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험한 세상 두 손 꼭 붙잡고 헤쳐 나가겠다고 (…) 사랑과 믿음으로 예쁘게 다짐하는 우리 (…)"
짐작한 대로다. 청첩장이다. 이내, 또 다른 청첩장이 눈에 들어온다. 하단에 박힌 이름을 천천히 살핀 후 안도한다. 모르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아는 사람'이라면 축의금을 낼 정도의 관계로, 내 기준으로는 같은 부서에 근무했거나 한 끼 저녁 식사라도 함께한 이다.
"두 손 꼭 붙잡고 헤쳐 나가겠다"(?)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함 해봐라. 그게 어디 쉽나.' 얽매이기 싫었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게 되고, 그 안에서 육체적, 정신적 안정을 누리고(?) 살면서, 이제는 타인의 결혼을 향해 버젓이 냉소하는 역설. 나만 시니컬한 걸까?
2011년 여름이 시작될 즈음,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직원에 대한 일부 승소 판결이 있었다. 고 박지연 씨. 그녀는 봄 풀 자라듯 파릇파릇해야할 고3 때(2004년 12월) 삼성전자에 입사했고, 하루 열두 시간씩 방사선과 유독 화학 물질에 노출된 작업장에서 일하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에 걸려 파리한 모습으로 2010년 3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산업 재해 인정을 위한 법정 투쟁. 사람들은 왜 "번번이 저항하면서도 (…) 이해라는 단어의 모서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걸까?" 햇살 같은 미소로 온 힘을 다해 살았을 그녀에게, 몸 관리 제대로 못한 죄인이 아닌 '산업 재해'로 인한 사회적 죽음을 당했다는 세상의 인정이, 그리 중요한 일이었을까?
문제는 '삼성'이라는 재벌이 위로는커녕, 고 박지연 씨와 유가족에게 휘두른 합법적(?) 횡포가 도를 넘었다는 데에 있다. 이해할 만하다. 기업 이미지 손상은 이익과 직결되는 일이니까. 그러나 이건 사람 목숨과 관련된 일. 굴지의 대기업이 편법 증여, 차명 계좌, 정·관계 로비도 모자라, 건강한 몸으로 어린 나이에 입사해 5년 넘게 열심히 일하다, 몹쓸 병이 걸려 세상을 떠난 개인에게 책임을 다 떠넘기려 하다니. 삼성은 온기 없는 천민 자본의 정수다.
하지만, 대한민국 소비의 현주소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TV라면 삼성 스마트, 냉장고는 지펠, 휴대폰은 아이폰을 제외하면 갤럭시가 대세다. 삼성전자는 국내 주식 시가 총액 부동의 1위(2012년 9월 26일 현재 195조 원) 기업 아니던가. 얼마 전, 성황리에 마친 '싸이' 콘서트는 삼성카드가 주최했고, 삼성생명은 주식 시가 총액 10위권 내에 들며, 내 딸이 좋아하는 에버랜드는 평일에도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삼성 '순환 출자'의 마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언급한 기업들이 한 명의 총수가 지휘하는 '삼성그룹' 아래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며칠 전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에서 합리적인 '금융·산업 분리 방안'을 들고 나와, 해묵은 마법이 풀릴 수 있다는 기대감을 한층 높였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의 '염려'가 뒷맛을 흐리긴 했지만 말이다. "금산 분리 강화안과 대주주 적격성 심사 강화를 반대하는 곳은 사실 삼성그룹 밖에 없다."고. '삼성공화국'에서 삼성이 반대하는 일이 과연 실현 가능한 일일까? 지켜볼 일이다.
과연 사람들은 '사카린 삼성'의 파렴치함을 모르는 걸까? 우리는 삼성 제품 앞에서 흔쾌히 지갑을 열지만, 삼성의 '무노조'와 '순환 출자'에 대해서도 정의의 사도가 되어 목청을 돋운다. 뭔가 석연치 않다. 삼성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냉소는 아닐까? 그렇다. 냉소주의 맞다. 동유럽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로서 '냉소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냉소적인 주체는 이데올로기적인 가면과 사회 현실 사이의 거리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면을 고집한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수경 올김, 인간사랑 펴냄)
'KT&G의 폭리에 냉소하면서 담배 피우기를 포기하지 않는 애연가의 태도야말로 냉소주의의 원형'이라 보면 된다. 결혼하면 얽매이게 되리란 걸 예상했음에도 여인과 가약을 맺은 한 자유로웠던 영혼처럼. 삼성의 몰염치함을 알면서도 삼성 제품 앞에 지갑이 쉬이 헐거워지는 물신 숭배자들 같이. 세상은 세태를 비관하면서도, 정작 뒤에선 이익을 챙기는 냉소주의자들로 득실거린다. "실상을 잘 알면서도 마치 그것을 잘 몰랐다는 듯이 행동하는"것, 정말이지 사람들은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에 빠져 살아가는 지도 모를 일이다.
▲ <두근두근 내 인생>(김애란 지음, 창비 펴냄). ⓒ창비 |
"조로증은 아이들에게 조기 노화 현상이 나타나는 치명적이고 희귀한 질환이다. 지금까지 세계에 보고된 것만 100건 정도, 한국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하루를 10년처럼 살고 있는 아름이는 현재 심장마비와 각종 합병증의 위험을 안고 있다. 최근에는 황반변성으로 한쪽 시력마저 잃은 상태다. 병원에서는 입원을 하루 속히 권하지만 현재 아름이네 형편으론 쉽지 않은데." (170쪽)
주인공 아름이가 병원비 마련을 위해 TV에 출연하게 되는데, 그 때 흘러나오던 내레이션이다. 조로증에 걸린 열일곱 살 소년 아름이. 운명의 장난인지 아름이 부모는 열일곱 살 때 눈이 맞아 사고를(?) 쳤고, 그 결과 원치 않는 아기(아름이)를 가지게 된다.
조로증을 인지하게 된 세살 무렵부터 그들은(부모) 좌절의 늪에서 허덕이게 된다. 아픈 사람을 곁에 둬 본 사람은 안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를. 불치병인데다, 가난하다면 말해 무엇하리. 신은 더러 감당할 수 없는 일로 인간을 시험하기도 한다. 일상의 비루함을 견디지 못한 아름이 엄마는 가출을 하게 되는데, 1주일 만에 돌아왔을 때 아름이가 엄마에게 "가까스로 전하려 한 말은 이랬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알아보는 기준이 있어요."
"그건 그 사람이 도망치려 한다는 거예요."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인 걸 알아요." (143쪽)
대체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뭘까? 아름이가 친구(?)인 장 씨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사람은 언제 어른이 돼요."
"엥."
"주민등록증이 나올 때예요, 군대에 다녀온 뒤예요, 결혼한 다음이에요?"
"그야, 물론 애를 낳은 다음이지." (297~298쪽)
할아버지의 답은 <네이버> 국어사전 세 번째로 나오는 정의였다. 다른 정의도 내쳐 소개해보면,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란다. 애를 낳을 수도, 다 자랄 수도 없는 아름이는 어른이 될 수 없다. 이 책에서 '어른'은 일종의 딜레마다. 내가 아름이 아버지라면, 아름이의 다음 글이 위로가 됐을까?
"열일곱은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서른넷은 자식을 잃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7쪽)
열일곱은 부모가 되기엔 너무 이르고, 누구든 서른넷에 자식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아름이 부모는 그저 고통을 견뎌낼 뿐이었다. 그래도 아들의 죽음이 예정된 상황에서 이를 대신할 피붙이를 갖고 싶은 건 인지상정일 터. 해서 때 이른 감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름이가 죽기 전에 동생을 가졌다. 아름이가 이를 알아챘다. 아름이는 "왜 지금이냐고, 조금만 참다 갖지 그러셨냐고,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원망하고 서운해 했던 기억도 굳이 헤집어내지 않았다."(322쪽)
아름이가 부모보다 어른스러운 까닭이 뭘까. '죽음의 자각'인 듯하다. 내일 죽는다면, 오늘이 무덤덤하게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아름이를 더 어른스럽게 만든 게 아닐까. 그에겐 매순간이 아쉽고 아름다웠으리라. 첫눈 내린 겨울 어느 날, 시력마저 잃은 아름이가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병실 밖으로 나왔다. 그 때, 아름이는 예전에 현미경으로 보았던 '눈 결정' 형태를 기억해낸 모양이다. 그리고 엄마에게 읖조리듯 말한다.
"나는 그게 참 이상했는데."
"뭐하러 그렇게 아름답나."
"어차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땅에 닿자마자 금방 사라질 텐데." (287쪽)
혹, 짧은 시간이었지만 타인을 어루만지며 살다간 소설 속 아름이가 '실재' 아닐까. 아니면, 실상을 알면서도 개인 이익을 챙기며 사는 현실 속 어른들이 '환상'이라면 어떨까.
문득, 어릴 때 온종일 말을 줍고 다녔다던 아름이의 낱말카드가 궁금해졌다. 다음 글귀가 가슴에 사무쳐서다.
"바람이 불면, 내 속 낱말 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친다. 해풍에 오래 마른 생선처럼,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며 바깥의 둘레를 넓힌 말들이다." (10쪽)
나도 내 말과 글이 바깥의 둘레를 넓히는 것이었으면 한다. 그러려면 마른 생선처럼, 내 몸의 부피부터 줄어야겠지. 그렇게 된다면, 정말 만에 하나 그리 된다면, 시니컬한 세상도 나도, 좀 더 어른스러워지지 않을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