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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가 먹은 것은 정말로 '독사과'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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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가 먹은 것은 정말로 '독사과'였나?

[프레시안 books] 김사과의 <나b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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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의 '청소년 소설'이 나왔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고 당신은 그냥 넘겨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 문장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신간 정보가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하여 순간 멈칫, 잠시 당혹, 잠깐 끄덕. 그리고 꽤 오래 뭔지 모를 불편함에 시달리며 몇 주를 보내고 말았다. '김사과'와 '청소년 소설'. 이 둘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나 쉽게 결정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김사과가 동화를 썼다고 하면 나는 덜 난감했을 것이다. 내가 김사과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를 걸었던 것일까, 혹은 청소년 소설에 대해 너무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청소년 소설'이라는 레테르를 떼고 읽었다면, 나는 별 저항 없이 <나b책>(창비 펴냄)을 읽었을 것이다. 강도가 좀 약해졌고, 이미 발표했던 단편('동생', <실천문학> 2009년 여름호)을 다소 수정해 장편의 한 장으로 만들어놓긴 했지만, 이건 분명 김사과 소설이니까. 하지만 이 불편함은 뭔가. 김사과 소설은 원래 매우 불편한 소설이다. 하지만 이건 다른 불편함이다. 말하자면 나는 김사과에게 어떤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이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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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에 대한 내 신뢰를 단번에 철회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청소년 소설'에 대한 내 시각을 교정해보고자 노력했다.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청소년 소설'에 대한 그간의 논의를 구할 수 있는 대로 읽어보았고 독자와 평자 모두에게 꽤 좋은 반응들을 얻었던 몇몇 작품들도 찾아 읽었다. 다행히, 내 시각은 꽤 '교정'되었다.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지만 훨씬 유연해진 것은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매우 진지하고 열정적인 자세로 청소년 소설을 창작하고 연구하고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고맙고 미안하고 반가웠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도 나는 '청소년 소설'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었다. 한때는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 아이들을 위한 독서 교재 만드는 일을 한 적도 있다. 수 년 전이어서겠지만, 대상 도서를 선정하기가 정말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의 정서와 눈높이, 관심사에 맞는 책은 막상 별로 없는데, 일종의 '19금'들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이들에게 무슨 책이라도 권하기 위해서는 먼저 학부모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므로, 구체적으로 입시에 도움이 되거나 최소한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어떤 교훈성이라도 띄고 있어야 한다. 그러다보면 결국 천편일률, 동서양의 고전이나 교과서에 소개된 작품 위주로 도서를 선정할 수밖에 없다. 국내 청소년 소설들이 활발하게 창작되기 시작할 무렵 나는 그 일을 그만두었지만, 누구보다 청소년 소설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하여 그러한 작품들이 반가웠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현실적인 필요에 의한 요청이고 환영이었을 뿐, 일명 '청소년 소설'의 등장이 문제의 본질을 해결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것은 금기를 뛰어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안전하게 제도 안으로 편입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소재에 대한 제한은 이제 많이 사라진 듯하지만, '청소년 소설'이 여전히 성장과 화해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학은 제도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그 제도를 넘어섬으로써 제 가치를 드러내는 것인데, 대부분의 '청소년 소설'은 그 태생부터가 (청소년들 속에 내재한) 위반의 욕망이 아니라 (어른들의) 체제 내적 요구로 시작된 것이다. (2006년 12월 <창비 어린이>에 실린 청소년들의 좌담 "청소년이 보는 청소년 문학"은 청소년 문학이 청소년들의 자발적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러한 요구가 아무리 선의에 의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여기에는 본질적으로 청소년을 훈육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내재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소설의 표면에 그 어떤 반항아가 등장하든 간에 결국 이면에는, 이른바 성장을 내세운, 체제와의 어떤 타협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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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b책>(김사과 지음, 창비 펴냄). ⓒ창비
더구나 '청소년 소설'이라는 이름에는, 청소년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왠지 청소년을 그 안에 가두어두고자 하는 어른들의 욕망이 들어있는 것만 같다. 말하자면 일종의 '청소년용' 소설이라는 것. 물론 그것은 단순히 출판사의 판매 전략이거나 편의적인 명칭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편의적이고 상업적인 발상인가.) 그러나 이름은 상징계의 기호다. 그것은 차이 체계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것이므로 언제나 선택과 배제를 포함한다. 청소년용, 그것은 성인용이나 아동용과의 구분에 의해서만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며, 하여 청소년용이 붙지 않은 것은 성인용이라는 인식을 불러온다. '청소년 소설'에 대한 범주 설정은 '청소년 소설'의 범주만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의 것, 즉 성인 소설의 범주까지 설정해버리는 것이다. 덕분에, 소설인데 아동 소설도 청소년 소설도 아니라면 다 성인 소설이 될 판이다. 아니면 좀 더 친절하게 '15세 독서가'나 '전체 독서가' 따위의 안내 문구라도 달아줘야 하는 것일까. (참, 그런데 이것은 일종의 검열 아닌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금기는 욕망을 부추기는 법이다. 어른을 향한 금기는 아니니 어른들이 청소년 소설을 욕망할 리는 없고(솔직히, 김사과의 소설이 아니었으면 나는 '청소년 소설'로 분류되어 있는 <나b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특히나 '청소년 소설' 너머를 욕망할 가능성이 크다(그렇다고 지금까지 소설을 읽지 않던 아이들이 갑자기 소설을 많이 읽게 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의도와는 달리, 성인과 청소년 양자 모두에게 외면을 받을 가능성이 농후한 명칭이라는 것이다(좀 더 어린 애들이 읽고 싶어 할 수는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계가 '청소년 소설'이라는 레테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독서 주체인 청소년이 아니라 학부모나 선생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이것은 원론적인 이야기일 뿐 구체적인 검증을 거친 것도, 개별 작품 각각에 대한 평가도 아니다. 태생이야 어떻든 간에, 지금도 끊임없이 그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으리라는 것을 나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청소년기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것과 청소년의 영역을 제한하는 것은 다르다. 아이들의 정서와 관심에 부응하는 책이 많이 창작되고 있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사실이지만, 그것이 나이에 따른 명시적인 위계 구분으로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청소년이 적극적인 독서 주체가 될 수 없었던 것이 입시 위주의 교육 제도와 성공만이 강조되는 우리사회의 척박한 풍토에서 기인한 것인지 정말 읽을 만한 작품이 없어서 그랬던 것인지도 의문이거니와, 후자의 경우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독서 대중을 고려한 작품의 다변화와 금기를 넘어서려는 지속적인 실천이 아니었을까.

출판사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창작 계층의 지속적인 확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청소년 소설'에서 작품의 획일성이 더욱 많이 지적되고 있는 것을 보면 외양의 화려함과는 달리 우리의 실천은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규정이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일종의 금기로 작동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독자 대상으로서의 청소년이라는 틀을 재고하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청소년 '문학'의 상은 보다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소영현, '청소년 문학이 질문해야 할 것들', <작가세계> 2010년 봄호, 347쪽)이라는 한 평론가의 제언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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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사과가 바로 이 '청소년 소설'이라는 명패를 단 장편 소설을 출간한 것이다. 등단작 '영이'로부터 장편소설 <미나>(창비 펴냄)에 이르기까지 김사과가 꾸준하게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을 발표해 왔다는 것, 상징계에 모범적으로 자리 잡은 어른들의 규범적인 문체 대신 아이들의 직설적인 화법과 분열증자의 강박적인 언어를 즐겨 쓴다는 점, 기성세대의 가치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고자 하는 욕망이 모든 작품에서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 하여 누구보다 강렬한 '앵그리 영 맨'의 대표주자로 자주 호명되고 있다는 점 등을 떠올려보면 이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의 폭주하는 소설들은 체제 속에 속박된 청소년들의 분노와 불안을 그 어떤 소설보다 잘 드러내고 있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거부함으로써 소설적 진실에 한 발 더 다가선다. '청소년 소설'을 표방하며 발표된 작품이 아님에도, '청소년 소설'을 논하는 글들에서 기존의 '청소년 소설'들보다 <미나>를 상찬하는 내용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김사과의 이러한 행보를 예견하게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그는 충분히, '청소년 소설' 관계자로부터 러브콜을 받을 만했다. 그리고 그는 응했다. 실존에 대한 고민이 언제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했고, 어른들로부터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듯 굴었던 그가 말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굳이 이러한 과정을 가정까지 해가면서 구질구질 뇌까리고 있는 것은, '저항'이 얼마나 손쉽게 '상품'이 될 수 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처음에 내가 느낀 배신감은 아마도 그러한 혐의에서 기인하였을 테지만, 어쩌면 이건 너무 단순한 논리일 지도 모르겠다. 외부를 내부로 포섭하고자 하는 욕망에는 내부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러니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러나 경계를 그어놓고 그 경계를 이리저리 넓혀가는 방식으로는 결코 경계가 가진 한계를 없애지 못한다. 내부로 포섭된 외부가 내부에 일정 부분 균열을 가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내부를 더욱 공고하게 해주는 방식으로 '내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이름표를 다는 순간, 기존 작가들의 작품들도 청소년 소설의 틀에 어느 정도는 갇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소년 소설'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이미 검증된 기존의 작가들을 청소년 소설계로 영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청소년 소설' 그 자체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내부에서부터 먼저 틀을 깨는 방식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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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의혹으로 이 글을 시작했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이 글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러나 아마 이 글에는 어떤 균열과 부조화가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나b책>을 그냥 '김사과 소설'이 아니라 김사과의 '청소년 소설'로 읽고 있으며, 그 안에서 <나b책>이 거둔 성취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사과가 무슨 마음으로 '청소년 문학' 시리즈에 발을 들여놓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청소년 소설'의 관습적인 서사에 길들여지는 대신 그러한 관습에 대한 하나의 질문으로서 <나b책>을 제출했다. 내부에 균열을 일으키는 외부. 아마도 그것이 김사과에게 요청된 역할이었을 것이고 그는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딜레마이다.

앞서 나는 이러한 '외부'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내부화될 외부에 불과하니 외부의 개입은 그 무엇도 필요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현실을 너무 무시한 발언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사안의 본질을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데 있는 것이지 외부의 개입이라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닐지라도,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어쩌면 시행착오라도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그런데 혹시 김사과는 처음부터 스스로를 외부가 아닌 내부에 위치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그런 작위적인 경계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나. 그렇다면 이 글은 처음부터 다시 쓰여야겠지만, 스스로를 완강히 그 경계 밖에 둠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경계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은 그러니까 실은 나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김사과는 한 번도 자신을, 그리고 자기 소설의 인물들을 자본주의에서 자유로운 인물로 그렸던 적이 없다. 체제에 대한 비판은 언제나 그 체제에 너무나도 깊이 길들여진 스스로에 대한 비판 의식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그 체제를 벗어나는 것은 때로 죽음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 역시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그는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쳤으며 그 제도 안에서 글쓰기를 하고 있는 작가다. 말하자면 그는 체제와 제도 바깥에서 그 모든 것들을 한껏 조롱하며 무중력의 자유를 누리는 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실천과 저항이 의미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는 제도 바깥이 아니라 제도 안에 있으면서 제도 안의 글쓰기에 갇히지 않았고 체제 안에서 살아가면서 그 체제에 대한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회피하고 떠나는 방식이 아니라, 들어가서 싸우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 싸움의 방식은 '비평하기'가 아니라 '소설 쓰기'다. 바깥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서 내파(內破)시키기. 말하자면 '청소년 소설'과 관련된 김사과의 행보는 타락이나 타협이 아니라 그의 일관된 방법론에 의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사과의 '청소년 소설' 발간 소식을 듣고 내가 느낀 불편함이란, 내 안의 진실과 마주하기 싫었던 나의 또 다른 자아가 표출한 심리적 저항이었을까.

작품 바깥에서 너무 오래 방황하느라 막상 <나b책>의 핵심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주어진 지면을 너무 많이 할애해버렸다. 김사과가 어떻게 '청소년 소설'을 내파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성취를 거두었으며 어떤 숙제를 남겨놓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겠다. 다만 내가 이 소설에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랑'과 'b'라는 두 여중생보다 오히려 '책'이라는 인물(김사과의 소설에는 어른이 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데 이 인물은 꽤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어른이다. 물론 '어른 같지 않은' 어른이라는 유보 사항이 붙긴 하지만)과 이 소설의 결말 구조가 갖는 의미에 대한 것이라는 점 정도만 언급해 두자. 나는 바흐친의 논의를 빌려 장편 소설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를 일종의 대화성이라고 썼던 적이 있는데, 김사과 소설의 분열 주체들은 그러한 대화성을 거의 드러내지 못하는 데도 불구하고 나는 왜 김사과 소설을 미숙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도 아마 거기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글은 여기서 그냥 끝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무엇이 문제겠는가. 그것은 당신도 충분히 밝힐 수 있는 것들이다. 이 글의 제목은 그런 당신을 위한 산책용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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