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과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주최한 '18세와 통하는 철학ㆍ사회과학' 여름방학 특강(고교생 철학아카데미)이 8월 2일부터 8월 23일까지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조금은 어려울 수 있는 철학과 사회과학이라는 주제에 대해 걱정반 기대반으로 시작한 특강이였지만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은 그런 우려를 무색하게 하였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좀더 넓은 세상과 좀더 넓은 배움의 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 또한 저희들의 할 일이라는 생각을 이번 특강을 통해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8번의 강좌를 마무리 하고 학생들에게 이번 특강에 대한 각자의 소감을 공모하였습니다. 미래 사회의 주인인 될 청소년들의 솔직한 목소리를 듣는 것과 함께 앞으로 보다 나은 강좌를 기획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중 최우수, 우수, 장려상을 선정하여 다음과 같이 전문을 게재합니다.
다가올 겨울방학에는 더욱 알차고 짜임새 있는 기획으로 고교생 철학아카데미를 진행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최우수상: 도덕성을 전제하지 않은 합리성은 폭력이다(남주희, 고양외고)
8월 2일부터 8월 23일까지 서울 중구에 있는 '우리 함께' 건물에서 네 번에 걸쳐 청소년을 위한 철학 강의가 개최되었다. 7시부터 강의가 시작되었는데 나는 학교에서 6시까지 보충수업을 마치고 강의를 들어야 했기에 몇 번 지각을 하였다. 강의 첫 부분을 놓쳐서 아쉽기도 했지만 교수님들의 특색이 살아있는 강의는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네 분의 교수님들 모두 진심을 담아 강의해 주셨지만 나에게 가장 많은, 그리고 혼란스러운 의문을 남긴 수업은 이순웅 교수님의 '소유나 존재냐' 강의였다.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것은(정확히 말하자면, 내 머릿속에 가장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은) '실재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라는 문장이다. 실제로 존재하고 주변에 있는 것들은 지배하는 중심축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실재'는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데아는 '본질'을 뜻하는 말로서 모든 물체들이 지향해야 하지만 동일시 될 수는 없는 이상이다. 그러나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실재는 다분히 부정적인 어감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실질적 권력과 권한을 가진 것, 즉 뒤에서 부하들을 조종하는 조직의 두목과 같은 것이다. 두목을 치밀하게 짜인 계획대로 부하들을 배치한다. 두목이 계획하는 모든 일들은 대부분 두목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다. 가끔씩 그가 계획하고 실행한 일들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두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존재이므로 사람들에게 돌을 맞는 것은 두목이 아니라 부하들이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마이클 무어 감독의 '자본주의: 러브스토리'가 생각났다.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신 내용과 이 영화에서 무어가 말하는 내용은 상당히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미국의 금융 자본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점은 월스트리트로 대표되는 미국 자본이 미국 경제와 정치뿐만 아니라 세계의 실질적인 경제권을 거머쥐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질적 두목은 미국의 금융 자본가들이고 미국과 다른 나라들의 정치권은 두목의 명령을 따르는 부하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자본주의의 표본이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선택함으로써 중산층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국력이 향상되는 효과를 얻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이익추구에 대한 욕구를 존중하는 '도덕적'인 체제로 여겨졌다. 모두가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의 중산층은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의 이름아래 무너지고 있다. 자본은 그들의 집을 현금화하여 그들의 집이 곧 돈이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곧 서민들은 '모기지론'의 유혹에 넘어가 집을 은행에 빼앗긴 채 거리로 내쫓길 수밖에 없었다. 급속도로 늘어나는 이자를 갚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들도 그들의 '교육을 받을 권리'를 잃었다. 대학에서 요구하는 엄청난 등록금을 내기 위해서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한다. 대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으며 간신히 살아간다. 이제 미국 정부는 더 이상 그들의 기본권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사람이 살면서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할 집, 의료, 연금, 교육 등이 시장의 손에 넘어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 정부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금융 자본가들의 위해 미국 정부가 금융 규제를 철폐하면 할수록 개인파산과 가계부채를 급증하였다. 반면에 미국의 주식시장과 월스트리트는 더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왜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 자본가들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리고 왜 자본가들은 표독스러우리만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의 고혈을 뽑는 것일까?
미국은 2차 대전에 의해 독일과 일본 등 자신의 경쟁자들의 산업기반이 무너진 틈을 잘 사용한 영리한 나라이다. 그들은 독점적으로 산업사회에서 경쟁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물론 산업사회를 '노동자를 상품으로 보는' 잘못된 생산체계라고 비판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이 터무니없이 적을 임금으로 과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사회는 기본적으로 좋은 물건을 만들어 자회사의 경쟁력을 높여야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나름대로 순수한' 생산체계였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이 수출대국으로 거듭난 후 미국이 채택한 금융사회는 그 자체로 폭력성을 내포한다. 금융사회에서는 누군가 큰 이익을 얻으려면 필연적으로 누군가가 큰 손해를 보아야한다. 보험을 통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람이 다치거나 죽어야 한다. 주식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특정 주식이 폭락하여 주주들이 돈을 잃어야만 다른 자본가가 가격이 폭락한 주식을 매점하여 그 주식의 가격이 오를 때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다. 누군가의 집의 저당 잡혀서 그 집이 비어야만 자본가들, 특히 은행들은 집을 비싸게 팔면서 이득을 본다. 여기서 말하는 이익 혹은 부는 몇 푼 예금하고 대출하면서 받는 이자나, 적당한 돈을 주식에 투자하여 얻는 배당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잃은 자의 눈물을 보지 못한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효율성과 합리성에 근거하여 투자한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자유와 이익추구의 원리만이 도덕적인 것이며, 그들이 하는 일들이 결과적으로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다.
주거와 의료, 교육과 식품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주택 거래'도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인 것이다. 의료는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분야이다. 의료서비스가 불가피하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의료의 상품화는 불가피한 소비를 부른다. 민영화의 바람이 불면 불수록 국가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시장에 맡기고, 시장은 인간의 기본권을 상품화한다. 그리고 서민들은 기본권이 유지되는 생활을 하기 위해 하루하루 사투를 벌인다. 이것이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일까? 자본주의의 사회가 무언가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금융 자본가들의 선택과 자본주의의 흐름은 점점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을 잊어가고 있다. 생명도 인간성도 자본 앞에서는 단순히 상품에 불과하다. 돈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범죄자들을 만들어내어 사유 교도소에 집어넣는 행위는 생명과 인간을 기억의 뒤안길로 보낸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도 본래 더 풍요로운 삶은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목숨 걸고 보장하는 이익추구의 원리는 이기적인 경제주체들이 이기적이게 행동하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그들의 이기성에 의해 인간의 기본권은 부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호되어야 한다. 모든 정치와 경제, 그리고 철학은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것이다. 하지만 현재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만든 틀 속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빼앗기고 있다. 합리주의와 영리주의에 기반을 둔다고 믿었던 자본주의도 알고 보니 돈만 있으면 법이 바뀌는 사회였다. '합법적 경제행위'라는 경계선은 이미 많은 사례들을 통해 너무나 융통성 있는 원칙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이익이 되는 것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이클 무어같이 사회주의를 외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를 따르는 사회는 그 자체로 모순성을 안고 있다. 모든 경제주체가 개인의 이익추구를 위해 일하는 것을 바라지만 또한 공익을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익을 생각하라는 것은 이미 독점 자본주의의 뜨거운 맛을 본 이후 추가된 도덕적 성명인 것인가? 아니면 필요하기는 한데 경제주체들이 충실히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다보니 잘 지켜지지 않는, 그러나 언젠가 지켜지길 기대하는 바람인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본래 공공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 보이지 않는 손, 시장이 부를 공정하고도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이는 알고 있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부는 절대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노력한 만큼 임금을 받는, 시장이 말하는 공정한 분배도 무너졌다. 이제 자본주의의 문제점과 한계를 직시하고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대책이 새롭게 강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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