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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들의 '대머리공포증', 이것으로 다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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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들의 '대머리공포증', 이것으로 다스려라!

[이형준의 '주경야독']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

얼마 전, 키레네의 시네시오스가 쓴 <대머리 예찬>(정재권 옮김, 21세기북스 펴냄)을 읽었다. 이 책은 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소피스트 '황금의 입 디온'의 글, '머리카락 예찬'에 대한 신랄한 반론이다. 아름다운 머릿결에 대한 찬미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 호메로스의 글까지 인용해 한낱 머리카락을 미화했다고 시비 걸 일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시네시오스는 소크라테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대머리였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며, 부질없는 머리카락 예찬을 시종 비웃는다.

그럼에도 "털 많다는 것은 곧 지성이 모자라다는 것을 의미한다"거나, "털 많은 개는 멍청하고 사납기만 하다"는 대목에선 왠지 궁색해 보였고, "대머리가 지상의 별"이라는 고품격(?) 비유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는 이 책을 왜 쓴 걸까?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기수 히파티아의 수제자로, 프톨레마이오스 주교였던 그는 대머리였다. 당대 최고 지성이라 자부했을 그가, 털 많은 한 궤변론자의 무도함을 그냥 지나칠 순 없었으리라.

나도 몇 년 전부터 머리숱이 눈에 띄게 줄기 시작해, 이젠 맨(대)머리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머리카락이 유전(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머리숱이 많으셨다!)이라는 내 상식은 피부과에 가보라는 아내의 충고를 매번 무시하게 만들었고, 우리 집 세면대에는 샴푸 등 각종 탈모방지 상품이 신속하게 등장했다. 하지만, 내 머리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넌 지 오래인 듯하다.

가을이면 머리카락이 더 많이 빠졌다.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에 마음마저 헛헛했다. 떨어지는 낙엽들과 이별의 슬픔을 나누었고,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면 가슴이 서걱거렸다. 나는 나목이었고, 낙엽은 내 머리털이었다.

사람들과 담소 중에 '힘들어서 머리 빠지겠다'는 둥, 머리털 얘기만 나오면 표정 관리에 애먹기 일쑤였다. 고개 숙이면 맨머리가 드러나 인사조차 하기 싫었다. 안 그래도 어두운 표정에 딱딱하고 꼿꼿한 이미지를 더해갔다. 타인의 시선이 따가웠고, 차츰 '살 맛'을 잃었다. 기울어진 삶에 균형추가 필요했다. 어김없이 찾아온 탈모의 계절에, 밀쳐놨던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통나무 펴냄)을 읽게 된 이유다.


▲ <중용, 인간의 맛>(김용옥 지음, 통나무 펴냄). ⓒ통나무
"맛이야말로 중용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맛은 인간의 몸과 마음의 궁극적 도덕성이다. 맛은 상황성을 떠나지 않는다. 마당 독에 묻은 김장김치도 1월 초순의 짧은 기간에 최상의 맛을 낸다. 맛은 시중(時中)이다. 맛은 전문가의 특권이다. 다시 말해서 수신(修身)의 결과로서만 달성되는 것이다. 맛은 공부의 결과다. 어떻게 엉터리 요리사나 학업의 훈련을 거치지 않은 자들에게서 음식의 맛이나 문장의 맛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119~120쪽)


공자의 손자 '자사'의 역작 <중용> 제4장에 나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먹고 마시는데, 그 맛을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다'는 마지막 경구에 대한 해설이다. 하찮은 머리털로 '살 맛' 운운하는 내가 과연 인생에서 '맛'을 기대할 만큼 공부가 되어있는 지 돌아보게 한다.

알다시피 저자는 이 책으로 강연도 하였고, 서문에서 일반 대중을 위한 맞춤서라고 밝힌 것처럼 읽어나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중용의 도를 깨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중국 명나라 때 사상가 왕양명의 뛰어난 제자 육징조차 <중용>을 읽으며 '중'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스승에게 어려움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왕양명은 '중'은 다만 천리일 뿐이라고 했다.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신정근 지음, 사계절 펴냄) 참조) 이는 <중용> 제7장에 나오는 공자의 탄식과 무관하지 않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내가 지혜롭다고 말하는데 나는 중용을 택하여 지키려 노력해도 불과 만 1개월을 지켜내지 못하는구나!" (141쪽)

진솔함은 성자의 본령인가 보다. 사서 중 가장 나중에 읽으라던 주희의 권유까지 덧붙이면, <중용>은 깨치기는 물론이거니와 이해하기 조차 어려운 책임에 틀림없다. 내 무식이 크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니 이쯤에서 나도 솔직해져야겠다. 사서(四書), 그것도 입문서로 풀어쓴 책 중 내가 읽은 책이라 해봐야 손가락으로 꼽는다는 사실이다.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하룻강아지가 중용의 맛을 제대로 알 리 없다. 그래도 "앎의 방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성"이 "호문(好問)"이라하니 용감하게 물어 본다. 중용이 뭘까?

"중(中)은 가운데가 아닌, 모든 감정이 동적인 평형을 이루고 있는 원초적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심적 상태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 감정의 발현은 상황성을 갖는다. (…) 우리는 상가집에 가서 슬픔을 표현해야 하며, 친구 집 돌잔치에 가서는 기쁨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 화(和)는 아름다움의 근원이다. (…) 조화라는 것은 현실태이기 보다는 끊임없이 지향되는 달성의 과정이다. (…) 부조화의 요소들을 융합하여 새로운 화합을 지향하는 끊임없는 달성이 곧 조화이다." (94쪽)

'맛'을 내려면 때를 만나야 하니 시중이고, 끊임없는 노력이 없으면 시들해지니 능구(能久, 지속적으로 실천하다)이다. 시중과 능구는 중용의 핵심이라 할만하다. "용(庸)"이 '범용'과 '항상'을 의미하고 일견 '화'와 통하는 면이 있어, 이 글을 '중용'의 의미로 새겨도 좋을 성 싶다.

세상사 딜레마의 연속이다. 딜레마로 난관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불안하고 막막하기 십상이다. 때문에 '중용' 길을 체득해야 한다. 그러려면 "심적 상태"가 상황에 따라 적정하게 "발현" 될 수 있도록 준비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신독(愼獨)이다.

"군자는 보이지 않는데서 계신하고, 들리지 않는데서 공구한다. 숨은 것처럼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처럼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음을 삼가는 것이다." (45쪽)

지난 9월, 부산지법은 친딸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비정한 아비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그의 휴대전화나 컴퓨터에는 포르노나 근친상간 영상이 다수 저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법원에 따르면 2010년 8월 당시 열세 살이던 친딸을 강제추행한데 이어 성폭행한 사건인데, 평소 집에서 근친상간을 다룬 영상을 보거나, 동영상으로 친딸의 자는 모습을 촬영하는 등 변태 성욕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면수심의 아비는 "홀로 있음을 삼가"지 않았다.

최근엔 검사와 피의자의 부적절한 성관계로 검찰조직이 발칵 뒤집혔다. 이로 인해 동부지검장은 사퇴하고, 한 평검사는 "임관 후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이라고 토로했단다. 단둘이 있는 강압적 상황에서 신체 접촉이 있었다면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 이나 '직권남용'으로 봐야한다는 전문가 의견도 있으나, 대검찰청은 '뇌물수수'죄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에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성관계를 뇌물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영장을 기각했다.

사실, 이 사건에서 위법성 판단은 부차적인 문제로 보인다. 범죄를 방지해야할 검사가, 거꾸로 범죄인의 행동을 서슴지 않는 도착적 행태가 더 큰 문제다. 검찰 같은 권력조직에 대한 제도적 통제가 필요한 대목이다.

은밀한 곳에서 삼가지 않으면, 그 곳이 집, 검사실 아니라 대통령 집무실이어도(르윈스키 사건이 그렇다!) 범죄의 온상이 된다. 그걸 은폐해서도 안 된다. 삿된 욕망을 품고, 권력에 기대어 남들이 안본다고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나와 타인 모두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내 머리숱 타령도 알고 보면 일종의 욕망이다. 내 욕망은 수컷으로서 이성에게 관심 받고 싶은 마음, 내가 타인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우월감,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집이다. 숨긴 걸 드러내지 못하는 가식이기도 하다. 오만 감정이 내 마음 속에 얼기설기 똬리를 틀고 앉아, 혼자있을 때면 그 상념들이 떠올라 나를 괴롭힌다. 그래서 타인 앞에 나서면 부끄러울 때가 많다. 맨머리의 결핍만 보고 지성의 만족을 알지 못한다. 몰래 품은 마음이라도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숨은 것처럼 잘 드러나는 것도 없다."

<논어>의 서론격인 '학이'편에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랴!" 이 구문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만났다. 몇 주 전, 내가 좋아하는 도서평론가 이권우 교수에게서 얻어 들은 얘기다. 요컨대, 유가의 기본은 "수기치인"인데 '치인'은 수신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수신하고 있으면, 나를 들어 쓰는 건 세상이 하는 일이라는 것. 해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낼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무릎을 쳤다.

글 마무리를 해야 할 텐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저자의 목적론적 세계관(근대주의) 비판, 기독교와 비교하며 전개한 중용의 '천인 합일사상', 그리고, 주희와 다른 관점으로 펼친 리기론적 쟁점 등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개구라" 같은 비속어를 쓰며 아름다운 뜻을 다소 흐리기는 했지만, 저자의 '박람강기'와 고전 대중화를 위한 결기는 상찬 받아 마땅하다. 또한, "중용을 읽고 중용만을 말하고 성(誠)을 말하지 않는 자는 중용을 읽지 않았다."(51쪽)고 했으니, 언급조차 안한 '성'론은 어찌할 것인가. 내가 부족한 탓이다. 하지만,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련다. 그저 수신에 정진할 일이다.

며칠 전, 우리 집 발코니에 우두커니 섰다. 스산한 늦가을 아침, 나뭇잎이 다 떨어져 휑한 나목이 홀로 서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부스스한 '맨머리'에게 말했다.

"대머리라도 괜찮아. 단지 과한 욕망과 허접한 우월감, 속 좁은 아집은 버려! 사람들은 네 머릿속에 뭐가 들었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 지가 궁금할 뿐이야. 지혜로운 소크라테스여! 용맹한 카이사르여! 그리고 도올 선생님!"

"곧 빛을 발하게 될" 내 머리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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