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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야심인가 영리한 결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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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지나친 야심인가 영리한 결말인가

[특집] <극락도 살인사건> 찬반 리뷰

신인 김한민 감독이 만든 <극락도 살인사건>이 화제다. 한마디로 말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간만에 나온, 제대로 된 한국형 미스터리 추리극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의도된 결말로 극적 재미가 반감된데다 우롱받았다는 느낌마저 든다고 입을 모은다. <극락도 살인사건>은 과연 어떤 내용인가. 어떤 영화인가. 이 영화에 대한 찬반의 리뷰를 나란히 싣는다.
[反] <극락도 살인사건>은 고립된 장소에서 한정된 인원 사이에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다루는 수많은 추리극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설정으로 시작되지만, 계획적으로 살인을 모의하고 주도하는 범인은 없다. 우발적 상황을 계속 겹쳐놓음으로써 주민 모두가 서로 죽이고 죽는 학살극의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면서 '범인'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스릴러의 외피 속에 호러의 요소를 차용해 인간의 집단 광기의 공포를 표현하려던 감독의 시도는 꽤 야심만만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어정쩡하고 방만한데다 매우 무책임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112분 동안 16명을 죽이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은 일일 텐데, 춘배(성지루)나 태기(이다윗 – 보건소장을 따르는 남자아이)의 사연, 우성(박해일)과 귀남(박솔미)의 관계, 거기에 고립된 섬에 하나씩 꼭 있을 법한 귀신 얘기까지, 이 모든 것을 미스터리 추리극의 형태에 녹여내려던 욕심 많은 감독이 얼마나 바빴을지는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 집단 몸싸움을 벌여 두셋씩 한꺼번에 '우발적으로' 죽여버리는 설정을 반복함으로써 등장인물의 반을 허겁지겁 처치하는 건 너무 안이하지 않는가? 저마다 사연과 설정을 가지고 있었을 각각의 인물들이 이 '우발적인' 상황의 반복을 통해 천편일률적으로 '극단적 공격성'이라는 성격 하나만 또렷이 드러내는 좀비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여기에 맥거핀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비중이 큰 귀신의 존재는 영화의 흐름을 산만하게 만든다. 귀신이 인간의 신체를 취하는 장면은 (장면 자체는 꽤 큰 공포를 선사하긴 했지만) 도대체 왜 클로즈업으로까지 삽입되어야 했던 걸까? 춘배의 광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너무 넘치는 설명이 아닌가? 사실 '귀신'은 초자연적 존재를 긍정하는 전제를 깔고 있지 않는 한, 대체로 인물의 죄책감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 중 아무도 죄책감을 느끼는 이는 없다. 마을에서 귀신을 보는 것은 춘배와 용봉거사 두 사람뿐이고 그나마 귀신에게 공포를 느끼는 건 춘배뿐인데, 춘배는 죄책감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인물이다. (춘배가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감정은 '호기심'이다.) 그런데 영화의 엔딩에 이르면, 영화의 치명적 결함이라 불릴 만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의도적인 것이었단다. 과연 엔딩에서 밝혀지는 '비밀'은 영화의 앞뒤 맥락을 지나치게 이가 딱딱 들어맞도록 해준다. 저 평면적이고도 표피적인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도, 춘배의 광기도, 귀신도, 태기가 보는 아버지의 환영도, 갑자기 앓아누운 여자아이도, 우성과 귀남만 이성적인 발언을 하는 것도, 한 큐에 다 해결이 돼버린다. 게다가 이 비극의 진짜 원인은 인간을 수단화한, 도시에 있는 자본의 탐욕이었다며 짐짓 엄숙한 얼굴로 설교까지 하려 한다. 영리한 각본의 승리일까? 아니, 이건 매우 무책임한 '데우스 마키나'의 변형판이다. 이야기가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 도저히 수습이 안 될 때 전지전능한 신이 내려와 '말씀으로' 모든 상황을 일거에 정리해버리는 바로 그 '데우스 마키나' 말이다. 허겁지겁 수습하느라 바쁜 막판의 설명조 화면이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최대한의 선의로 이 영화를 이해하려는 이들은 예컨대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1986년)을 주목하여 마을 주민들이 군사독재 하의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기를 강요받았던) 민중들을 상징하는, 시대적 비극을 은유한 사회적 영화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정말 감독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1986년이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거의 보이지 않고, 무전기 외에는 통신수단이 없고 그마저도 고장났다는 설정은 완벽한 고립상황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 더 크므로, 그러한 해석은 지나친 아전인수가 될 것이다. 이 영화에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비록 우발적이고 공포에 질린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손에 피를 묻힌 그 누구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은 전혀 없이 타인의 행동을 비난하고 탓할 뿐이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각본을 직접 쓴 감독부터가 데우스 마키나 설정을 끌어들여 모든 것을 '그것' 탓이라 무책임하게 변명해 버렸는데 캐릭터들이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김숙현 기자
 
[贊] <극락도 살인사건>의 모든 것은 맥거핀이다. 맥거핀. 관객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장치해 놓은 인물 혹은 상황의 설정.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 가지고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한참 동안 '그 일' 혹은 '그 사람'에게만 매달리게 된다. 저 사람이 혹시 살인자가 아닐까. 하지만 알고보면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은 영화속 살인극과 사실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보통의 미스터리 살인극에서는 맥거핀 장치가 하나 정도만 사용되기 마련이다. 그래야 관객들이 극이 어느 정도 지난 후 진짜 범인, 진짜 사건으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극락도 살인사건>이 영리하면서도, 다소 기분나쁜 것, 그리고 관객들을 가지고 감독이 조금 '놀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맥거핀의 장치를 이중 삼중 사중으로 해놓았기 때문이다. 화투판에 있던 덕수(권명환)가 토막난 시체가 된 것도, 학교 교사 춘배(성지루)가 봤다고 얘기하는 여자귀신의 정체도, 이장(최주봉)이 두 아들을 데리고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은 알고 보면 모든 것이 다 엇박자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엇보다 섬 주민 17명이 어느 날 갑자기 모두 다 사라졌다고 하는 엄청난 사건의 전말 자체가 착착 아귀에 맞고 계획적인 음모에 의해 벌어진 것이 아니라 다분히 우연과 우발이 뒤섞여 발생한 것이다. 이쯤 되면, 영화가 거의 끝날 때쯤 되면 속았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에서 잠깐 화가 날 법도 한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를 그렇게 끝까지 오리무중한 상태로 끌고 온 감독의 재기와 똑똑함만큼은 인정하게 된다. 게다가 김한민 감독은 이 영화로 데뷔전을 치르는 인물이다.
조금 속은 감은 들더라도 <극락도 살인사건>이 마음에 드는 것은 영화적 시공간에 대한 고찰, 그 의미때문이다.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극락도는 목포 앞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 그러니까 아주 외지고 고립돼 있는 곳이다. 사건이 벌어지는 때는 1986년 아시안게임이 한창 열리던 때. 왜 김한민 감독은 지금부터 20년전의 목포 앞바다 외진 섬으로 시선을 돌렸을까. 바로 그 점에서 이 영화가 만들어 내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가 찾아진다. 1986년이라면 5공화국의 군부독재 세력이 자신들의 체제유지를 위해 마지막 안감힘을 쓰던 때이다. 당시의 권력자들은 가능하면 국민들의 눈과 귀와 입을 막은 채 (고립시킨 채)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 같은 대규모 이벤트로 사람들의 정신을 마취시키려 했다. 자신들의 독재체제에 순응하도록 길들이려고 했던 것.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의 충돌, 사건, 비극의 결말을 보여준다. 실제로 1986년 즈음의 우리시대는 파국으로 치달았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1986년의 얘기다. 그렇다면 왜 김한민 감독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지금에 와서 되풀이하듯 풀어 놓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의 생각에는 20년전의 우리들 처지나 지금의 우리들 처지가 겉모습만 살짝 바뀌었을 뿐 그 본질은 여전히 같은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아닐까. 과거에는 총칼과 고문의 위협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정신병으로 몰아간 상황이었다면 지금은 그 같은 외형적 폭력은 없어졌지만 내면의 폭력, 정신을 짓누르는 자본의 폭력이 사람들을 점점 더 광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극락도 살인사건>은 한마디로 우리가 해소시키고 근절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내 안의 파시즘'에 대한 얘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바깥에 있는 파시즘은 사실 알고보면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니다. 자기 안에 담겨져 있는 끝없는 자본의 욕망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다. <극락도 살인사건>같은 영화는, 사람이 토막이 쳐지고 사방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다 한들 별반 무섭지 않다가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되면서부터 흠칫 소름이 끼치게 되는 영화다. 사람들을 오랫동안 기분나쁘고 공포에 떨게 하는 영화가 진짜 미스터리 영화다. <극락도 살인사건>은 바로 그 지점에 가깝게 서있는 작품이다. 오동진 편집장
<극락도 살인사건>은 어떤 영화 1986년, 아시안게임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9월. 목포앞바다에서 토막 난 사람 머리통이 발견된다. 사체 부검 결과, 토막 난 머리통의 주인이 인근에 위치한 섬, 극락도 주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특별조사반은 본격적인 수사를 위해 사건 현장 탐문에 나선다. 형사들은 송전 기사의 합숙소와 보건소로 추정되는 곳에서 살인사건의 흔적으로 보이는 핏자국과 부서진 무전기 등을 발견하지만, 끝내 한 구의 시체도 찾아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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