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나의 친구들이여, 벗은 없구나.
- 아리스토텔레스 (추정)
이름에 관한 첫 번째. 윤혜준의 <바로크와 '나'의 탄생 - 햄릿과 친구들>(문학동네 펴냄). D.를 통해 우연히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알게 된 순간, 제목 안의 친구라는 낱말에 마음이 솔깃해진 나는 꽤 오래 전 어떤 사람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당시 나는 유학을 앞두고 있었고 유학지에서는 모리스 블랑쇼에 대해 공부할 생각이었다. 유학지의 지도 교수에게 미리 보내놓은 연구 계획서에는 블랑쇼의 글쓰기에서 우선 우정의 문제를 탐구하고 싶다고 썼다.
1940년 33세의 블랑쇼는 10세 연상의 조르주 바타이유와 처음 만나 1962년 바타이유가 뇌동맥경화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서로의 사유와 글쓰기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둘도 없이 가까운 친구 사이를 이어나갔다. 친구가 죽은 지 9년 후, 블랑쇼는 그 동안 여기저기 기고한 예술론, 문학론 등을 모아 <우정( L'Amitié)>이라는 제목으로 묶고, 책 첫머리에는 친구와 우정에 관한 바타이유의 문장들을 제사로 붙이고, 책 끝 부분에는 애도문에 해당하는 동명의 짧은 에세이를 덧붙인다. 한 마디로 <우정>은 살아 있을 때의 친구의 말, 친구가 죽은 다음의 나의 말, 그리고 친구의 죽음에 대한 나의 말을 모아, 그 모든 것의 기원인 친구에게 최종적으로 돌려준다. 어떤 것이든 떠나온 곳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은 선물이라 할 수 없으니, 헌정사는 없는, 선물의 비애로운 불가능을 증언하는 책이다.
| ▲ <바로크와 '나'의 탄생>(윤혜준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는 대뜸 물었다. 그런데 친구가 뭐니. 뜻밖의 질문에 나는 어물어물 대답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또 물었다. 그래서 너한테 친구는 뭐니. 나는 또 더듬거렸다. 그래서 우정이 뭐라는 거야. 그는 어떤 대답에도 만족하지 않았고, 그것을 듣지 못한 척 미묘하게 비슷한 질문을 반복했고, 그래서 친구가 뭐냐고, 그런데 우정은, 너한테 우정은 어떤 거야, 그러면 친구는, 뜻밖의 집요함에 놀라, 나는 점점 더 더듬거린다. 질문의 해석 자체가 답이 되는 질문을 나는 해석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에 맞는 답을 말하지 못했다. 창밖이 어스름해져 이상한 문답 놀이가 사그라들었다.
이름에 관한 두 번째. 개인적 에피소드와 별도로, 서구 문학과 예술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바로크와 '나'의 탄생 - 햄릿과 친구들>이라는 제목에 의아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다. 바로크는 무엇보다 건축, 조각, 회화 등 시각 조형 예술에서 만개했던 양식이 아닌가. 또는 비발디, 텔레만, 퍼셀, 라모, 바흐 등의 음악에서. 문학이라면 스페인과 독일의 드라마가 우세하고, 프랑스에서는 코르네이유 정도가 겨우 언급되지 않나. 바로크는 과연 영국 문학에 적합한 수식어인가. 셰익스피어 드라마의 바로크적 특질이 거론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햄릿을 바로크의 대표적 주체로 삼을 수는. 게다가 햄릿의 친구들이라니, 호레이시오 외에 또 누구인가.
궁금증은 표지를 열어 목차를 확인하고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 해소된다. '프롤로그'에서 윤혜준은 바로크에 관한 기존의 논의를 요약하고 자기의 연구 성과에 의거하여 새로 규정한 다음, 그에 따라 나, 햄릿, 친구 등 저서 제목을 구성하는 다른 핵심 단어들을 어떻게 불러 모았는지 설명한다. 재치 있고 유창한 화법의 저자가 안내하는 대로 이따금 다른 데 한눈을 팔며 책을 따라가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바로크 미학에 관한 어떤 저술에서든 파노프스키, 벤야민, 들뢰즈의 수용과 재해석이 빠질 수는 없다. 세 사상가는 각각 '바로크란 무엇인가', <독일 비애극의 원천>, <주름 -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바로크 예술의 형식적 속성은 물론이고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이전까지 바로크를 특정 지역과 장르의 지배적 양식으로 만든 역사적 조건, 바로크 양식이 팽배했던 시대를 살아간 주체의 심성 구조와 철학적 기반, 당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계승된 바로크적인 것 등을 탐색한다. 파노프스키 외 많은 학자들이 전제하고 동의하는 바에 따르면, 바로크는 신교의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1545년 가톨릭교회 측에서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교리를 정비하고 반종교개혁 운동을 펼치면서 후원한 예술 양식이다.
윤혜준은 이러한 기존의 학설을 다소간 대담하게 수정한다. 요약하자면, 종교개혁은 개인이 교회의 중재 없이 죄와 구원의 문제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발생시켰고, 이에 따라 '나'라는 근대적 주체가 탄생하는 조건이 마련되었다. 여기서 윤혜준은 바로크는 반종교개혁의 산물이긴 하지만 "반종교개혁의 원인이 종교개혁이었으니, 바로크의 계기가 종교개혁이라고 하든 반종교개혁이라고 하든, 그 의미는 별 차이가 없다"(17쪽)고 비약하면서, 책의 주제인 '바로크'와 '나'의 탄생을 단숨에 접합한다. 가톨릭적 세계상과 개신교적 주체의 급작스러운 충돌이다. 또는, 개신교적 주체에 의한 가톨릭 문화의 시대를 초월한 전유다. 인간이 교회의 중재 없이 신과 대면하듯, 개신교적 주체는 가톨릭의 간섭 없이 바로크 문학과 예술을 향유하는 것이다. 바로크 양식이 가톨릭 문화권을 넘어 신교국의 음악과 건축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책의 가장 핵심적인 논제인 만큼 더욱 섬세하고 정치하게 전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논증의 비약, 그리고 시대착오적 접합으로 더욱 생생해지는 균열과 아득함은 저자가 책의 여러 부분에서 강조하는 바로크적인 속성에 해당한다. 언술의 형식이 내용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윤혜준은 파노프스키를 따라 바로크를 "갈등과 모순, 괴리를 봉합하지 않거나 못하며, 대립의 양태를 그대로 사유하고 형상화하여 '나'의 시각에서 주관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 입장, 전략"(17~18쪽)이라 정의한다. 이 정의는 "갈등의 용기와 대립의 정직함"(19쪽), "다성음악의 이중성, 그 긴장의 유산"(19쪽), "회의와 확신, 환상과 실상이 대립하는 바로크의 안개"(32쪽), "바로크의 대립과 간극"(45쪽), "급전환"(130쪽), "대립과 대조"(131쪽), "팽팽한 긴장 상태"(131쪽), "극과 극의 대조"(135쪽), "무와 전부, 극대치와 극소치, 극과 극이 서로 겹쳐 있는 바로크의 심연"(137쪽), "선명한 대립과 강렬한 대조"(183쪽), "극에서 극으로 전환"(183쪽), "충돌과 경쟁"(183쪽) 등으로 짧게 반복 변주되며 책 전체를 통해 파상적으로 퍼져나간다. 텍스트에 크고 작은 바로크적 주름을 잡는다.
벤야민의 통찰에 따르면 <햄릿>은 이 같은 바로크적 분열과 그것에 수반되는 멜랑콜리를 기독교적 신의 섭리 안에서 극복한 유일한 드라마다. 벤야민 덕분에 햄릿은 영국과 덴마크라는 바로크의 변방에서 바로크의 빛을 멀리 되비추는 인물로 떠오른다. 윤혜준은 자신의 책에 햄릿을 등장시킨 까닭에 대해 유령, 독백, 개혁, 복수 등 "<햄릿>에 나오는 몇 가지 주제에 따라 내용을 배열"(11쪽)했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하는데, 바로크와 햄릿이라는 새로운 이질적 접합은 이처럼 벤야민의 유령을 불러낸 다음에야 비로소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신역사주의의 시각에서 비텐베르크 대학생 햄릿이 당대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언급하고, 극 중 초월자에 대한 햄릿의 믿음과 신의 섭리에 따른 드라마의 진행을 예증한다는 점에서, 윤혜준은 벤야민의 해석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킨다. 그리고 렘브란트, 파스칼, 바흐처럼 정신의 바로크적 심연을 "구원에 대한 믿음의 빛줄기"(126쪽), 믿음과 계시에서 차오르는 "기쁨의 눈물"(147쪽), "인간의 고통과 불안, 슬픔과 실수를 바라보며 치유하는 천상의 음악"(156쪽)으로 극복한 당대의 예술가와 철학자를 햄릿의 친구들로 불러 모은다. 신의 계시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파스칼과 예수의 수난에 참회하며 눈물 흘리는 베드로의 자리에 저자 자신을 놓음으로써 그 역시 햄릿의 친구가 된다. 저자는 어쩌면 생의 어느 전환적 순간 눈물 흘리는 자신을 경험하지나 않았는지, 그리하여 그 불가해한 감성적 급전환 이후 나의 새로운 탄생을 설명할 기제를 구하는 도정에서 바로크라는 미의 세계를 재발견하게 된 것은 아닌지, 텍스트에 소소히 흩뿌려진 단서들을 주워 모은 독자의 짐작이다.
제목은 '햄릿과 친구들'이지만 책 안에서 윤혜준은 친구와 벗을 구분한다. 친구는 우선 책의 내용에 의거하여 "햄릿과 '같은 편'에 서 있는 인물들," "'집단이나 제도, 전통의 힘에 맞서서 근대적 개인의 중요성 및 존재감을 강조하는' 진영"(12쪽)에 속한 당대의 실존 인물들을 지칭한다. 위에서 언급한 렘브란트, 파스칼, 바흐 외에 몬테베르디, 몽테뉴, 피프스 등이 속한다. 친구들은 "한 시대의 중심적인 대결의 장에서 같은 편에 서"(12쪽), 나와 함께 시대의 "난제들과 씨름"(197쪽)한다. 즉, 친구는 군사 메타포가 없지 않은 목적 지향적 존재다. 각자의 활동 분야에서 동일한 목표를 달성하려 투쟁하는 미지의 동지라고 하는 편이 더욱 정확하겠다.
반면, 벗은… 나는 벗에 대한 윤혜준의 말을 나의 말로 바꿀 수 없다. 독자로서 무책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우선 몽테뉴의 목소리를 빌려, 벗에 대해서는 "달리 말할 방법이 없"(21쪽)어 "이 책에서 탐구하지는 않는다"(20쪽)고 밝혔듯, 윤혜준 자신의 벗에 대한 말과 마음이 그 이름을 불러낸 직후 모호한 묵언 속에 주름 접혀 들어가기 때문이다.
호레이시오에게 햄릿이 그러했듯, 몽테뉴에게 라 보에시가 그러했듯, 같은 지평을 바라보며 한세상 함께 살아가는 친구와 달리 벗은… 윤혜준의 맥락에서 벗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포괄하지 못하는 어떤 너머, 어떤 바깥, 어떤 남음. 벗은 그 이름 붙이기 어려운 초과와 잉여를 위한 이름이자, 또한 이제 없는 어떤 존재, 더욱 이름 붙이기 어려운 어떤 부재, 결여, 상실의 초상을 위한 이름이다. 바로크의 시간에 친구들은 있어도 벗은 없다. 심연, 비애. 윤혜준의 책은 몽테뉴의 <에세>와 블랑쇼의 <우정>처럼 그의 벗과 함께 생겨나 이제 없는 그 벗의 자리에 놓인다. 절대자를 향한 기쁨의 눈물로도 대체하지 못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아름답고 정다운 "재잘거림과 수군거림"(195쪽)의 흔적을 말줄임표로 그려 넣는다.
…als Hören der Stimme des Freundes, den jedes Dasein bei sich trägt.
친구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각각의 현존재가 자기와 함께 데리고 다니는.
누구든 자기 곁에 품은 친구의 목소리를 듣듯.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중에서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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