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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리뷰] 이야기, 사람을 지배하다 'The Zoo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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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리뷰] 이야기, 사람을 지배하다 'The Zoo Story'

두산아트랩, '그 작가의 실험실' 참가 작품

시작과 동시에 수많은 단어가 무대를 둥둥 떠다닌다. 대화를 원한 남자는 피터에게 일방적인 질문폭격을 던진다. 피터는 남자의 질문에 성실한 답변자로서 남자가 원하는 방식의 대화를 이어간다. 서로 말을 주고받고 있다고는 하나, 둘의 소통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저 단어를 내뱉는 행위에 그친다. 그럼에도 피터가 남자의 대화에 참여한 것은 오로지 그의 동물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다. 흘러 듣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운 순간부터 피터는 남자의 사고에 휩쓸린다. 하나의 주체였던 피터는 점점 남자의 객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 피터, 파블로프의 개가 되다

▲ ⓒNewstage
남자의 대화에 순순히 반응하던 피터는 어느새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있다. 남자의 이야기에 조종당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반사적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남자의 이야기를 뒤쫓는다. 남자는 피터가 자신의 행동에 반응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피터의 그네를 차지할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의 의식을 지배할 것이라는 사실 역시 직감하고 있었다. 철저한 계산 속에 남자는 피터를 서서히 파블로프의 개로 만들었으며, 자신의 이야기 속에 그를 가뒀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이야기는 결국 두 남자를 파멸로 이끈다.

우울과 외로움에 휩싸여 있던 남자의 파멸이 예고된 거였다면 일상의 평화로움에 젖어 있던 피터의 파멸은 예상 밖의 이야기다.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남자와 귀여운 두 딸,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는 피터의 파멸은 대조를 이룬다. 남자의 파멸이 자의적이었다면 피터의 파멸은 자신의 비극인 동시에 관객과 피터 가족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모든 의사결정은 남자에게만 있다. 피터는 그의 이야기에 따라 짖고 발버둥치며 거침없이 소리 지른다. 무대 위는 두 남자가 아닌 조종하는 자와 조종당하는 자만 남았다. 남자가 우르르 뱉어낸 언어는 결국 피터를 지배하고 잠식시킨다. 힘없이 무너진 피터가 안쓰럽거나 놀랍지 않은 건 남자의 이야기를 듣던 관객 역시 그의 이야기에 길들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이야기는 피터를 물론 객석을 통째로 꿀꺽 집어삼킨다.

- 두 남자의 호흡을 끊는 이야기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내뿜는 그의 모습에서 그가
▲ ⓒNewstage
외롭다는 것, 혼자라는 것,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문드문 알 수 있다. 그는 극심한 고독에 시달리고 있다. 남자를 맞아주는 것은 자신을 향해 이를 훤히 드러내 보이며 컹컹거리던 집주인의 개뿐이라는 것을 그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다. 외로움은 그의 전신을 뒤덮고 급기야 남자를 피터 纜� 데려다 놓았다. 처음 보는 피터에게 그는 막힘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마구 쏟아낸다. 외로운 그가 마음 편히 몸을 뉘일 곳은 좁디좁은 방이 전부다. 그럼에도 그가 측은하지 않다. 그는 감정에 호소하지 않으며 그저 사실만을 나열할 뿐이다.

편안해 보이는 나무그네에 앉아 여유롭게 책을 읽던 피터는 한순간 인생의 끝자락으로 밀려난다. 발밑에 더덕더덕 붙어 떨어지지 않던 소금처럼 남자의 말은 그의 몸 구석구석 붙어 그를 옥죈다. 여유롭게 웃으며 피터 주위를 서성이던 그는 결국 피터의 숨을 움켜쥔 채 희열을 맛본다. 관객이 피터와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건 피터와 남자가 자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외롭고 고독하며 때로는 극심한 공허함을 앓는 것처럼. 이야기가 두 남자를 잠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둘을 몰락게 했던 것은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던 외로움과 물질의 빈곤에 있다. 연극 'The Zoo Story'는 젊은 창작자의 다양한 실험을 만나볼 수 있는 두산아트랩(Doosan Art LAB)의 '그 작가의 실험실'에 참여한 작품이다. 지난 2월 17일부터 19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관객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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