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헨리 영)은 열일곱 살 때 배고픈 여동생을 위해 5달러를 훔치고, 악명 높은 '알카트래즈' 교도소에 갇히게 된다. 헨리 영은 계속되는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죄수들과 함께 탈옥을 시도하는데, 동료 죄수의 밀고로 탈옥은 실패로 돌아간다. 살아남은 헨리는 3년 넘게 독방에 감금되어 고문에 시달리다 나오게 되지만, 정신착란 상태에서 함께 식사 중이던 밀고자를 살해한다.
좀도둑이 "일급 살인"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영화에서도 억울한 헨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타인은 있었다. 국선 변호사 제임스 스탠필이다. 제임스가 백방으로 힘써준 덕택에, 헨리는 일급살인죄(의도적 살인)를 면하지만 여죄가 있어 알카트레즈 독방에 다시 갇힌다. 그는 살아서 알카트레즈를 나오지 못한다. 교도소 내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한 재판이 재개되기 전, 헨리는 자살한다. 시신 밑에 "VICTORY"라는 문구를 남긴 채.
쟝 발쟝은 미리엘 사제를 만나 회심하고, 헨리는 제임스의 노력으로 일급살인 누명을 벗는다. 천한(?) 도둑들이, 사제의 용서와 변호사의 우정으로, 인간답게 변했다. 냉정한 세상에 주눅 든 쟝 발쟝은 평생 타인에 대한 사랑을 베풀었으며, 복종만 알던 헨리는 부패한 권력에 목숨으로 저항했다. 19세기에 쓰인 <레 미제라블>이 여전히 두루 읽히고, <일급살인>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두 이야기는 실재에 가깝다.
억울한 상황에 처한 타인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미리엘과 제임스) 이런 생각을 했을 법하다. '내가 청년 시절 쟝 발쟝이었다면 배고픈 조카들을 외면할 수 있었을까?' '내 나이 열일곱에, 헨리의 처지였다면 과연 도둑질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인간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상대방 입장에서 사유할 수 있는) 타인의 존재는 결정적이다.
문제는 타인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과 이를 실천할 용기를 갖춘 사람이 많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근대 이후 우리 사회는 '고립된 개인'들로 넘쳐난다. 생계를 위해 남 생각은 할 틈이 없다. '아돌프 아이히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타인을 사유할 여력이 없었고, 남들과 같다는 의미에서 '평범'했다.
그(아이히만)의 재난이란 평범한 것들이었다. 그는 '아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좋은 재능을 갖춘 학생도 아니었다고 덧붙일 수 있지만) 그의 아버지는 처음 그를 고등학교에서, 그리고 직업 학교에서 졸업하기 한참 전에 빼냈다. 그래서 그의 모든 공식 기록에 직업으로 기록한 토목 기사라는 것은, 자기가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히브리어와 이디시어에 능숙하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명백한 거짓말을 아이히만은 자신의 친위대 동료들과 유대인 희생자들에게 즐겨 말했다. (…) 분명 허풍은 언제나 그의 가장 큰 죄 중 하나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한길사 펴냄), 82~83쪽)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
아이히만은 중간 정도 체격에 호리호리하며 중년으로, 근시에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고르지 않은 치아를 지니고 있었다. 재판 때는 줄곧 가는 목을 의자 쪽으로 길게 젖힌 채 앉아 있었다(그는 한 번도 방청객 쪽으로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52쪽)
법정은 아이히만을 제외하면, 연관된 "사실"보단 "유대인의 진실"에 대한 열기로 들떠 있었다. "그에 대한 재판의 근거가 되는 1950년에 입안된 나치스 및 나치 협력자(처벌)법"에 따르면 그의 형량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사형이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자기 죄목에 대해 "기소장이 의미하는 바대로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는 무엇보다 '살인죄'에 대한 기소는 잘못 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 적이 없다. 나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여하튼 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 그 일은 그냥 일어났던 일이다. (…) 나는 단 한 번도 그 일을 해야 한 적이 없었다." (74~75쪽)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더라도 당시 같은 상황이라면 그대로 수행했을 것이며, 단지 자신은 "유대인 멸절을 교사했다"는 이유에서만 기소될 수 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어느 유대인 역사가는 아이히만이 수십만의 유대인들 목숨을 구했다는 놀라운 증언도 한다.
법정에서 비웃음을 산 몇 십만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아이히만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유대인 역사가 킴체 부부의 숙고된 판단 가운데서 이상하게도 지지를 받게 된다. (킴체 부부에 의하면) '따라서 나치스의 전체 집권 기간 중 가장 모순적인 사건 중의 하나임이 분명한 일이 시작되었다. 유대 민족 최고 학살자 중 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될 사람이 유럽에서의 유대인을 구출하는 데 활발한 일꾼으로 기록된 것이다'. (122쪽)
이는 "허풍"이 아닌 듯하다. 아이히만은 '시온주의자'였다. 당 정강과 <나의 투쟁>도 읽지 않고 친위대에 가입했던 그가, 생애 첫 번째로 "진지하게 읽은 책"이 시온주의의 고전인 테오도어 헤르츨의 <유대인 국가>였다.
만약 유대인 관료들이 '이상주의자' 즉 시온주의자였다면, 그는 그들을 존중했고, 동등한 자로 대우했으며, (…) 자신의 '약속'을 가능한 지켰다. 그가, 즉 아이히만이 아니었다면 누가 몇 십만 명의 유대인을 구했겠는가? 그의 대단한 열정과 조직력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들이 시간에 맞추어서 탈출할 수 있겠는가? (…) 그는 그들을 구했고, 그것은 '사실'이다. (116쪽)
책 한권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기도 하나보다. 하지만 나치의 유대인 이주 정책(초기)이 겉으로는 시온주의를 표방했으므로, 그가 자신의 이익과 관계없이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고 보긴 힘들다. 유대인 공동체 대표 중 하나였던 "불행한 상업 고문관 '스토르퍼'" 사건은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에 조금 더 다가설 실마리를 제공한다. 아이히만은 아우슈비츠의 사령관 '루돌프 회스'로부터 전보를 받았는데, 스토르퍼가 수용소에 잡혀왔다는 내용이었다. 스토르퍼는 평소 친분이 있었던 아이히만에게 도움을 청했을 터다. 그는 당시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 만남은 정상적이고 인간적이었어요. (…) 그는 모든 슬픔과 비애를 내게 털어 놓았습니다. (…) 그리고 나는, '이봐요, 저는 정말 당신을 도와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제국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아무도 나올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요. 저는 당신을 빼낼 수 없어요'라고 말했어요. (…) 나는 회스(아우슈비츠 사령관)에게 '스토르퍼가 꼭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잖아!'라고 말했습니다. 회스는 '여기선 모두가 다 일을 해'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나는 '좋아, 내가 짧은 편지를 써서 스토르퍼가 빗자루로 자갈 포장로를 쓰는 일을 하도록 하겠어'라고 말했습니다. (…) 그는 빗자루를 놓고 벤치에 앉아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 그는(스토르퍼) 매우 기뻐했고, 우리는 악수했습니다." 이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만남이 있은 지 6주일 후 스토르퍼는 죽었다. 가스가 아니라 총살이었다. (109쪽)
아이히만은 무지했다. 아니 알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수용소 실상을 확인한 후부터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다. 러시아에서 총살될 운명의 사람들을 가장 늦게 폐쇄된 수용소인 '우츠'로 보낸 일은, 아이히만을 (출세에 지장이 될 만한) "상당한 곤란"에 빠트리기도 했다. 복종만으로는 양심을 견디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아이히만이 말한 것처럼, 자기 양심을 무마시킨 가장 유력한 요소는 실제로 '최종 해결책'에 반대한 사람을 한 명도, 단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186쪽)
나치 정부는 국민에게 "최종 해결책"의 유용한 도구였던 '가스'를 이용한 안락사의 "혜택"(?)을 이미 주고 있었다.
최초의 가스 방들은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한 1939년 9월 1일자 포고령을 이행하기 위해 그해 건설되었다. 이 생각 자체는 오래된 것이었다. (…) 이 포고령은 정신병자들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수행되어 1939년 12월과 1941년 8월 사이에 대략 5만 명의 독일인들이 시설에서 일산화탄소 가스로 살해 되었다. (…) 일반인들과 교회의 용기 있는 몇몇 고위 성직자들의 저항 때문에 독일 내부에서 정신병자들에 대한 가스 처리가 중지되어야 했다는 사실은 빈번하게 지적되어 왔지만, 한편으로 이 계획이 유대인의 가스사로 전환되었을 때에는 그러한 저항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살인 센터 가운데 몇 곳은 당시 독일 영토 내부에 위치하여 그 주위에 독일 주민들이 살고 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177~179쪽)
독일인 일부가 저항했다지만, 유대인이 처한 현실 앞에 그들은 냉랭한 타인일 뿐이었다. 당시 평범한 독일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렌트는, 1945년 1월 동프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예로 든다.
이 이야기는 한스 폰 렌스도르프 백작이 <동프러시아의 일기>에서 언급한 것이다. 부상병들을 의사로서 돌보기 위해 그는 도시에 남아 있었다. 피난민 센터에서 (…) 어떤 여성이 다가와 (…) 치료해 주길 원한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쾨니히스베르크를 탈출하고 치료는 나중에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녀에게 설명했다.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들이 제국으로 모두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러시아인들은 결코 우리를 잡지 못할 거예요. 총통께서는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우리에게 ‵가스‵를 줄 테니까요' (…)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말이 정상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아차린 것 같지 않았다. (180쪽)
전체주의의 광기는 무지한 사람들의 '복종'을 자양분 삼아 자라난 것이리라. 유대인들이라면 대부분 큰 고통을 겪었겠지만, 나치에 협력한 유대인들도 많았던 것 같다.
바르샤바처럼 암스테르담에서도, 부다페스트에서처럼 베를린에서도 사람들과 그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자신들의 추방과 학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추방자로부터 돈을 인수하고, 소개된 아파트를 계산하고, 유대인을 체포하는데 도움을 주고, 마지막 행동으로 유대인 공동체 자산의 최종 약탈을 위해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데 이르기까지 유대인 요원들은 신뢰 받을 수 있었다. (188쪽)
악은 평범했다. 독일인들은 학살을 외면하거나 복종했고, 어떤 유대인들은 나치에 협력했으며, 유대인을 포함한 수용소 사람들 대다수가 죽거나 도망쳤다. 누구도 사유하지 않았고,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다. 무지와 두려움은 그들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떨까?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노예 사회와 달리, 예속은 오늘에 이르러 더 이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무엇이 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쓴다.
인간은 그 자신이 필연성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유로워 질 수 없다. (<인간의 조건>, 178쪽)
사유하지 않아 자각하지 못하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는 뜻으로 읽힌다. 책 읽는 내내 '공무원'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이히만도 나도 공무원이다. 이를테면 이런 의문이다. '여전히 상명하복의 문화가 지배적인 공직 사회에서 복종 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임금으로 연명하는 노동자가 경제적 이익 말고,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할 수 있을까?' '쟝 발쟝에게 미리엘 같은 구원의 손길이 임했듯이, 헨리에게 제임스라는 친구가 함께한 것처럼, 아직 법외 노조원인데다 정치적 표현의 자유마저 없는 공무원 노동자와 누가 친구가 되어줄까?'
이젠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 아렌트가 말한 '공론 영역'에 나와 말해야 한다. "공무원 노조" 인정하고,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달라고.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하지 않는 공무원에게 "창의"와 "봉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평생 '머슴'으로 복종하고, 생각없이 살아가야 할 테니까.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말이다.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 들어간 그의 마지막 말(?)은, 나치 선전 문구에서나 보던 상투적인 "관청 용어"였다.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349쪽)
"안녕하세요. ○○구청 ○○과 ○○○입니다. (…)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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