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초선 의원 연찬회에서, 같은 자리에 앉은 여야 의원 십 여 명이 모두 의견일치된 주제가 있습니다. 장애인, 어르신들과 저소득층 복지예산이 크게 늘어나야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분들께 가는 돈이 뭐 아깝겠느냐, 초선의원이 절반이니 올해 예산은 좀 달라지지 않겠느냐 너도 나도 한 마디씩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이 말들이 진짜 덕담일 뿐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습니다. 지난 9월 18일, 리먼 브라더스 파산신청으로 경제위기가 찾아온 며칠 뒤, 국회에서 4조5000억원의 추경예산이 통과되었습니다. 느릿느릿 진행되던 도로공사에 8000억원, 언제 성공할지 예측도 어려운 유전개발 사업에 5500억원이 들어갔습니다. 급한 데만 쓰게 법에 정해진 추경예산인데도요. 올 봄에 4670억원을 배당으로 나눠가진 한국전기공사와 가스공사에 세금 1조원이 지원되었습니다. 2007년에 걷은 세금 남았다고 펑펑 쓴 것입니다. 저는 2009년 본예산으로 이월해서 복지예산 늘리고 정말 필요할 때 쓰자고 반대 토론했지만, 교섭단체들이 합의했으니 통과시켜달라는 목소리가 더 많았습니다.
복지예산은 줄고 건설예산만 늘어
다시 내년 예산안 심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보건 복지예산이 9%나 늘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기초노령연금처럼 자연히 수급자가 늘어나는 것은 따로 계산해야죠. 실제로 보건 복지예산은 1.5%밖에 늘지 않았고, 오히려 기초생활보장예산과 저소득 장애인 지원, 노인 돌봄 서비스처럼 정말 어려운 분들에게 갈 돈은 5271억원이나 줄었습니다. 올해 물가 인상률이 5%를 넘었는데 기초생활보장금은 작년 기준으로 3% 올랐을 뿐이라 물가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받는 분 숫자마저 줄어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지난 1년 동안 그만큼 양극화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일까요?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국 경제를 거덜내는 상황에서 정부가 위기극복 대책이라며 다시 10조원의 수정예산안을 냈건만, 4조6000억원은 SOC 사업예산입니다. 그 전에도 이미 총지출 평균증가율 6.5%보다 높이 7.9% 증액된 예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정예산안 편성 때 유독 건설사업 예산만 크게 늘어난 것입니다.
정부는 도로공사하면 일자리 늘어나고 경기 부양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산업연구원 연구에 따르면, 1조원을 건설에만 쓰면 국내 소득이 1조5290억원 늘지만, 교육과 복지에 쓰면 1조 6390억원이 늘어난답니다. 주먹구구로 따져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구름 위에 도로 깔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공사비의 30%는 땅값으로 땅주인에게 갑니다. 그나마 늘어나는 일자리는 불안정한 일용노동입니다. 오늘 일했던 그 누구도, 내일 또 그곳에서 일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내일 새벽 인력시장에서 다시 팔려나가기 전까지는요.
돈이 희망이 되고 생명이 되기를
도로에 시멘트 붓는데 돈 들이는 것보다 사람에게 돈 쓰는 것이 더 급한 상황이 아닌가요. 건설예산은 건설사 계좌 잔고로 남지만, 방과 후 학교와 장애인 활동보조인 늘어나면 수백만의 어린이, 청소년과 장애인에게 희망이 됩니다. 전기료 낼 돈이 없어 하루 200W, 형광등 2개와 190리터 냉장고 하나와 14인치 텔레비전 한 대로 버텨야하는 어르신이 추위에 전기장판 한 시간 더 켤 수 있습니다. 더 살까 말까, 구차한 세상 차라리 떠날까, 고뇌 속에 새벽을 맞을 가난한 가장의 목숨을 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저는 돈이 그저 숫자로 남는 쪽이 아니라 희망이 되고 생명이 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무너져가는 삶을 떠올리면 확 바꾸고 싶은 것들이 세상에는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다 접어두고 정말 작은 욕심을 내봅니다. 준법시위 정착 예산, 일제고사 예산, 주한미군 방위비분담 예산, 따져보면 1조원 넘게 아낄 수 있습니다. 감세 철회하면 7조원 더 쓸 수 있습니다. SOC 예산 5조 줄여서 합치면 13조원입니다. 한 시간 최저임금 3770원도 못 받는 174만명의 노동자들에게 정부가 먼저 최저임금만큼 지급하고 사업주로부터 뒤에 돈 받아내는데 얼마 안 듭니다. 7200억원이면 최저임금제조차 유명무실한 노동현실을 바꿀 수 있습니다. 쌀 직불금 현실화하고 농가부채 이자 감면하는 4조2000억원이면 집단 고려장 당하는 농촌의 어르신들께 희망을 드릴 수 있습니다. 임대아파트에서 임대료조차 못내 쫓겨날 임대아파트 거주자들의 체납액 탕감도 306억원이면 됩니다. 반값 등록금, 3조원이면 됩니다.
이 경제위기를 넘어서려면, 어렵지 않게 끌어낼 수 있는 13조원부터 서민 살리기에 써야 합니다. 아무리 제2의 IMF가 오더라도, 우리가 또 다시, 없는 사람일수록 고통스러웠던 그 기억을 되풀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조금이라도 더 서민 살리기에 써야 이 위기를 함께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절망하지 않고, 가족이 갈갈이 찢기지 않고, 목숨을 빼앗기지 않고.
정부는 감세안부터 거둬들여야
서민 살리기에 쓰려면 세금을 늘려도 모자랄 판인데, 정부와 한나라당은 11조원 규모의 감세안을 내놓고 있습니다. 오직 37만 세대만 내던 종합부동산세를 줄이겠다고 합니다. 위헌결정으로 6000억원의 환급금마저 내놓아야하는 형편입니다. 전 국민의 0.7%만 내는 상속세를 줄인답니다. 상속세가 높아 자산이 해외로 나가기 때문이랍니다. 돈 좀 버는 사람일수록 혜택을 보는 소득세법 개정안이 나와 있습니다. 정반대로 돌아가는 세상, 정 붙일 곳 없는 세상이 우리들로부터 희망을 빼앗아갑니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감세안부터 거둬들여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말씀하신 "희망의 출구"는 감세로는 절대로 우리 앞에 오지 않습니다.
절망으로 가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눔입니다. 여유 있는 분들이 조금 더 마음을 내면 어려운 분들이 삶의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 필요합니다. 지금 감세안 밀어붙이기는 최소한의 배려조차 없는 것입니다.
국회의원들에게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세요
지금 예산 자르고 붙이기 바쁜 국회의원들의 가슴에, 올 봄 선거운동 때 만나셨을 산동네 할머니 얼굴이 자리 잡고 있기를 바랍니다. 70 청춘 농민의 거친 손 잡았던 기억이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국민 여러분이 바로 그 얼굴이 되어주셔야 합니다. 지역구 의원들에게 전화하시고, 찾아오십시오. 노동조합 조끼만 입어도 들어서기조차 어려운 국회 정문이지만, 내가 뽑았는데 누가 뭐라느냐고 호통도 치시고, 오셔서 말해주십시오. 내가 당신이 섬겨야 할 바로 그 사람이라고, 당신을 이 자리에 앉힌 사람이라고요.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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