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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나라' 한국, 이제 전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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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나라' 한국, 이제 전쟁이 필요하다!

[이형준의 '주경야독'] 신재식·김윤성·장대익의 <종교 전쟁>

'과학지식'이라면, 나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과학이 좁게는 자연과학을 의미해서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자연과학(수학, 화학, 물리학 등) 과목은 다 싫어했다. 내가 '문과'를 택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도통 알 수없는 숫자와 기호의 연속. 과학 과목은 낯설었고, 수학과는 중학교 때부터 담을 쌓은 사이였다.

더구나 교회를 다니며 직분(주일학교 교사)을 맡고 있던 내게, 과학지식은 머나먼 별나라 이야기였다. 하지만 얼마 전 <다윈의 식탁>(장대익 지음, 김영사 펴냄)에서 시작된 과학서적 읽기는 내 지적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 과학은 가닿을 수 없는 먼 나라 얘기가 아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이다. "창조 과학"(진화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을 믿는 종교단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단체명은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이하 교진추)'. 이 단체는 '시조새'와 '말'의 진화 과정을 문제삼아 청원을 냈고, 교육과학기술부와 교과서 집필진이 해당 내용을 검증 절차 없이 수정·삭제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이 세계적인 과학 저널 <네이처>에 "한국이 창조론자들의 요구에 항복했다"라는 제목으로 실렸으니, 주류 학술학회(한국고생물학회, 한국진화학회추진위원회)가 발끈한 것은 당연했다. 학회는 교진추가 제기한 내용인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 종이 아니다"와 "말의 진화는 상상의 산물"이라는 청원은 잘못된 근거와 왜곡에 기반하고 있다며 일전불사할 태세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사건은 교과부가 '과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을 수렴해 삭제 여부를 결정하기로 밝히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진화론의 오류가 밝혀진다면 진화론은 과학 교과서에서 삭제되어야 한다"고 말한 교진추 회장의 인터뷰는 주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우리나라에서 "종교 전쟁"의 서막이 오른 걸까?

알다시피 과학과 종교의 갈등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과학과 종교 간에 벌어진 최초의 주목할 만한 갈등은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인가 태양인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기원후 130년 무렵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창한 이래, 천동설은 중세가 지나도록 보편타당한 진리였다.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말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는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전하면서 일 년에 한 번 태양둘레를 공전한다고 주장했다. 성직자 신분으로 조심스러웠던 코페르니쿠스와는 달리, 갈릴레오의 "대담한 도전"은 가톨릭 교회(구교)의 반감을 사게 된다. 신교도 마찬가지였다. 칼뱅은 성서의 시편구절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는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한다. (…) 누가 감히 코페르니쿠스의 권위를 성령의 권위 위에 놓을텐가?"(<종교와 과학>, 버트런드 러셀 지음, 김이선 옮김, 동녘 펴냄)

서슬 퍼렇던 종교권력 앞에서 용감한 선지자로 나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생명의 가치는 대체로 진리를 향한 용기보다 앞섰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책을 교황에게 헌정했고, 갈릴레오는 자기주장을 철회했으며, 갈릴레오 재판소식을 들은 데카르트는 네덜란드로 도망쳤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런 행동을 했을까. 당대 최고지성들을 폄하 하자는 게 아니다. 종교는 과학에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케플러를 거쳐 혜성, 행성 그리고 중력법칙을 만족스럽게 설명한 뉴턴에 이르러서야 종교계는 한 발짝 물러선다. 코페르니쿠스체계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과학이 하늘에서 지구와 인간의 영역으로 세력을 넓히자, 과학자들은 천문학에 맞먹는 종교적 편견과 다시금 맞닥뜨린다. 1859년 발표된 찰스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송철용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때문이다.

이 책은 요컨대 자연 생물개체들 간에는 변이가 존재하고, 어떤 변이는 유전하게 되며,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형질을 띤 개체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게 된다는 것, 말하자면 생존과 번식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의 본질이라는 주장을 편다. 뭇 생명체들이 종의 벽을 넘어 다양하게 진화해온 사실은 화석의 발견, 그리고 고생물학과 동물학의 발전으로 이미 증명된 바다. 구약성서에 있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해보자.

노아와 그의 아내, 그리고 세 아들과 세상 모든 동물들은 '노아의 방주'를 타고 대홍수 재난에서 살아남았다. 승선 티켓을 구하지 못한 동물들은 예외 없이 익사 했으리라. 다시 말해 아라라트 산(터키 동부에 있는 노아방주의 도착지)에 이르지 못한 동물들은, 이젠 세상에 없어야 하는 피조물인 셈이다.

그런데 "난관은 신대륙 발견과 더불어 발생했다. 아메리카 대륙은 아라라트 산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곳에는 양 지점의 중간에서 발견되지 않은 많은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었던 것이다."(<종교와 과학>) 노아의 방주에 승선하지 않은 동물들은 꽤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동물학의 발전과 화석증거를 외면한 성서의 오류가 속속 밝혀지면서, 적어도 "성서무오설"의 과학적(?) 기반은 무너져 내렸다. 이제 과학의 시대가 도래한 걸까?

미국에서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진화론과 천지창조설을 병행해서 가르치는 문제로 논쟁이 가열되었다. 이는 "1981년 아칸소 주에서 창조론자들이 요구했던 동등시간교육법"으로 나타났다. 미국 CBS 방송사가 2004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중 65퍼센트가 창조론을 진화론과 함께 가르치길 원하고, 심지어 37퍼센트는 진화론 대신에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답했단다. '진화론'에 대한 홀대가 말이 아니다. 100년도 넘게 과학계에서 검증된 이론이지 않나. 약해지긴 했지만 종교의 힘은 건재하고, 과학과 종교는 여전히 세력다툼 양상이다.

서구사회와 달리, 우리나라는 과학과 종교 간에 이렇다 할 논쟁은 없었다. 한국 근대사 자체가 기독교(특히 개신교)선교의 역사였으니.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종교 비판은 일종의 '성역'이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도 종교 전쟁(?)의 기운이 감지된다.

▲ <종교 전쟁>(신재식·김윤성·장대익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종교 전쟁>(신재식·김윤성·장대익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은 진화생물학자(장대익), 개신교신학자(신재식), 종교학자(김윤성) 세 명이 제기한 종교와 과학에 대한 네 가지 주제를 바탕으로, 일정기간 주고받은 서신 내용을 엮은 책이다.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 다윈 탄생 200주년을 기념했으니 그 뜻도 새길만하다. 이 책의 미덕은 내용이 풍부하고, 논점이 잘 정리되어 있으며, 일방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다. 서로의 주장과 배려가 적절하게 버무려져, 논쟁적 대화의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성싶다.

첫 번째 편지에서는 종교학자 김윤성 교수의 글이 인상 깊었다. 신재식 교수의 "도대체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 김윤성 교수는 아인슈타인의 종교 정의를 인용한다.

"경험할 수 있는 무언가의 이면에 우리 마음이 파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으며, 그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오직 간접적으로만 또 희미하게만 우리에게 도달한다고 느낄 때, 그것이 바로 종교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교적이다."(94쪽)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인간의 운명과 행위에 관여하는 신이 아니라, 존재의 질서 있는 조화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고. 그는 인격신을 믿지 않았다.

예전에 교회 다니면서 신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았을 때면(대체로 그랬다!), 미숙한 내 '신앙' 탓만 했다. 희미하게 다가온 "숭고함"은 보지 못하고, 보이는 "아름다움"만 찾아 헤맸다. 외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지금, 파악할 수 없는 세상 너머 이면에 더 가까워진 듯하다. 늙어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의미는 명료해지는 순간 사그라지는 법이다. 대자연 앞에 서 있을 때, 어떤 일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를 생각하며 설렐 때, 타인의 고통이 안타까울 때, 문득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을 떠올렸을 때, 나는 종교적이다.

두 번째 편지 중엔, 신재식 교수가 쓴 '반성 없는 과학, 중세 기독교와 다를 게 뭔가요?'라는 제목의 글이 볼 만했다. 여기에선 자칭 학계의 "실용주의적 외교관"인 에드워드 윌슨이 쓴 <생명의 편지>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책은 생태계 문제 해결을 위해 과학과 종교가 협력하자는 내용인데, 책 전체에 흐르는 윌슨의 "과학 일방주의"에 신재식 교수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윌슨은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 '과학'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과학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려면 청지기 정신의 의미를 바로 깨닫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 청지기 정신의 핵심에 '과학적 실천'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윌슨은 종교와 과학의 협력을 호소하겠다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과학 일방주의를 주입 또는 강요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122쪽)

장대익 교수가 세 번째 편지에서 밝혔듯이, 종교를 이용하려는 윌슨의 의도는 기회주의자로 의심을 받을만한 여지가 있다. 아쉬울 게 없다는 식으로 상대방은 보지 않고 자기이익만 관철시키려 한다면, 정말이지 중세 기독교와 다를 게 없다.

신재식 교수는 세 번째 편지에서 "갱신을 위한 동반자"로서 과학의 역할이 기독교 주류의 과학관이라고 주장하며, 현대과학을 부정하는 편에 서있는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론"에 대한 논의를 한다.

"현대과학을 부정하는 입장이 (…) 다시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뉩니다. 지구의 나이가 1만년 내외라고 믿는 '젊은 지구 창조론'은 진화생물학을 비롯한 모든 현대과학을 부정합니다. 반대로 우주의 나이가 현대 천체물리학과 우주론이 말하듯 137억년 정도 되었다고 여기는 '오랜 지구 창조론'이나 '지적 설계론'은 현대과학의 성과는 모두 수용하지만 오직 진화론만을 부정합니다. (…) 소진화(종안에서 변이)는 받아들이지만, 대진화는 철저하게 부정합니다."(257쪽)

신재식 교수가 말한 "지적설계론"자들이, 김윤성 교수가 언급한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교회"사례에 나온다.

"2005년에 캔자스주의 진화론 청문회에서 '지적 설계론'을 공립학교교과 과정에 끼워 넣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물리학을 전공한 한 대학원생이 주 정부에 편지를 보냈죠. "나는 스파게티 괴물교회 신자다. 우리에게도 자연에 관한 과학적 이론이 있다. 그러니 진화론이나 지적설계론과 나란히 우리의 이론도 교실에서 가르칠 수 있게 해 달라." 대략 이런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김윤성 교수는 말한다.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론이 얼마나 정확하든, 또 그것이 과학이든 아니든, 거기에 일말의 종교적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또 거기에 실제로 종교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명백한 한, 그 것은 결코 공교육 속으로 들어올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됩니다."

종교의 시대에, 갈등은 있었지만 대등한 논쟁은 없었다. 과학의 시대에도 대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그러면 어찌 해야 하나? "종교 전쟁"이라는 책 제목에 담긴 의미에 주목했다. 장대익 교수는 말한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지금, 종교는 인간을 추동하는 가장 큰 힘 중 하나이며, 합리적 비판으로부터 가장 쉽게 면죄부를 받아온 성역이다. 지식인이라면 이 성역에 '전쟁'에 가까운 시비를 걸어야 한다. 현대의 무신론자, 과학 철학자에게 필요한 것도 종교에 대한 선전 포고인 것이다."

얼마 전 대형교회 한 원로목사가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준 걸 회개한다는 인터뷰 기사를 봤다. 나 혼자만 원로목사가 회심(?)한 진짜 이유가 궁금하진 않았을 터이다. 이 틈을 타 다른 교단의 대형교회 목사 세습도 이루어졌다. 그 중 한 목사는 세습이 성서적이라는 주장까지 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대를 이어 충성하는 '교회'가, 대를 이어 충성하는 '국가'와 뭐가 다를까?

한국사회의 비합리성은 중세의 그것에 견줄 만하다. 도망치지 말고, 비합리적인 성역에 시비를 걸고 균열을 내야한다. 올바른 과학과 종교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합리적인 지식인들이 만나 아름답게 치룬 <종교 전쟁>은 한국의 과학과 종교를 밝은 미래로 이끌어 줄 '마중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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