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애일당(愛日堂) (1)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애일당(愛日堂) (1)

[박덕규의 '소설 사명대사'] <1>

'소설 사명대사'를 쓰면서

나는 자라면서 서너 차례 해인사에 들렀던 것 같다. 그때마다 총탄에 맞은 흔적이 완연한 사명대사의 비 앞에서 잠시 머물곤 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공을 기리는 그 비를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경찰이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총을 쏘아 깨뜨리려 했는데 끝내 깨뜨려지지 않았다는 얘기에 나는 감동했다.(실제로 그 비는 1943년 일본인 합천경찰서장인 다케우라[竹浦]가 네 조각으로 깨뜨린 것을 1958년에 다시 모아 세운 거라 한다. 비석에 열 십자(十字) 모양으로 깨진 흔적이 남아 있다. 비문은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문장가 허균이 지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도 그런 이야기가 스미어 있는 유적 앞에 서면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곤 했다. 동화로 만화로 영화로 사명대사 얘기를 접하면서 나 나름대로 '사명대사의 스토리텔링화'를 실험하며 성장했다.

사명대사는 1544년(중종 39년) 밀양에서 태어나 자라다 10대 중반에 직지사로 출가해 1610년(광해군 3년) 열반할 때까지 승려로 산 분이다. 알려진 대로 서산대사의 법통을 이어 조선 불가를 이끌 수 있는 분이었는데, 1592년(선조 25년) 왜란을 만나면서 임금과 서산대사의 명을 받들어 승병 지휘자가 되어 참혹한 전란에서 왜군을 치고 나라를 지키는 공을 세웠다. 그러고도 모자라 왜란 직후 임금의 명으로 대마도를 거쳐 교토로 가서 일본 정세를 탐색하고 피로인 3천명을 쇄환하게 했으니 그때 나이가 예순둘이었다. 조선은 말할 것도 없이 불교를 억압해 온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국난을 이긴 공과 외교에서 쌓은 업적이 그 누구 이상이었다. 그러고도 승려로서 또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성취가 어떻게 이렇게 다방면으로 높을 수 있을까?

'바다에서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사명대사'라는 말이 널리 떠돌 정도이지만, 막상 사명대사의 업적은 이순신 장군에 비해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사명대사가 승려였던 때문이다. 사명대사를 모시고 있는 밀양 표충사를 여러 차례 나들이하고 '사명대사기념사업회' 같은 곳을 통해 자료를 얻고 하면서 내가 읽고 생각해야 할 것이 자꾸자꾸 늘어났다. 사명대사라는 개인을 입체화해 보면 해 볼수록 나는 그를 그렇게 살도록 만든 환경이 궁금해졌다. 왜냐하면, 나는 실은 역사를 생각하는 다른 작가들이 그렇듯이 '그가 어떻게 살았던가'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사명대사로부터 촉발된 내 관심은, '그의 삶은 결국 우리 역사와 어떤 관련을 맺는가'로 향해 갔다.



▲ 사명대사

이 소설은 왜란이 종결된 지 5년도 더 지난 1604년(선조 38년) 사명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일본으로 건너가 돌아오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1592년 발발해 6년을 꼬박 이어진 왜란은 그때 그 사건으로 마감된 것이 아니다. 아시다시피 그로부터 300년 뒤, 한국은 일본에 강제 합병되었다. 이제, 그리고 앞으로도 또한, 일본에 그와 같은 유형의 역사적 희망이 내재해 있지 않다고 장담할 사람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명대사의 방일(訪日)은, 그렇게 이어져온 역사를 우리가 지금 여기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3년 전부터 '소설 사명대사'를 집필하겠다고 마음먹었던 나는 이 문제 앞에서 내내 힘겨워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정치외교사만을 지향할 리는 없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 그 활약상에 비해 그것을 공인하는 사료들이 크게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역사소설 쓰는 사람에게는 오기를 발동시키기도 하는 법이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이야기, 또한 그로부터 빚어지는 다양한 감정들이 소설의 재미이기도 할 뿐 아니라 나아가 소설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니, 사료와 사료 사이에 이어지지 않는 행간들을 그 시대를 힘겹게 살아낸 유무명의 실존인물과, 또한 함께 살아냈을 법한 여러 가공의 인물들로 채워 넣었다. 연애 얘기도 몇 겹 넣었고, 내가 즐겨온 추리기법도 동원했다. 힘에 부칠 때는, 그때 바다를 건너가 일본 난세의 영웅 덕천가강에 맞선 사명대사의 힘을 빌려볼 작정이다.


- 2008년 1월 23일 박덕규

애일당(愛日堂) - (1)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는 듯하더니 이어 두은이가 사립문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실은 그런 소리들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할 만큼 허균은 묵은 지필묵 향에 빠져 있었다. 밤이 이슥해지면서, 방문 밖에서 두은이가 여러 차례 발걸음 소리를 내며 그림자를 내비친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였다. 밤참이라도 들이려는 거였는데 방안에서는 쌕쌕거리는 숨소리와 한지 들썩거리는 소리만 났다. 도성에서 금강산으로 발길을 옮겼다가 석달 만에 강릉 애일당에 들어선 뒤로 서책이며 잡기장을 뒤적거리며 일일이 새 종이로 옮겨 쓰는 일만 벌써 한 달여였다. 허균이 그렇게 허기진 듯이 글을 파고 들 때면 마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산천을 떠도는 굶주린 짐승 같은 몰골이 된다는 걸 두은이는 잘 알았다.

"저기, 영감마님......"

이번에는 사립문 밖에 누가 온 줄을 느낀 터라 허균은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이 밤에 무슨 일인가?"

두은이 머뭇거리는 기색에서 심상찮음은 느낀 허균은 쑤시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육례원에서 왔다는 사람들인데요."

"육례원? 한양에서 말인가?"

육례원은 도성 안 육조 거리 근방에 있는 기방이었다.

"예, 아낙 하나하고, 또 남정네가 둘입니다."

"아낙?"

알 법한 여자라는 뜻이 두은이 음색에 섞였다. 허균은 뒤로 돌아서 방안을 향했다. 방안에는 과연 자신이 그랬나 싶게 서책과 문방사우들이 마구 어질러져 있었다. 두은이 잠시 멀어지는가 했더니 다시 기척을 냈다.

"건넌방에서 맞으시도록 할까요?"

방에서 아무것도 손대지 못하게 한 허균은 뒷간으로 갔다 오는 길에 말끔히 세수를 했다. 살이 얼얼하게 물이 찼다. 육례원이라는 말을 듣고부터 돌연 코끝에 감도는 분내를 애써 외면해 보는 중이었다.

애일당은 원래 허균의 외할아버지 김광철이 지은 집이었다.

허균은 자주 그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머물렀다. 날마다 어머니를 모실 수 있는 기쁨을 주는 집이라 해서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을 붙였다. 애일당 뒷산 이름이 교산(蛟山)이라 호마저도 교산으로 지었다.

허균이 애일당에 와 있는 동안에 여러 벗들이 놀러 오곤 했다. 애일당에 들른 명나라 사신 오희맹이 글씨를 써 주어 현판을 걸게 되자, 애일당은 그 강릉 일대의 명소가 되었다. 역시 명에서 온 사신 공용경이 애일당을 위해 지은 시도 알려졌다. 물론 이제는 모두 지난 일이 되었다.

허균은 왜란 때 어머니와 만삭의 아내와 함께 강릉을 거쳐 함경도로 피난을 갔다. 아내가 피난길에 아이를 낳고 병을 얻어 죽자, 아이마저 젖을 먹지 못해 죽고 말았다. 강릉으로 다시 돌아와 보니 애일당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허균은 그걸 고쳐서 옛 풍치를 되살렸지만, 함께 모시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그 뒤로는 주로 도성에 가 살다가 어쩌다 한번씩 강릉에 들를 때만 애일당을 찾았다. 이번에 와서는 외가 사촌들과 반곡서원(盤谷書院)을 찾아 한담하는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이다시피 애일당에 틀어박혀 지냈다.

허균이 의관을 정제하고 마당으로 내려서자, 몰고 온 나귀 두 마리를 싸리울 안으로 들이고 있던 더벅머리 총각이 벌떡 일어나 허균을 향해 허리를 꺾었다. 육례원에서 불목하니로 지내는 홍탁이라는 아이였지만 허균은 그 이름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두은이가 들고 선 관솔불 아래 비친 얼굴이 낯이 익다는 사실에 허균은 왠지 마음이 놓였다. 게다가 댓돌 위에 새끼로 감발을 친 자그마한 미투리 두 켤레가 놓인 걸 보고는 창자 깊은 데서 이는 설렘을 더는 누르기 어려워졌다.

"행수 어른이 워낙 서둘러서 날을 다투어 이리 달려왔습니다."

역시 춘섬이었다. 매운 바람과 눈밭을 헤치고 오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춘섬의 얼굴 위로 호롱불 불빛이 어른대는 게 영 가슴을 짠하게 했다. 대신, 뜻밖으로 춘섬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자그마한 남정네 때문에 허균은 아연 긴장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허균이 두은에게 더운 꿀물을 청하고 좌정하자 춘섬도 앉았으나 사내는 그대로 서 있었다.

"행수 어른이 서찰을 쓰려다 그 시간도 아깝다 하면서 저희를 함께 보냈습니다. 나으리께서 크게 힘을 써주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허허! 너희 행수가 뒷줄이 단단한 걸 안다만 삭탈관직되고 낙향해 있는 나를 움직일 생각을 하다니!"

허균의 짐짓 노기를 띠어 보이는 얼굴을 춘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 말씀을 잘 들어보시면 저희 행수가 어째서 그러는지 아실 것이옵니다. 제가 이리로 떠나기 전날 저희 집에 비변사에 계시는 나으리들 몇이 오셨습니다. 그 사람들 말이, 나랏님께서 곧 왜인들이 우리나라에 출입할 수 있게 명하실 거라고 했습니다."

"허허, 그래? 그걸 알리러 이 설한에 나한테 왔더란 말이냐?"

허균은 놀라기에 앞서 잠깐 실소가 터져 나올 뻔했다. 잠자다가도 춘정이 동하면 꼭 떠올려지는 어린 기생 춘섬이 늦겨울 추위를 헤치고 몇 날 며칠을 달려와 한다는 말이 왜인들이 나라에 출입하게 되었다는 사연이었다.

난을 일으켜 쳐들어온 왜에 대한 징벌이 상륙 금지였다. 그렇게 되니 다시 바다가 시끄러웠다. 특히 대마도가 문제인 모양이었다. 왜의 본토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는 대마도가 기댈 데라고는 조선밖에 없었다. 대마도주가 문호를 다시 예전처럼 개방해 달라는 요청을 해온 일이 벌써 수 차례라는 것까지는 허균도 잘 알았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뜬금없이 천릿길을 걸어온 춘섬이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허균의 황당스러움을 읽은 춘섬이 여태 뒤에 서 있는 사내를 소개했다.

"나으리, 언니를 기억하시지요?"

"아, 너는!"

(이 소설은 매주 월, 수, 금 연재됩니다)

필자 소개

▲ ⓒ김기훈

1958년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0년 <시운동> 동인지 창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입상으로 평론가 활동을 아울러 시작했다. 1994년 계간 문예지 <상상>에 단편소설을 발표, 소설가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주요 저서


소설집 <날아라 거북이!>(민음사, 1996), <함께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웅진출판, 1998), <포구에서 온 편지>(문이당, 2001)
장편소설 <시인들이 살았던 집>(현대문학사, 1997), <밥과 사랑>(해토, 2004)
동화 <옥수수 탐정>(명예의전당, 2004), <쉿! 쪽지를 조심해>(청어람주니어, 2007)
소설창작법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소설쓰기>(랜덤하우스, 2008)
편저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중국역사 이야기>(전14권. 일송북, 2005~2006) 외 다수


<이 소설을 무단으로 다른 사이트로 옮겨 가는 것은 저작권법에 저촉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