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그룹이 오너 경영 체제로 복귀할 조짐이다. 지난 7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삼성전자 완제품(DMC) 부문장 최지성 사장은 지난 5일 <조선일보> 기자에게 "회사 경영을 정상화해야 한다"며 "다시 오너 경영체제로 돌아가는 문제를 고민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지난해 4월 이후 삼성 주요 계열사 사장이 '오너 복귀'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이 보도 이후, 경제지를 중심으로 비슷한 보도가 잇따랐다. 삼성 계열사 간 갈등을 조정하고, 과감한 투자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오너와 전략기획실, 각 계열사 경영진으로 이뤄진 이른바 '삼각편대식 경영체제'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삼성 그룹 동향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이런 주장은 낯설지 않다. 삼성 주변, 증권가 등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건희 전 회장의 경영복귀설이 끊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반박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공개적으로 경영 퇴진을 선언했는데, 설마 그렇게 쉽게 말을 바꾸겠느냐"라거나 "배임 및 탈세 등 대형 경제범죄가 확정된 지 얼마나 됐다고…"라는 목소리다.
하지만 최근 삼성 주변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모아보면, 이 전 회장의 경영 복귀설에 힘이 실리는 게 사실이다. 지난해 4월 이 전 회장의 경영 퇴진 발언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이들만 모양이 우습게 됐다. 더 끔찍한 일은 재벌 회장이 공개적으로 한 약속을 깰 조짐이 보이는데 아무런 비판 여론이 일지 않는다는 것. 삼성전자에서 18년 동안 일했던 김병윤 두레스경영연구소 소장은 이런 상황이 몹시 안타깝다. 삼성전자 부장 출신인 그는 <고르디우스의 매듭>, <대한민국 판도라 상자를 열다> 등의 책을 통해 한국 재벌과 기득권층,언론관련법의 문제점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 소장이 <프레시안>에 보낸 글을 싣는다. <편집자>
2년 만에 돌아선 언론인들, 그들에게도 양심이 있을까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리를 공개한 게 지난 2007년 10월이다. 채 2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변한 게 많아 보인다. 특히 언론이 그렇다. 김 변호사의 양심 고백 당시 기득권층의 잘못에 대해 쓴 소리를 낼 수 있는 매체의 비율이 30%쯤 됐다면, 지금은 5%도 안 되는 듯하다. 김 변호사가 2007년이 아니라 2009년에 양심 고백을 했더라도 당시와 같은 파장을 낳을 수 있었을까. 최근 언론 동향을 보면, 답이 나온다. 삼성에 비판할 수 있는 매체는 2년 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씀이 떠오른다. 양심에 따라 글을 써야할 언론인과 지식인들이 단지 행동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노골적으로 악의 편에 선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족벌언론이 재벌 기득권을 옹호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 재벌에 대해 할 말을 하던 언론까지 입장을 바꾼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들 방송, 신문 종사자들에게도 양심이라는 게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얼마 전 통과된 언론 관련법까지 시행된다고 생각하면,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이건희의 행운, 과연 우연이었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치러진 2009년 5월 29일. 대법원은 삼성 에버랜드의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에 대해 6:5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사실상 범죄에 가까운 대기업의 불법 행위에 대해 법원이 면죄부를 준 것이다. 제3자에게 저가로 전환사채를 발행하면 불법이라는 점은 법원 역시 부인할 수 없었던 진실이다. 따라서 이 사건이 제3자 배정인지, 주주배정인지에 대한 판단이 당시 대법원 판결의 핵심이었다. 이 문제를 놓고 대법관들은 절반씩 입장이 나뉘었다.
만약 당시 전환사채(CB) 인수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에버랜드 주주회사의 경영자들을 기소하였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적어도 이건희 전 회장과 이들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었을 게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삼성 에버랜드 CB 사건 재판 전체 판도도 좀 달라졌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검찰은 삼성 에버랜드 CB 인수를 포기한 경영자들을 기소할 시점을 놓쳤고, 공소시효가 지났으므로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건희 전 회장으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진짜 우연의 산물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삼성의 말바꾸기, 기망당한 법원
삼성특검 사건 1심 선고가 내려지기 5일 전에 이건희 전 회장의 변호인단이 1심 재판부에 양형참고자료와 변론요지서를 제출한 사실이 알려졌다. 경제개혁연대가 공개한 이 자료를 보면, 2008년 7월 11일자 서울지방법원의 접수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이 자료에서 이건희 전 회장 측은 삼성 에버랜드에 970억 원, 삼성SDS에 1539억 원을 지급했다고 밝혔다. 특검의 공소장에 기재된 금액과 한 푼의 에누리도 없이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 전 회장 측은 양도세 포탈세액 1830억 원을 이미 납부했으며, 심지어 특검이 기소도 하지 않은 증여세 미납분 4800억 원을 자진해서 납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건희 전 회장은 양형참고자료에서 주식의 헐값 발행은 회사의 손해가 아니므로 무죄임을 주장하면서도, "기존 주주들에게 그들이 보유한 주식의 가치가 희석되는 손해가 발생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는 전제 하에 "이 사건과 관련하여 더 이상의 논란이 계속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에서…삼성에버랜드와 삼성SDS 주식의 적정 가치를 따지지 않고 공소장에 손해액으로 기재되어 있는 전액을 위 각 회사에 지급하였다"고 밝혔다. '헐값 발행은 인정하나 헐값 발행은 회사의 손해가 아니므로 형사적으로는 무죄지만, 헐값 발행에 따른 기존주주의 민사적 손해는 도의적 책임상 변제하니 선처해 달라'는 요지인 것이다.
그런데 두 회사는 이렇게 받은 돈을 회계처리하지 않아 분식회계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형이 확정되자 삼성의 한 고위임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무죄가 확정되면, 이건희 전 회장에게 다시 돌려주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라고 했다. 어이없는 발언이다.
양형참고자료는 말 그대로 피고인이 재판부의 유무죄 판단 및 처벌수위에 영향을 미칠 의도로 법원에 제출한 공식 자료이다. 그런데 판결 전후로 이렇게 말을 바꾸는 삼성의 행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삼성이 법원을 기망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법적 문제 없다는 주장은 수법의 교활성만 드러낼 뿐"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삼성 그룹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낸 세금이 16억 원쯤 된다고 한다. 정용진이 신세계를 승계하면서 낸 세금이 3500억 원이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아버지인 이병철 전 회장으로부터 삼성그룹을 승계할 때 낸 세금은 253억 원이었다. 그런데 그룹의 규모와 위상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지금, 경영권 승계를 위해 16억 원 이외에 어느 정도의 세금을 내려는지 추측만 난무하고 있다. 대재벌인 삼성이 왜 작은 돈 때문에 욕을 먹으려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삼성 측은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지 모른다. 삼성 지배구조의 핵심은 에버랜드인데, 에버랜드 CB 사건이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울 게다. 하지만 법적인 문제가 제거됐다고 해서 삼성 승계 과정이 깨끗했다고 믿는 이는 거의 없다. 오히려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주장은 삼성이 쓴 수법이 얼마나 교활했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교활한 수법으로 진실을 가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제2의 김용철 변호사'가 나타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또 진보개혁 정권이 들어서서 과거 재벌의 비리에 메스를 들이댈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해서 법원에서 삼성에 우호적인 판결을 한 법관들 중에 삼성 장학생으로 관리되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로 드러난다면, 상황은 바뀔 수 있다. 지금 웃고 있을 삼성 장학생들에게는 '역사의 심판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사회환원용으로 검토했던 자금, 어떻게 조성할 계획이었나"
이 전 회장 등이 무죄 판결을 받게 되면 수조 원대 자금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안이 삼성 내부에서 검토된 적이 있다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요즘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궁금한 게 있다. 이렇게 사회환원용으로 검토했던 자금의 출처와 조성 방식, 그리고 향후 사용처다. 시민사회의 감시가 절실한 대목이다. '삼성은 어떤 방식으로 사회환원 자금을 조성하려 했는가.' '그리고 그 돈 가운데 일부라도 이미 마련했다면, 그 돈은 지금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등과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내가 재벌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좌파, 또는 진보라는 꼬리표를 달려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저 중도일 뿐이다. 그리고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치우지지 않고 진실 그 자체만을 쫓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바로 '정서적 화해'다.
재벌과 보수 언론, 법조계 상층부 등이 똘똘 뭉쳐 있는 게 한국 보수 집단이다. 그리고 이들의 뿌리는 친일파다.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일본군 장교로서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한 친일파'와 '여순 반란에 가담한 군부 내 남로당 요원' 사이를 오락가락한 인물도 있기는 하다. 보수 집단의 이런 뿌리는 가리려 한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다. 진지한 반성, 사죄가 있어야만 한다. 이들이 국민 앞에서 눈물로 고해성사를 한다면, '정서적 화해' 역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범법자 된 이건희, '씻김굿'으로 거듭나야
이건희 전 회장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비리 혐의 대부분에 대해 면죄부를 받았지만, 그래도 털지 못한 죄는 있다. 법원은 그가 조세 포탈 및 배임죄를 저질렀다는 점을 분명히 못 박았다. 다만 죄에 상응하는 벌을 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극악한 범죄자라해도 갱생의 가능성은 있다. 천문학적인 비리를 저지른 범죄자라고 해도, 죄를 씻고 새 사람으로 거듭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이 전 회장이 범법자라는 낙인에서 벗어나, 분노한 국민과 정서적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바로 '정서적 씻김굿'이다. 아무리 큰 죄를 저지른 자라도 어느 순간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가족의 누군가에게는 자기 진심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경험한 그러한 극적인 순간들을 국민들 앞에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내가 <대한민국 판도라 상자를 열다>의 2쇄에서 언급한 '정서적 씻김굿'의 본질이다.
무기명 채권 활용 내역부터 공개하라
이 전 회장에게 '정서적 씻김굿'은 간단한 일이다. 중소기업에 불공정한 거래 관행을 강요하지 않고 상생을 위한 사업영역의 구분과 실질적인 지원, 전략기획실 운영의 양성화를 포함한 기업 운영에서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 그리고 과거의 관행 중에 잘못된 것들에 대해 겸허하게 고백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것 등만 하면 된다.
투명성에 관해서는 마침 좋은 사례가 있다. 김준규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무기명 채권이 상속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 논란이 됐다. 무기명 채권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지하자금을 끌어내고자 했던 의도로 도입됐지만, 이후 변질되어 편법증여나 정치자금으로 활용됐다. 삼성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이 전 회장이 그동안의 무기명 채권 활용 내역을 공개한다면 어떨까. 이것이 가능하다면 국민들의 호의적인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훌륭한 씻김굿이 될 것이다.
이건희를 뻔뻔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
일각에서는 이 전 회장이 삼성 경영에 복귀할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별로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20년 가까이 삼성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전 회장이 그렇게까지 뻔뻔한 사람은 아니라고 본다. 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난 게 불과 얼마 전인데, 경영퇴진을 공개적으로 약속한 게 고작 1년 전인데, 이 전 회장이 삼성 경영에 복귀할 리가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전 회장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본다. 이 전 회장을 최소한의 양심조차 없는 사람으로 취급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는 국민들의 정서를 철저히 외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부디 삼성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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