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쿠바의 카스트로가 '주체사상'을 선택한 이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쿠바의 카스트로가 '주체사상'을 선택한 이유

안병진의 'X파일 이야기'<8> 한반도에 던지는 메시지

과연 11월에 열릴 제5차 6자회담은 성공할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 10월 31일자 기사에 따르면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이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는 현재 매우 약화된 부시 정권이 우익의 강고한 지지를 필요로 하기에 북한과의 합의는 불가능할지 모른다고 강한 회의를 표시하고 있다.

사실 최근 부시 행정부가 대법관 후보로 강경보수 인사를 지명한 것은 커밍스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설령 이후에 획기적인 합의안이 만들어진다 해도 미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오만하고 강압적인 미 행정부와 미국의 북한정권 교체 의도에 대한 히스테리로 가득 찬 북한이 넘어야 할 고비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과거 미국, 소련, 쿠바의 사례**

어쩌면 과거 미국과 소련, 쿠바 간의 험난했던 합의 및 이행 과정은 우리에게 앞으로의 지난한 과제에 대한 약간의 시사점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지난 7회의 연재기사에서 필자는 소련 후르시초프의 (뒤늦은) 신중함, 케네디의 창조적 해법이 3차대전 직전에서 핵 위기를 해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 6자회담처럼 큰 틀에서 모호한 합의안은 만들었지만, 문제는 실행가능한 구체적인 합의안의 도출이었다. 위기가 극적으로 해소된 다음 날인 10월 29일 오전 10시에 이미 문제는 조금씩 불거지기 시작했다.

비록 미사일 철수 약속으로 극적인 위기는 일단 해소되었지만 아직 케네디 행정부의 근심거리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바로 목에 가시 같은 카스트로를 다루는 문제였다. 비록 쿠바에서 소련 미사일을 철수시킨다 하더라도 카스트로는 지속적으로 남미의 혁명을 지원하며 두고두고 미국을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회의에서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협상팀의 과제 중 하나로 쿠바의 남미혁명 지원 중단을 분명히 거론해야 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조건이 미국의 실수로, 급박하게 만들어진 이전의 합의내용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원래 미국은 후르시초프의 1차 편지에 대한 케네디의 응답에서 이 문제를 강조하려고 했다. 따라서 27일 토요일 4시 ExComm 회의에서 논의된 편지 초안에는 "카리브 해의 평화(peace in the Caribbean)"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미국이 불가침 선언을 하는 전제가 카스트로의 전복행위 중지임을 명시했다. 하지만 그 뒤 후르시초프에게 보낸 최종 편지 문안에서는 이 문구가 누락되고 말았다. 국무부 미주담당 차관보인 마틴이 이 문구 누락의 심각성을 제기하자 행정부는 서둘러 남미지역 미 대사관들에 불가침 선언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쿠바인들의 행동에 달려있다(subject to Cuba behaving herself)"는 전보를 보낸 바 있다(May and Zelikow 1997, 608).

하지만 정권교체 전략을 포기하지 않은 미국에 대한 불신과 미사일을 철수하기로 약속한 소련에 대한 배신감으로 불타오른 카스트로는 미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카리브 해의 평화"를 지킬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예를 들어 10월 30일 본격적인 위기해소 절차를 밟기 위해 쿠바를 방문한 유 탕트 유엔 사무총장 대행에게 "제국주의의 하수인(lackey of the imperialists)"이라며 악담을 퍼부었다(ibid., 664). 당연하게도 카스트로는 미사일 철수에 대한 유엔의 사찰에 어떠한 협조도 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텼고, 관타나모 기지 반환 등 당지 지형에서는 불가능한 요구조건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기만 했다.

더구나 카스트로의 다이너마이트 같은 성미에 불을 붙이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후르시초프는 미국에 양보한 직후 카스트로를 위로하기는커녕 훈계조의 편지를 보내 그의 분노를 폭발하게 한 바 있다. 더구나 미국은 소련 특사인 미코얀이 쿠바로 떠나기 전에 스티븐슨 대사를 통해 제거되어야 할 "공격용 무기" 들의 리스트를 상세하게 작성하여 건네주어 미코얀을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왜냐하면 이 "공격용 무기"에는 중거리 미사일 및 탄두뿐만 아니라 42기의 전폭기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은 아예 이 참에 쿠바를 완전히 무장해제하려고 덤비는 듯이 보였다.

물론 카스트로는 특유의 장광설로 어떠한 형태의 사찰이든 쿠바의 주권을 침해하는 사찰은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러한 사찰을 강요하는 후르시초프의 태도를 심지어 과거 쿠바 내정에 언제든지 개입하게끔 미 제국주의가 부과한 플랫 수정법에 비유하기까지 했다(Blight and Brenner 2002, 75). 카스트로의 극단적인 성미와 주권에 대한 예민한 자존심에 진절머리가 난 미코얀은 결국 소련 당국에 전보를 보내 카스트로의 입장을 수용할 도리밖에 없다고 제언했다.

***미국의 카스트로 다루기**

하지만 미국이 카스트로의 요구를 한 치라도 들어줄 리 만무했다. 미국은 쿠바 침공 준비를 본격적으로 개시하며 소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극적인 위기 기간에 재미를 본 소위 강압적 외교가 재개된 것이었다. 물론 케네디는 마치 지난 6자회담에서의 경수로 절충안 처리 방식과 유사하게 소련이 전투기 철수 시점을 구체적으로 명기하지 않은 채 단지 "빠른 시간 내로(as soon as possible)" 철수한다는 것을 공언하도록 하는 양보안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타협안을 제시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케네디 행정부는 타협안을 거두어들였다. 아마 그들로서는 전폭기 철수 시점을 명기하지 않음으로 인해 후에 소련 측의 악용 가능성을 우려했을 것이다.

우왕좌왕하며 고압적으로만 나오는 미국측의 태도를 접한 후르시초프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이미 비밀합의에서 터키에서의 미국 미사일 철수 문제에 있어 전적으로 미국측의 일정에 위임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미국측도 전폭기 문제에서 상응하는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이 도리였다. 사실 그로서는 마치 낙후된 터키 미사일이 케네디에게 군사적 가치가 없었던 것처럼 노후된 전폭기 또한 군사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정치적 효과였다. 그렇지 않아도 쿠바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받는 그로서는 미국의 강압적 외교에 굴복해 전폭기마저 철수한다는 모양새는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는 최소한 이번에는 카스트로에게 사전 통보를 통해 그나마 분노를 누그러뜨리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시 사항을 전달받은 특사 미코얀은 지극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2일 카스트로를 접견한 자리에서 이 민감한 이슈를 직접 꺼내지도 못하고 빙빙 돌려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른 이의 장광설에는 참을성이 없는 카스트로는 말을 끊으며 도대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미코얀으로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카스트로의 귀를 의심케 하는 것이었다(ibid., 302).

"쿠바에서 전폭기를 철수시키는 것에 우리가 합의해주면 미국으로부터 공식적인 협정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미코얀은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카스트로에게 "다른 군사적 무기(의 제거)에 관해서는 우리는 미국인들에게 철저하고 단호한 거부를 표시할 겁니다"라고 얼른 추가했다. 하지만 카스트로의 입장에서는 소련의 나이브함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문서가 아닌 미국의 불가침 구두 선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미사일 철수라는 엄청난 양보를 결정한 바 있다. 하지만 미국은 다시 전폭기 철수를 추가 요구사항으로 첨가하고 있는데 카스트로가 보기에 소련은 이를 다시 얌전한 양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분노가 폭발한 카스트로는 다음과 같이 미코얀에게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ibid., 302).

"소련이 어떻게 입장을 취하든 간에, 전폭기를 제거하든 안 하든 간에 미국은 사찰을 고집할 것이고, 쿠바가 이를 수용하기 어려운 것을 핑계 삼아 그들은 봉쇄를 지속할 겁니다."

***강대국에 대한 벼랑끝 전술**

그 뒤 카스트로는 최소한의 조건으로서 해상봉쇄 해제와 공중정찰 해제를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협상단이 자신이 승인한 합의안과 다른 내용으로 합의를 시도하는 등 두 강대국이 자신을 철저히 배제하자 위기감을 느낀 카스트로는 특유의 벼랑끝 전술을 통해 두 강대국을 충격에 몰아넣기로 작정한다. 그는 14일 미코얀을 만난 자리에서 향후 미국 정찰기에 대한 격추를 선언해 그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만약 정찰기가 추락한다면 지금까지 공 들여 온 협상도 물거품이 될 것이 뻔했다. 미코얀은 지금까지 미국이 승리를 자축하지 않는 등 신중함을 보여 왔음을 예로 들며 쿠바도 상응하는 행동을 요구했지만 카스트로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러한 카스트로의 비타협적 태도를 보고받은 후르시초프는 다시 한번 카스트로에게 진절머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미국이 심지어 볼샤코프 특사에게 최후통첩의 뉘앙스까지 풍기며 자신을 압박하고 있었기에 조바심이 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마치 목의 가시처럼 그를 괴롭히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심지어 카스트로와의 동맹까지 재고할 필요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변 측근의 설득으로 그는 카스트로에게 마지막으로 3가지 옵션의 선택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것은 유엔 대표나 아직 카스트로와 외교관계를 가진 남미 5개국 대표 혹은 10개의 중립국 대표에 의한 사찰이었다.

20일로 예정된 대국민 연설이 다가오기에 성과를 내야 하는 케네디 행정부로서도 후르시초프처럼 조바심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케네디 행정부는 미사일 기지 지역 사찰이라는 원래의 입장을 포기하고 해상 철수과정에서의 공중정찰이라는 양보안을 제시하였다. 11월 20일 케네디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소련이 한 달 내로 전폭기를 철수하며 미국은 상응하는 조치로 봉쇄작전을 해제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비록 사찰은 포기했지만 공중정찰은 지속됨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이제 위기가 진정으로 해소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과 소련의 마지막 위기해소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전폭기 문제 등 계속되는 소련의 양보에 점차 불안해진 쿠바는 아직도 쿠바 내에 남아 있는 핵무기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비록 케네디에게 약속한 중거리 미사일을 반환한다 하더라도 핵탄두만 계속 보유한다면 향후 있을지 모르는 미국의 침탈에 대한 안보수단이 될 수 있다고 그들은 판단했다. 하지만 미국도 모종의 낌새를 눈치 채고 소련에게 모든 탄두가 쿠바를 철수한 것이 아니라는 정보가 있다고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미코얀은 후르시초프의 재가 아래 카스트로를 설득해 모든 핵무기를 쿠바 섬에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미사일을 둘러싼 위기는 공식적으로 장을 마감하게 되었다. 카스트로의 희망과 달리 쿠바 방어에 사활적인 미사일은 전부 다 철수되어 버렸다. 겨우 남은 것은 소련군 교관들과 소련군이 남기고 간 방어용 무기들밖에 없었다. 어쩌면 미사일이라는 물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련이 가져가버린 연대의 정신이었다. 카스트로에 수차례 진절머리를 낸 후르시초프는 이제 쿠바와 동맹조약마저 체결할 마음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만약 소련이 완전히 등을 돌리면 카스트로는 미국이라는 사자 앞에 던져진 토끼 신세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카스트로는 소련에 대한 극도의 분노감을 숨기고 후르시초프의 구애를 받아들여 63년 4월 소련을 방문하게 된다. 미국의 불가침 선언이라는 공허한 약속을 믿을 수 없었던 그는 방문기간 동안 최대한 소련으로부터 안전보장에 대한 담보를 끌어내고자 했다. 하지만 위기 기간 카스트로의 거친 행동에 진저리를 낸 후르시초프는 공식적 조약 대신 쿠바와의 코뮤니케에서 핵 우산 보장을 명시했다. 하지만 이 정도라도 미국의 위협에 노출된 카스트로에게는 큰 무기가 되었다. 더구나 그는 쿠바에 대한 소련의 방기의 대가로 최소한 소련 군인들을 쿠바 섬에 남겨 인계철선 역할을 수행하고 더구나 무기를 무료로 공급받기로 하는 덤까지 얻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카스트로와의 화해를 위해 거의 31페이지나 되는 구구절절한 편지로 방문을 구애하였고 거의 한 달에 걸친 엄청난 환대로 카스트로를 흡족하게 한 후르시초프였지만 그는 외교의 역사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실수를 범한다. 바로 다름 아니라 카스트로에게 위기 기간 케네디와 교환했던 서신들을 친절하게 읽어주던 과정에서 무심코 터키 거래 밀약 부분을 읽어 버린 것이다. 하바나 회의에서 직접 이 과정을 설명한 카스트로에 따르면 자신의 귀를 의심한 그는 "다시 한번만 읽어주실래요?"라고 문의했고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후르시초프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ibid., 225).

***주체외교와 제3세계 해방운동**

결국 카스트로는 터키 밀약 에피소드에서도 드러나듯이 갈수록 뼈저리게 강대국과 결별한 주체외교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상회담 이후 9월 미국과 소련 간의 제한적인 핵실험 금지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는 제3세계 해방운동의 지도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66년에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3대륙의 민족해방 운동이 참여하는 국제 연대회의를 조직하는 데 성공한다. 북한, 북베트남 등이 참여한 이 회의는 향후 혁명 수출을 결의하고 그 사령부를 하바나에 설치했다.

하지만 카스트로가 소위 북한식 민주기지 노선을 채택하는 동안 미국에서 케네디보다 더 강경한 인물이 쿠바를 옥죄어왔다. 남부 텍사스 출신인 존슨 부통령은 케네디보다 더 강경한 마초주의자로 유명하다. 케네디가 마초로 보이고자 한 이라면 존슨은 마초 그 자체였다. 그는 63년 12월 쿠바를 더욱 옥죄는 강경한 외국원조 법령에 사인한다. 이는 카스트로가 통치하는 한 쿠바로 가는 선박운송을 중단하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금원조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 명시하고 있다. 이 조치로 인하여 미국과의 수교 없이 쿠바가 독자적으로 살아남을 희망은 거의 없어 보였다.

다른 한편으로 소련은 더 이상 쿠바의 혁명 수출을 방기할 수 없어 노골적으로 쿠바에 대한 견제활동에 들어갔다. 후르시초프 실각 후 등장한 브레즈네프는 더 강대국 중심주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코시긴(Aleksei Kosygin) 총리를 67년 6월에 보내 볼리비아 등지에서의 모험주의적 행동에 대해 강력히 경고했다. 이는 사실상 최후통첩이나 다를 바 없었다.

소련이 등을 돌린 가운데 볼리비아의 정글에서 불리한 싸움을 거듭하던 게바라의 67년 8월 8일 체포 및 처형 소식은 카스트로의 마지막 희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왜냐하면 그는 볼리비아 혁명으로 남미 전역의 혁명이 연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이 죽음으로 게바라는 혁명의 성인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이날부터 쿠바 어린이들은 마치 북한의 유치원생들이 그러하듯이, 또는 주기도문을 외우듯이 "우리는 게바라와 같이 될 것이다"라고 매일 암송해야만 했다.

하지만 게바라와 같은 삶은 티셔츠의 로고로서는 매력적일지 모르지만 현실의 삶으로서는 끔찍한 악몽만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게바라와 같은 스타일을 도저히 인내할 수 없는 소련이 본격적으로 제재에 나섰기 때문이다. 소련은 쿠바가 거의 98% 의존하고 있는 석유의 공급량을 줄이고 쿠바 스파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알렉시이프 대사를 서구적 편향을 가진 솔다토프(Aleksander Soldatov) 대사로 교체해 버렸다. 이는 더 이상 쿠바가 소련의 특별보호 대상이 아니며 쿠바의 주체외교의 앞길에 험난한 여정이 높여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의 오만하고 강압적인 외교, 카스트로의 모험주의적 선군노선에 기반을 둔 주체사상은 극적인 합의안을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도, 적대적 관계의 청산이라는 측면에서는 문제를 원점으로 돌려놓은 셈이다. 필자가 직전 글에서 밝힌 것처럼 북한은 그 뒤 소위 소련의 쿠바에 대한 배신에 충격을 받으며 주체사상의 강화와 4대 군사노선 등 자주적 군사화에 박차를 가한다. 더 나아가서는 이것이 그 뒤 핵개발의 간접적 배경으로까지 작용한다. 그리고 오늘날 한반도는 지난 수십 년 간의 크고 작은 위기 및 북한의 민주기지노선 포기라는 갖은 우여곡절을 거쳐 얼마 전 6자회담을 통해 모호한 형태로나마 합의안을 만들었다.

우리로서는 미국과 쿠바 간의 어리석은 게임을 어떤 형태로든 한반도에서 재생시키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