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설치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준호씨는, 전수천 화백과 함께 이번 프로젝트의 실무를 총괄한 인물이다. 15량의 열차에 흰 천을 씌우는 작업도 이씨가 진두지휘했다. 그 작업은 출발역인 뉴욕이 아니라 중간 기착점인 세인트루이스 역에서 진행됐다. 8월의 땡볕 한가운데에서였다. 하루에 기차 두 칸씩, 꼬박 1주일이 걸렸다고 한다.
***암트랙, 그 최악의 교통수단을 이용하다**
이준호는 처음엔 기차에 흰 천을 씌우기 위해 뉴욕에서 세인트루이스로 갔고, 흰 천을 다 씌우고 나서는 기차를 가지고 세인트루이스에서 다시 뉴욕으로 왔으며, 이번엔 다시 흰 천을 씌운 기차를 타고 뉴욕에서 워싱턴DC, 신시내티와 시카고를 거쳐 다시 세인트루이스로 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동부지역을 계속 왔다갔다 하고 있는 셈이다.
비교적 오랜 미국생활에다 이번 경험까지 덧붙여져서일까. 이준호는 미국에서의 이동수단으로서 이 암트랙이야말로 정말로 정말로 최악이라고 말했다. 그럼! 고속버스는 어때? 그레이하운드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제 시간에 맞춰 가려는 생각이라면 고속버스든 암트랙이든 절대 선택해서는 안될 대중교통수단이라는 것이다. 서너 시간이 늦는 건 밥 먹는 일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건 미국기차예요, 미국기차!" 아 그렇군. 암트랙이 최근 급격한 경영난으로 곧 문을 닫게 될 것이라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군.
어쨌든 이준호의 말은 적중해 워싱턴DC에서 시카고로 가는 프로젝트 이틀째의 여정은 당초 예정으로 잡았던 14시간보다 9시간이나 지체돼 결국 기차 안에서 하루밤을 꼬박 새우게 만들었으니까.
***'거대한 사기극'? '새로운 시대인식의 틀'?**
시카고 중앙역을 향해 기차가 힘겹게 힘겹게 다가서고 있던 그 순간, 지루한 밤의 여정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기차 안에 동승한 사람들은 한마디로 비빔밥 구성이었다. 개인당 600만 원씩, 도합 1200만 원을 지불하고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한 부부 관광객부터 이번 프로젝트의 주요 후원자인 광복60주년기업사업단, 삼성문화재단 관계자들과 미 대륙횡단의 행정적 지원을 맡은 뉴욕문화원 관계자들, 6개 중앙일간지 미술담당 기자들, 이번 프로젝트에서 기차안 내부 행사를 담당할 초청인사들(소설가 신경숙, 뮤지션 노영심, 풍수학자 조용헌, 건축가 황두진, 사진평론가 진동선 등)과 KBS제작팀에다 다큐멘터리 제작팀, 그리고 여행사 관계자들까지 기차 안은 마치 각종 직업과 직책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사진작가 배병우나 한국화가 김호득, 벽돌화가 김강용처럼 동료 아티스트들 역시 한 구석에서 조용히 이번 프로젝트의 진행 양상을 관찰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참가한 만큼, 이번 프로젝트를 바라보는 시각도 당연히 각양각색이었다. 각자가 기차에 동승하게 된 과정, 계기, 목적도 다 다른 셈이다. 무엇보다 길고 지루한 기차 여정을 견디는 내성이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언제 어디서나 생각을 같이 하게 하고 의견을 한 데 모으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기차 안은 점차 아수라장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광복60주년 기념사업단의 제작후원금 3억 원이 투여된 만큼 이번 프로젝트는 사실상 국민혈세로 진행되는 것인데 국민세금이 한 작가의 예술적 야심에 동원되는 것은 낭비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광복60주년 기념사업의 목적성이 이번 프로젝트에 올바로 반영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얘기도 나왔고, 그렇다면 기념사업단 관계자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는 것이었으며, 무엇보다 대륙횡단이라는 거창한 주제와는 달리 왜 미국 현지 언론으로부터는 포커스를 받지 못하느냐는 소리도 나왔다. 대부분의 지적은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한 프레스로부터 제기된 것이었다. 급기야 이번 프로젝트는 자칫 거대한 사기극이 될 수 있다는 얘기까지 흘러 나왔다.
하지만 대다수의 참가자들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건축가 황두진이나 한국화가 김호득, 사진작가 배병우 등은 꼬박 밤을 새야만 했던 시카고행을 비롯해서 세인트루이스에서 가든시티, 앨버쿼키에 이르는 지긋지긋한 중서부 기차여행을 참아내며 묵묵히 이번 프로젝트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3억 원의 혈세 논란이나 현지 언론의 관심 부분은 사실 이번 프로젝트의 주목적이 아니다. 이번 프로젝트가 바깥에서 안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면 그런 지적이 타당할 수 있다고 이들은 얘기했다. 전수천이라는 화가를, 흰 천을 씌운 이상한 기차를,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리는 일이었다면 그 같은 지적은 일면 옳을 수가 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그것과는 반대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더 맞는 것이 될 수 있다. 전수천이나 전수천이 만든 암트랙이나 한국이라는 나라보다는 그 모든 걸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이라는 문화와, 미국이라는 국가적 권력을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를 얘기하자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실체적 진실이다.
따라서 미국 언론이 이번 프로젝트에 얼마나 관심을 가질 것인가에 연연하지 말고 한국에 남아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번 프로젝트에 얼마나 관심을 갖게 할 것인가에 주력했어야 옳은 것이다. 관점을 역으로 돌리면, 비록 그것이 한 작가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 한들, 국민혈세 3억 원이 낭비되는 것이라고 비난할 수 없는 노릇이 된다. 시대인식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내는 작업을 돈으로 계산하는 것만큼 짧은 생각은 없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모아 '새로운 그림'을 그리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실체일 수 있다.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들, 백그라운드가 전혀 다른 사람들을 모아 아웅다웅, 티격태격, 시시비비를 가려 가며 하나의 생각과 하나의 가치체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단순하게 미국 지도를 놓고 드로잉 작업를 하는 것을 넘어서서 실제로 우리 내면 한가운데에 뭔가의 새로운 그림을 그려 나가는 예술행위일 수 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치경제 체제, 사회구성의 밑그림이 발견될 수 있다. 기차 안 격론과 갈등, 분쟁 그 자체가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진통일 수 있다. 진통은 늘 혼란을 수반하는 법이다.
전수천의 열차는 비바람에 때가 묻기 시작한지 오래다. 흰 천은 곳곳에 찢기고 더러워져 흉한 몰골로 변해 버렸다. 기차 안의 사람들 마음도 여기저기 찢기고 때가 묻기 시작한 지 오래다. 기차는 일리노이와 미주리, 캔사스 주를 거쳐 앨버쿼키를 향해, 미국의 서부를 향해 힘겹게 힘겹게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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