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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은 아저씨의 본성? "아, 나도 거세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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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은 아저씨의 본성? "아, 나도 거세가 무섭다!"

[이형준의 '주경야독']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

나른한 아침이었다. 몽롱하고 다리가 맥없이 풀렸다. 잠이 덜 깼으려니 했다.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경악했다. 축축한 속옷, 흥건한 이부자리. '중학생이 밤새 이불에 지도를 그리다니….' 마지막 작품이 여섯 살 때였으니,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당혹감이었다. 하지만 좀 이상했다. (작품에 쓰인) 재료는 끈적거렸고, 예전만큼, 지린 영역이 넓지도 않았다.

첫 몽정이었다. 전날 밤, 꿈에 동네 누나와 닮은 여자가 벌거벗고 나와, 나를 유혹한 기억이 아련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키가 자라니, 물건(욕망)도 함께 자랐다. 꿈에 나오는 여자들 얼굴은 더욱 선명해졌다. 가끔 마주치는 동갑내기 여고생, 수업 시간에 돌려본 '빨간책' 여주인공들, 여배우 '이보희'(영화 <무릎과 무릎사이> 여주인공이다!)도 꿈에서 본 듯하다. 그렇다고, 꿈과 현실을 혼동하진 않았다. 이를 현실에서 감당할 만한 용기가 내겐 없어서였다. 성적 호기심이 극에 달했다. 아니, 그건 사춘기 내내 억압된 내 욕망이었다.

대학교 4학년 때였다. 나는 한 개척 교회에서 청년회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좋아하는 교회누나가 있었다. 당시, 진로 문제로 속앓이 하는 내게, 그녀는 큰 위로가 되었다. 이성의 감정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게 순수한 마리아였고, 친절한 사마리아 여인이었다. 그녀가 꿈에 보이기 시작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오랜 시련(억압된 욕망)은 내게 꿈을 현실로 바꿀 용기를 주었다. 하나님의 뜻이라 믿었다. 생전 처음 사랑 고백이란 걸 했다. 그리고 나는 '건드리지 마라'는 그녀의 충고를 매번 무시하려 했다. 그녀는 냉랭했지만, 용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그녀는 '목사 사모'가 될 거라 했다. '목회자'에 대한 깊은 생각은, 내겐 속절없이 보였다. 꿈에서 벌어진 일을 그녀와 하고 싶을 뿐, 다른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찰나의 욕망이 코앞에 도사렸고, 목회자의 길은 아득한 미래였다. 나는 그녀를 '건드렸다'.


▲ <욕망의 진화>(데이비드 버스 지음, 전중환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남성들은 (…) 일시적 섹스에 탐닉할 것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에게 헌신할 상대를 골라야 한다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사랑과 진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헌신의 문제에 대한 두 가지 해결책이다. 진실성은 남자가 헌신할 의향이 있음을 알려준다." (<욕망의 진화>, 106쪽)


욕망에 직면해 난 "진실"했다. 그녀에게 평생 헌신할 의향도 있었다. 하루하루가 환희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대다수 남성들이 배우자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지만, 모두가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음은 자명하다. 예컨대, 여성들이 원하는 지위나 자원이 없는 남성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유혹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필경 그는 자신의 이상형보다 못한 상대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134쪽)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게 신앙의 모범이었지만, 젊고 아름답진 않았다. 그냥 푸념일 수도 있고, 비겁한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아직 마음속에 남은 회한의 찌꺼기 든지. 사랑은 해결책이기보다는 진통제에 가까웠다. 약발이 떨어지자 고통이 밀려왔다. 우리는 헤어졌다.

"포유동물의 암컷은 대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발정기에 들어간다. 발정기가 되면 종종 생생한 시각적 단서나 후각적 단서로 수컷들을 강하게 유혹한다. 성관계는 주로 이 짧은 기간에만 일어난다. 반면에, 인간 여성은 배란을 할 때 절대로 생식기를 남들에게 드러내 보이며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 여성의 배란 은폐는 여성의 번식 상태를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게 막는다. (…) 우리 조상 남성들에겐 다른 영장류 수컷들에겐 주어지지 않은 독특한 과제가 주어졌던 것이다. 배란이 은폐된 상황에서 어떻게 나의 부성을 확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결혼은 그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다." (140~141쪽)

"문화를 막론하고 오늘날 남성들은 매력적인 여성을 선호하며, 이는 매력적인 외형이 여성의 번식 능력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남성 자신의 높은 지위도 아울러 지시하기 때문이다." (129쪽)

내 나이 서른다섯. 이젠 결혼하고 싶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마흔 넘기면 결혼하기 힘이 들거라는 절박함이 나를 재촉 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배우자를 구해야 했다. 거짓말처럼, 마음에 쏙 드는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이듬해 그녀와 결혼했다. 그리고 '나' 닮은 딸도 태어났다.

사람들이 '딸이 아빠를 닮았다'는 얘기를 하면, 나는 짐짓 걱정하듯 말한다. "엄마를 닮아야 할 텐데…." 하지만, 속으론 기분이 좋다. '내 딸 맞구나.'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겠으나, 내가 '의처증' 환자가 아닐까 의심해 본적도 있다. 아니었다. "배란이 은폐된 상황에서 나의 부성을 확신"해 가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마흔 갓 넘겼을 때다. 한 시민 단체에서 '남자 40대, 나대로 사는 법'이라는 강좌에 참여했다. 특히 <부부 심리학>의 저자 최대현이 진행한 '기쁨과 쾌락, 신성과 속성'이라는 강좌가 인상 깊었다. '부부 강간'을 내용으로 하는 영화 장면을 보여주고 성 생활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는가 하면, 성 범죄 심리를 알아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있었다.

잘 진행될 리가 없었다. 한국 중년 남성만큼 성에 대해 솔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또 있을까. 특히, 성 범죄자들의 심리를 알아보는 시간은 내게 충격 그 자체였다. 심리 테스트 결과, 성 범죄자의 심리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중년 남성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성 범죄 심리는 유구한 진화 역사에서 자연 선택된 걸까?

"이러한 가능성을 둘러싼 논쟁이 2000년 생물학자 랜디 손힐과 인류학자 크레이그 파머가 <강간의 자연사 : 성적 강제의 생물학적 기초>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촉발되었다. (…) 책에서 저자들은 강간에 대한 두 가지 경쟁 이론을 설명했으며, 각자가 다른 이론을 지지했다. 랜디 손힐은 남성이 강간 적응, 즉 하나의 번식 전략으로서 원치 않는 여성과 강제로 성관계를 맺게끔 하는 특수화된 심리 기제를 진화시켰다고 제안했다. 반면 크레이그 파머는 강간은 다른 진화된 심리 기제의 부산물이라고 제안한다. 강간을 뜻하지 않게 낳는 심리 기제로 성적 다양성에 대한 남성의 욕망, 저비용의 상호 합의된 성관계에 대한 욕망, 성적 기회에 대한 심리적 감수성 (…) 등을 들 수 있다" (521쪽)

강간 적응 가설은 입증할 만한 증거가 매우 희박하다. 반면 부산물 가설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쿨리지 효과'(수컷들이 새로운 암컷을 접하면 다시 성적으로 흥분하게 되는 현상) 등 남성이 성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진화된 심리 기제가 존재한다는 건 분명하니까. 요즘, 성 범죄자들로, 안 그래도 어두운 사회 분위기가 살벌하기까지 하다. 잘 아는 임상 치료사가 말하길, 요새 성 범죄자들은 '성 중독'이라는 정신병에 걸린 거란다. "성적 모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정신적 불안증, 정신병적 증상"이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성 범죄 사건이 터진다. 아동 강간의 경우, 10년이 지난 뒤에야 상처에 대한 심리적 징후가 나타난다고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감정적으로야, 가해자들을 시쳇말로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그렇지만, '물리적 거세'라니. 내 물건이 잘리는 몹쓸 상상을 해보았다. 모골이 송연했다.

얼마 전, 우리 집에 편지가 왔는데, 무슨 이력서 같은 용지에 어떤 사람 증명사진이 붙어 있고, 이름과 집 주소가 상세히 나와 있었다. 강제 추행 치상죄로 집행 유예 받은 성 범죄자에 대한 고지였다. 그는 강간범이 아니었다. 놀라운 발상이었다. 살림집의 교도소화. 어쨌든, 사진의 인물이 이번 기회에 진정으로 뉘우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욕망의 진화>(전중환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는 진화 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가 짝짓기 미스터리를 심도 있게 파헤친 책이다. 버스는 책머리에서 "어떤 발견이 불쾌하다 해서 그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고, "우리 눈을 스스로 가려 왔던 커튼을 걷고 똑바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며 본문의 극적 전개를 예고한다.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여자가 원하는 것', '그리고 남자가 원하는 것', '하룻밤의 정사', '여성의 은밀한 성 전략', '인간의 짝짓기의 미스터리' 다섯 편의 글을 읽어 보면, 정말이지 "어떤 발견이 불쾌"할 만하다. 하지만, <욕망의 진화>는 다윈의 '성 선택 이론'에 풍부한 통계 자료를 더해, 남녀 성 갈등의 본질을 탐구하고 화합을 위한 적절한 해결책까지 제시했다.

남자로 태어나 욕망의 주체로 살아왔지만, 여전히 힘들 때가 많다. 욕망은 대체로 '타자'의 문제여서다. 유한한 '나'는 무한한 '타자' 앞에 속수무책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항상 사랑하는 사람을 무한정 기다린다는 느낌을 받는 것" 처럼 말이다. 남자들에게 여성은 "대체가능하고 교환 가능한" 대상이지만,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자원과 헌신"을 요구한다.

이 간극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방법이 있다. 남성은 여성의 욕망을 살펴주고, 여성은 스스로 '욕망의 주체'로 살려고 노력하면 된다. 자타불이(自他不二). '나'와 '타자'는 둘이 아니다.

"우리는 35억 년간의 지구상의 생명 역사에서 우리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최초의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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