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어의 전반적인 목적은 사고의 폭을 줄이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자네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궁극적으로 우리는 사상범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말 거라네."
(<1984>(조지 오웰 지음, 이기한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펴냄) 중에서. 인용 순서대로 87, 89쪽)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위의 대사가 유독 기억에 남아 있다. 빅브라더의 통제를 받는 소설 속 세계에서 구어로 지칭되는 현재의 언어는 점차 사라지고, 자유니 혁명이니 하는 단어들이 삭제된 신어(뉴스피크어)가 곧 널리 사용될 것이라는 대목이다. 신어에는 갖가지 범죄들을 부르는 이름들도 없는데, 이름이 없으므로 상상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으므로 범죄를 저지르기란 불가능하다고 한다.
추상명사들이나 정도와 상태에 관한 형용사, 부사들을 말하거나 쓸 때마다 곤란을 겪었던 적이 꽤 있는 나는 이 대화를 종종 생각했다. 이런 단어들은 사람들마다 다른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는데, 빅브라더의 논리대로 자유라는 말이 없다면 우리는 대체 어떤 자유를 생각하지 않게 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나의 짧은 생각에 의하면 개념은 언어보다 앞서고, 어떤 것의 이름은 언제나 후에 붙여진다.
이후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김한영·문미선·신효식 옮김, 동녘사이언스 펴냄)을 읽게 되었을 때 나의 의문은 다른 방식으로 해소되었다. 핑커는 자유나 평등 등의 개념은 부를 이름이 없어도 사유되고, 새로 등장하게 될 세대는 신어를 크리올어화시켜 자연언어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단언한다.(121쪽)
| ▲ <모든 언어를 꽃피게 하라>(로버트 레인 그린 지음, 김한영 옮김, 모멘토 펴냄). ⓒ모멘토 |
<모든 언어를 꽃피게 하라>를 읽다 보니 한 가지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다소 생뚱맞을 수도 있지만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일본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서민층인 주인공 여성이 재벌가 남자친구의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을 예로 들고 싶다. 일본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주인공이 어떤 인사말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넌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구나"라며 면박을 준다.
일본어에서는 경어의 쓰임새가 한국어의 그것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은 그 후 듣게 되었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은 무리 없이 쓰는 경어를 잘 사용하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장면은 흔히 상류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언어를 통해 계급을 가르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국가는 국민들을 단결시키기 위해(혹은 통제하기 위해) 단일한 언어를 구축하고자 하고, 어떤 식으로든 좀 더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계급 내부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조금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묘한 차이점이 아닐까.
그러나 얼마나 통제하고 차단하더라도, 언어는 어떤 식으로든 적응력을 보인다. 몇 년 전 서울시청 홈페이지 게시판에서는 '명바기'나 '쥐바기' 등의 단어를 입력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이를 대체하는 또 다른 단어들을 고안해냈다. 이렇게 생겨날 수 있는 단어들의 목록은 다소 과장하자면 무한대로 늘어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꽃보다 남자>의 주인공이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는 결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녀가 새로 꾸리게 될 가정에서는 시어머니와는 다른 언어를 자연스레 사용하게 될 것이다. 언어는 자율적으로 변화하고, 우리는 이를 매일같이 체험한다.
최근 내가 겪은 변화의 양상 중 하나는 줄임말을 전보다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전 요새 '아싸'가 된 것 같아요." 순간 '아싸라비아'의 준말인가 생각했던 나는 그 뜻을 물었고, 아웃사이더의 줄임말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이런 줄임말들을 들을 때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야마다 에이미의 한 소설에서 화자가 미국인들은 오렌지주스를 OJ라 부른다며 비웃던 대목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 단어가 짧아지는 만큼 사고의 폭도 줄어든다는 뜻이 담긴 비웃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핑커나 레인 그린은 아마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선관위" 등의 줄임말에는 별 거부감이 없지만(아마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음절의 개수가 많지 않은 단어들을 구태여 줄여 부르거나, 일종의 은어처럼 사용되는 줄임말들을 들을 때마다 무언가 간지러운 기분이 든다. 일단은 익숙하지 않아서일 거고, 그런 줄임말들을 사용하는 집단에서 배제되었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일 거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김치찌게"라고 적힌 식당 메뉴를 볼 때마다 속히 "김치찌개"로 고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해마다 새로 표준어로 등재된 단어들을 볼 때마다 "잊혀진"이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꽤나 많이 발견된다. 나 역시 언젠가 "잊혀진"이 표준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배신감이 얼마나 컸던지.
그러니까,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의문은 이것이다. 그렇다. 언어의 다양성은 매혹적이다. 언어는 꾸준히 변화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잊혀지다'는 받아들이면서 '찌게'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와 '선관위'는 괜찮지만 '여병추'는 괜찮지 않은 이유는 정확히 무엇 때문일까. 이미 완고하게 굳어진 나의 (혹은 이 시대의) 언어적 습관은 무엇을 의미할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