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뉴욕~워싱턴D.C.~신시내티~시카고까지
설치작가 전수천 화백(58. 한국예술종합대학 미술원 교수)의 야심찬 계획인 미 대륙 횡단 퍼포먼스(9월13일 기사 참조)가 끝났다. 이번 전수천의 열차에 동행했던 60여 명의 일행은 23일 오후 5시반 인천공항으로 귀국했다.
이번 횡단 프로젝트의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했던 오동진 프레시안 기획위원의 취재후기를 몇 차례에 나누어 싣는다. 이번 프로젝트는 후반에 이르러 일부 언론으로부터 비판의 수준을 넘어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오 위원의 판단은 그와는 달랐다. 이번 프로젝트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초 프레시안은 이 프로젝트를 현장에서 몇 차례 중계 형식으로 소개할 예정이었으나 현지 사정상 여의치 않아 '취재 후기' 형식으로 소개하게 된 데 대해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편집자>
***뉴욕에서 시카고까지…첫 단계에서부터 '시행착오'**
9월14일 오후 1시20분. 뉴욕 맨해튼의 펜 스테이션(Penn Station)에서 워싱턴DC행 암트랙에 오르려는 순간 갑자기, 아차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뉴욕에서 LA까지 11개 도시를 경유하는 미국 대륙 횡단 프로젝트 '움직이는 선 드로잉'의 주인공은 바로 15량 기차 자체다. 그러니까 바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옆에서 카메라맨이 툴툴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알았다. "아무리 벤츠를 타고 있다 한들 벤츠를 보여줘야 할 거 아녜요?" 맞는 소리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어도 이 횡단 프로젝트를 기록하려고 하는 방송 다큐멘터리 팀은, 기차 안이 아니라 기차 밖으로 튀어 나가야 한다. 애초에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래서 기차를 타려던 바로 그 순간 발길을 돌렸다. 급하게 국산 SUV 한 대를 투입했다. 암트랙은 암트랙 길로, 우리는 하이웨이로 길을 잡았다. 달리는 기차를 따라 잡으며 방송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기 위해서였다. 그건 어쩌면, 15량의 기차에 흰 천을 씌우고 7일만에 대륙을 동서로 관통하겠다는 미술작가 전수천의 야심보다 더 큰 야심이었다. 결국 우리의 야심은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우리는 결국 단 한 컷도, 달리는 기차의 모습을 잡지 못했다. 오 맘마 미아. 필라델피아에서 잠깐 정차했던 암트랙을 뒤로 하고 내리 먼저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도심의 울창한 숲은 우리의 시야에서 암트랙을 완벽하게 떼어 놓았다. 주거니 받거니 차를 같이 몰았던 여행전문가 함길수씨(그는 대륙을 밥먹듯이 오간 인물이다)가 말했다. "진정하세요. 시카고를 지나 중서부로 가면 기차를 따라 잡을 수 있을 거에요." 맞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우리는 왜 이 길을 가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에서 워싱턴 DC까지 약 4시간 반의 노정 동안에는 여러 단상들이 떠올랐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데니스 퀘이드 주연의 영화 <투모로우>였다. 극지점의 얼음들이 녹아 무지무지하게 차가운 물로 세계가 범람하고 결국은 다시 빙하기가 찾아 온다는, 지금 생각하면 황당할 대로 황당했던 내용의 이 영화에서 미국의 신(新)빙하기는 딱 뉴욕까지만 진행되고 워싱턴DC에서 멈추도록 설정돼 있었다. 워싱턴DC로 대피했던 주인공 데니스 퀘이드는 빙하기가 진행되는 뉴욕 한가운데서 사면초가에 빠져 있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의 대피 행렬과는 역방향으로, 그러니까 뉴욕으로 길을 떠난다.
왜 할리우드의 영화란 영화는 모두 뉴욕이 붕괴되는 것으로 위기의 스펙터클을 잡아 내려고 하는 것일까. 예컨대 롤랜드 에머리히의 바보 같은 대작 <인디펜던스 데이> 같은 경우에도 외계인들의 공격은 뉴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만큼 뉴욕을 자신들의 심장부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기사 생각해 보면 알 카에다 역시 워싱턴 DC의 펜타곤보다는 뉴욕의 쌍둥이 빌딩을 1차 공격 대상으로 삼았었다.
어쨌든 영화 <투모로우>는 알고보면 재난영화도 블록버스터도 아닌 셈이었다. 그냥 소박하게, 아버지가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아들을 구하러 가는, 가족 드라마였다. 그런데 이 단순한 내용의 영화는 2004년 여름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큰 성공을 거뒀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사람들은 영화 속의 그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 이 순간,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즈에 있는 허리케인 이재민들이야말로 바로 그런 마음이 아닐까. 외신에는 <투모로우>의 스타 데니스 퀘이드가 이번엔 뉴올리언즈에서 영화를 찍다가 허리케인을 피해 긴급히 대피를 했지만 결국엔 다시 뉴올리언즈로 돌아가 이재민을 돕기 위한 각종의 자선 이벤트를 열고 있다는 소식을 내보냈다. 그렇다면 지금, 뉴올리언즈 사람들에게 있어 진짜 아버지 같은 사람은 데니스 퀘이드일 것이다. 조지 W. 부시가 아니고.
차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워싱턴DC로 달려 갔다. 영화 <투모로우>와 달리 우리는 과연 무엇을 피해 워싱턴DC로 가고 있는 것일까.
***"미국인들의 '공포'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돌이켜 보면 뉴욕에서의 짧은 하루 일정은 다소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뉴욕으로, 그러니까 미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JFK공항에서 치러야 할 입국수속 전쟁은 도착 즉시 발길을 되돌리고 싶게 만든다. 열 몇 시간의 피곤한 비행시간 끝에 사람들이 만나는 건 미국의 불친절함, 딱딱함, 모든 사람을 테러 용의자 취급하는 그 오만불손함, 그리고 모욕감이다. 9.11 테러 4주기. 테러 사태가 이들의 내면을 할퀴고 간 상처는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외부인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듯한 이들의 태도는 결국 공포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근데 그건 어쩌면 이미 숱한 할리우드 영화가 수십 년 전부터 얘기하고 또 강조해 왔던 점이었다.
1956년에 처음 만들어져 몇 차례나 리메이크돼 온, 돈 시겔 감독의 <육체 강탈자의 침입>은 외부세계의 공격에 대한 극도의 불안증후군을 보여 주는 작품이었다. 이런 류의 영화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이 2002년 경에 만들었던 <패닉 룸>이라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여주인공 조디 포스터가 딸과 함께 새로 이사 온 호화 주택에는 제 아무리 날고기는 흉악범이 들어 온다 해도 결코 침입할 수 없는 '강철방'이 존재하는데, 이사온 지 며칠 안돼 진짜로 4인조 강도가 침입하고 두 모녀는 그렇게나 안전하다는 바로 그 방으로 피신을 한다. 하지만 그 강철방, 곧 패닉 룸의 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기 시작한 모녀와 강도들은 점차로 누가 갇혀 있고 또 누가 자유스러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라고 자부해 왔던 이곳 미국이야말로 그 같은 패닉룸이 아닐까. 이 안에서, 국가안전부의 철통같은 보호 아래 살아가는 미국인들은 과연 안전한 것일까. 과연 자유로운 것일까.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뉴욕의 지하철 곳곳에는 이런 포스터가 붙어 있다. "If you see something, Say something."
***'무빙 드로잉'…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얘기할 것인가?**
지금 전수천 화백의 기차는 웨스트 버지니아 어디쯤을 한창 달리고 있다. 신시내티를 경유해 시카고까지 약 14시간이 소요된다. 아직 신시내티까지도 멀리 있다. 오늘은 길고 힘든 여정이다. 대륙 횡단 암트랙은 컴패트먼트 스타일의 객실에서부터 다이닝 룸, 소형 바, 그리고 심포지움 룸까지 비교적 다양한 기능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 사람들은 송미숙 교수(성신여대)의 사회로 시카고 대학의 예술사학자 W.J.T.미쳴 교수 등이 진행하고 있는 강론을 듣고 있다. 기차안 강의실 스크린에는 'Face of America'라는 제목이 언뜻 보인다. 중간중간 통역으로 이뤄지는 이 강의는 사실은 매우 심도깊고, 열중할 만한 내용이다.
국내외 미학 교수들은, 이번에 전수천 화백이 그려 내려는 선(線)의 의미를 얘기하고 있다. 전수천 화백은 왜 지금 이 시기에 미국 대륙에 기차를 이용한 무빙 드로잉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일까. 기차 15량에 덮어 씌운 흰 천의 의미는 무엇일까. 흰 색 천이 모든 것을 흡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전수천은 미국 대륙을 관통하며 과연 무엇을 흡수해 내고 또 무엇을 뱉어 내려고 하는 것일까.
어쩌면 전수천 화백이 꿈꾸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 추상적인 작업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미국과 우리, 세계와 우리, 우리와 우리 간의 좀 더 구체적인 소통을 이루려는 것이 아닐까. 이번 작업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적어도 미국이란 나라가 우리에게 갖는 의미를 다시 한번 반추하게 된다면, 전 화백의 이번 작업은 그것만으로라도 작은 성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기차는 내일 새벽 1시쯤 시카고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 눈을 붙인 후 일리노이 주의 세인트 루이스를 향해 다시 내달리기 시작할 것이다.우리는 점점 더 미국의 심장부에 다가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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