양에 10월 13일 오전 3시에 도착되여 내무성에 두려가서(들어가서) 다시 서평양 내무서 상흥 파출소에 가라기에 10월 14일 오후 6시에 파출소에 왔음니다. 나는 매일갗이(같이) 집에 가고 싶은 생각박게(생각밖에) 없슴니다. 후창에서 갗이(같이) 간든(갔던) 공민증계 김득호 동무는 올 적에 보지 못하고, 소방계장은 갗이(같이) 떠나 몬츰(먼저) 간는데(갔는데) 후창에 가술 줄(갔을 줄) 생각되고, 교양지도원 리송복이도 갗이(같이) 떠난는데 아직 보지 못하였음니다. 이 동무들의 가정에 문이하여 소식을 전하여 주시요. 그리고 저보다 몬저(머너) 후창을 떠난 호안(護安)계장 유도원과 교양지도원 황롱운 두 동무는 서울시 동대문 내무서에 가 있다가 이번에 38선은 무사히 너머선는데(너머섰는데) 아직은 도착치 못하였으니 2,3일이면 평양 도착될 것이오니 호안계장네 집에 전하여 주시요. 저는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은, 더욱이 다른 동무들이 자강도로 많이 배치되여 가고 또는 환자는 전부 강계로 가고 있음니다. 저도 내무성에 가지 않코 직접 강계로 가스면은(갔으면) 될런지도 모를 번하였음니다. 그럼으로 앞으로 될 수 있는 되로 노력을 다하여 강계로 가도록 하여 보겠음니다. 만약 가지 못하면은 원제나(언제나) 가게 될련지 모르겠음니다. 이상 나의 소식을 전달하면서 당신과 경숙이의 몸조심하시기를 바라면서 회답을 기다리겠음니다. *제가 오는 도중에도 우편국에 문의한 즉 전보도 치지 못한다기에 전보를 치지 못하였는데 금일에 와서는 전보를 몬 춤 치오니(?) 그리 아시요. 1950년 9월 14일 밤 12시경 평양특별시 서구역 내무서 상흥파출소 현수 (보내는 이: 평양특별시 서구역 내무서 상흥파출소 반현수 / 받는 이 : 자강도 후창군 후창면 북분리 제2반 리경주) |
편지 끄트머리의 9월 14일이라는 날짜는 10월 14일로 해야 맞을 것 같다. 전라북도로 가지 않고 충청북도로 간 것으로 보아 반현수는 인민군 장교(군관)이다. 8월 15일부터 10월 14일까지 두 달간, 자강도에서 시작해 평남북과 경기도, 강원도, 함경남도 등 8개 도를 거쳐 평양으로 돌아왔다. 적군에게 포위도 당해봤고, 겨우 산길로 몸만 빠져나와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걷고 또 걷고,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살아 돌아왔다.
인민군 장교가 겪은 두 달의 전쟁 –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국전쟁의 승리? 조국의 통일? 미제 원수 타도? 그의 대답은 이렇다. '매일같이 집에 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미군에 노획된 인민군 편지, 62년만에 주인을 찾습니다>
편지는 1950년 6.25전쟁 당시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 전역에서 미군에 노획된 것입니다. 미국은 이를 비밀문서로 분류해 놓았다가 1977년에 비밀을 해제하고 일반에 공개했는데요, 국내에는 극히 일부만 소개됐습니다. 미국 워싱턴 인터내셔널 센터(KISON) 선임 편집위원인 이흥환 씨는 2008년 11월 이 편지들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그는 "(비록 60여 년이 지났지만) 이제라도 수취인이나 발신인을 찾아 전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선별해 지난 4월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도서출판 삼인 펴냄)라는 책을 냈습니다. '도서출판 삼인' 블로그에 게시된 616통의 편지 주소를 보고 '나의 부모, 나의 형제'라고 생각되면 전화나 메일로 연락바랍니다. (도서출판 삼인 02-322-1845 / http://cafe.naver.com/saminbooks/) ☞ 배달 안 된 '노획 편지' 주소 확인하기 http://saminbooks.blog.me/140170605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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