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1년 10월 9일, 가을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린다. 오늘의 화두는 온통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공습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무도 오늘이 555돌을 맞는 한글날임을 주의하거나 기억하는 것 같지 않다.
다만 몇몇 국어와 한글을 사랑하는 뜻 있는 사람들이 덕수궁 뜰 안의 세종대왕 동상 앞에 모여 꽃을 바치고 조촐한 기념식을 치룰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글날은 나라와 민족의 큰 잔칫날이었다. 한글날이 가까워 오면 신문과 방송들이 온통 한글의 우수성을 새로 새기고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의 공덕을 기리고 칭송함에 인색하지 않았다.
한글날 하루만은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우리 민족이 한글이라는 고유한 글자를 갖고 있다는 자부심과 그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임을 가슴 뿌듯하게 자랑했다. 그리고 그날을 기해 지난 일년 동안 한글과 국어 연구에 묵묵히 정진해 온 숨은 일꾼들을 찾아내어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고런 이들의 숨은 노력에 고마움을 표시하곤 했었다.
그늘진 곳에서 우리 말과 글을 묵묵히 지켜 온 이들은 그런 국민들의 격려에 일년간의 피로와 무관심을 깨끗이 잊고 새로운 각오와 희망을 품었다. 다음해에도 한글날은 어김 없이 돌아 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또 다시 무관심과 냉대를 홀로 삭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참으로 아름답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오늘 555돌의 한글날은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한글에 대한 애정이나 긍지가 사라져 버렸다. 쓸쓸하고 초라하다. 어찌하다가 한글날이 이렇게 되었는가?
모든 것의 시작은 1990년 한글날이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되면서부터이다. 당시 정부는 구정과 추석 공휴일을 사흘로 늘이면서 너무 노는 날이 많다는 이유를 내세워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했다. 이것이 결정타였다.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진 이후로 한글날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급속히 식어 갔다. 신문과 방송도 한글날에 국어나 한글 연구에 관한 보도를 게을리 하기 시작하더니 언젠가부터는 한글에 관한 보도를 아예 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국민들도 우리말과 글에 관심이 급속히 식어 갔다. 그래서 오늘 555돌 한글날은 잊혀진 채로 쓸쓸하고 초라하게 지나가고 있다.
인간은 예부터 어떤 기념할 만한 일이 있으면 그 일을 모두가 기억할 만한 행위를 통해 알려 왔다. 우리 선조들은 아이의 백일에 이웃들에게 떡을 돌렸다. 이웃들은 떡을 받음으로써 이웃집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떡을 받으면 누구나 “이게 웬 떡이냐?”고 묻게 마련이다.
그러면 그 떡의 의미를 누군가가 설명해 준다. 백일 떡은 이렇게 하나의 기호로서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법정 공휴일의 기능도 이와 비슷하다. 어린 아이고 어른이고 놀지 않는 날은 기억하지 않는다. 하루를 놀아야 그날 왜 노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까닭을 알려고 한다.
우리 민족이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발명품은 한글밖에 없다. 한글은 또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의 문화 상품이기도 하다.유네스코에서 제정한 문맹 퇴치에 공이 많은 사람에게 주는 상의 이름도 ‘세종대왕 상’이다.
인류의 문명은 글자의 발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기에 문자가 이미 발명된 시기인 청동기 와 철기 시대는 각기 청동기 문명, 철기 문명이란 용어가 성립해도 문자 이전의 시기인 석기 시대에는 구석기 문명이나 신석기 문명이란 말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민족이 문명을 갖기 시작한 것은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들어 주신 뒤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한자를 썼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는 한자 문명권의 변두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한글은 우리 민족에게 문명을 갖도록 해 준 실로 중요하고 고마운 존재이다. 그러나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에서 내 쫓은 지 10년만에 이런 자랑스러운 사실들이 국민들 마음에서 지워져 가고 있다.
이는 단순한 한글날의 망각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지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문화 민족으로서 갖고 있는 긍지의 상실이다.
무릇 기려야 할 일이 있으면 그날을 기해서 무엇인가 기념이 될 만한 행위를 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일은 잊혀지게 마련이다. 아주 간단하고 분명한 사실이다.
한글이 정말 우리 민족이 세계적으로 내세우고 자랑할 만한 것이라면 마땅히 한글날을 기념하여 하루를 놀아야 한다. 하루를 논다고 경제적 손실이 얼마다 하는 단순 경제 논리는 소탐대실의 본보기 가운데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예가 될 것이다.
제발 내년에는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로 놀고 싶은 것이 내 생애 가장 쓸쓸하고 초라한 한글날을 맞는 나의 바람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