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마음 놓을 수도 없다. 요즘 같이 습한 날씨엔 '집중 호우'가 예사이기 때문이다. 날씨 예보에 "시간당 몇 밀리"라는 표현이 등장하면, 비상근무는 '떼어 놓은 당상'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틀 후 또 다시 임금 노예로 돌아가야 하는 삭막한 현실. 철마다 그리고 매주 겪는 일이지만, 몸에 배지도 않는다. 오늘이 마냥 즐겁지만 않은 이유다.
쉬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건 일이 재미없어서다. 노동은 내남없이 의무일 테니까. 사람들은 왜 현재의 '자유'를 차꼬 채우는 걸까. 혹 풍요로운 노년을 상상하며 풍찬노숙의 낮밤을 견뎌내는 걸까? '고생 끝에 낙'이 오긴 할까?
언젠가, <경향신문>에서 목수정이 쓴 칼럼('자유를 받아들이는 훈련')을 읽은 적이 있다. 요컨대 해외에는 젊어서 고생하지만 노년에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가 있다는 것. 이 칼럼은 "프랑스 노동자들은 은퇴 직후 1년간, 평균 10년이 젊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라는 다소 미심쩍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은 60대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란다.
이는 젊어서 고생해 번 돈으로 자유를 샀다기보다는 그간 부침을 거듭하며 스스로 지켜낸 사회 보장 제도에 기인하는 바 크다. "파출부든 은행원이든 60세 무렵이면 노동 의무에서 벗어나 연금을 타며 생활할 수 있는" 나라. 이 글이 쓰인 때가 국민 복지가 후퇴했던 '사르코지 정권' 아래였으니, 지금의 올랑드 정권(사회당)이라면 이후 노동 복지를 더 강화하리라 예상된다. 무상 급식 찬반 주민투표에서 확인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복지 정책은 향후 있을 정치적 선택에서 중요한 기준이 될 전망이다. 이 글에서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프랑스에서 60대는 노동 의무에서 벗어나고, 몸이 여전히 말을 들어주는 시기 (…)" "(…) 우리가 아는 한국 퇴직자들의 익숙한 풍경은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어찌할 줄 모르고, 무력감에 빠진 남자들이다."
한국의 퇴직한 남성 대부분은 노년의 자유를 누릴만한 경제력이 없거니와, 60대가 "몸이 여전히 말을 들어주는 시기"라는 데엔 더더욱 동의할 수 없었다.
중년에 접어드니, 내 몸 구석구석 심상치 않은 신호를 보내오는 경우가 잦아졌다. 정말이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요통, 관절, 두통, 장 기능 저하 등 내 몸 상태는 이미 초로에 접어들었다. 15년 후에도 내 몸은 여전히 말을 들어주지 않을 듯하다. 이는 복지 시스템을 '선진화'하지 못한 국가의 책임도 크다. 프랑스 정도만 보장하더라도, 꾸준한 건강관리로 노년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세상은 선의가 부족하고, 인간은 그 속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지금' 자유를 누리지 못하면 언제 만끽할 텐가?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본디 노동하는 존재 아니던가.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요한 하위징아'라는 걸출한 사회학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 <호모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노명우 지음, 사계절 펴냄). ⓒ사계절 |
"독자들은 <호모 루덴스>를 읽을 때 이 책의 서술 방법에 주의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의 서술 원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체계와는 다르다. 이 책은 기승전결에 충실한 서술이 아니라 모자이크 방식의 서술을 채택하고 있다. 모자이크 방식은 하위징아 고유의 서술 방식이기도 하다. <호모 루덴스> 이전 저작인 <중세의 가을>(최홍숙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역시 모자이크 방식으로 중세의 여러 장면들을 제시한다." (46쪽)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노동의 이유를 묻다>(사계절 펴냄)에서 보여줬던, 저자의 탁월한 해설과 간결한 문체를 다시 만나는 호사도 누릴 수 있다. 기계 혁명과 나치의 광기가 지배하던 시절, 아마도 하위징아의 근본 질문은 이랬을 성싶다. '과연 기계적(노동하는) 인간이 사람일까.'
하위징아는 말한다. "인간은 본디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였다"고. 고대 "지혜의 시합(놀이)에서 철학이 발전"했고, 선전포고나 우두머리 싸움처럼 "전쟁조차 명예롭게 수행"했으며, "운명의 여신은 곧 정의의 여신"이었던 것과 같이 "놀이의 성패는 인간 생활에서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고.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 혹은 노동하는 인간)가 절대 선이었던 당대에, 놀이하는 인간을 탐구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고단했을 그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그(하위징아)는 나치즘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 고대와 중세의 자유로운 호모 루덴스를 동경하는 하위징아는,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진하고, 유대인 수용소에 "노동이 너희들을 자유롭게 만든다"는 표어를 내걸며 다양성을 억압하는 나치의 철학을 수용할 수 없었다. 1940년, 나치를 비판한 혐의로 그는 신트 미힐스헤스텔의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수용소에 수감되었을 때 이미 하위징아는 칠순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29~30쪽)
그 꼿꼿함에서 방대한 근거 자료를 찾게 하는 열정이 나왔고, 열정은 그를 위대한 사회학자의 반열에 올렸으리라. "하위징아는 인간이 호모 파베르로 축소되면서 잃어버린 능력을 되찾기 위해 역사 여행을 시작했고, 그 여행에서 호모 루덴스를 발견했다." 놀이는 인간의 본성이다.
한국에서 부모는 빚내서 집 장만하고, 자녀 교육에 등골이 휘다, 병든 노년을 쓸쓸히 마감한다. 또한 자녀들은 경쟁에 내몰려, 사는 재미도 모른 채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이는 제한적이지만, 통계 수치로도 말할 수 있다. 한국은 2008년 한 해 동안 2256시간(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1764시간) 일했고, OECD 국가 중 부동의 자살률 1위인 국가다.
'개미와 베짱이'이라는 우화가 있다. 개미는 근면 성실, 베짱이는 게으름의 표상이다. 성실한 개미로 사는 건 아무래도 미련한 짓이다. 베짱이로 살면 어떨까? 닥쳐올 춥고 배고픈 겨울을 견뎌야 하겠지만 말이다. '역경은 극복할 수 있지만, 풍요는 이기기 어려운 법이다.' 돈에 연연하지 않고, 그런 배짱을 부릴 줄 아는 사람. 그가 바로 호모 루덴스다.
금요일은 여전히 내게 선물 같은 날이지만, 열없이 지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시시포스의 형벌은 계속되지만, 성실한 개미로 살진 말자. 그리고 세상을 향해 온순하지만 뻔뻔하게 말해보자. "그 일은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라고. "기정사실화된 현실"을 부정하고야 마는 '필경사 바틀비'처럼.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