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루됭의 마귀들림>(미셸 드 세르토 지음, 이충민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대개 그러한 경험은 연구자에게 먼저, 자신의 외국어 능력에 대한 회의와 자괴감을 불러일으키기 일쑤이고, 이는 다시 원저자의 글쓰기 방식에 대한 불평으로 비화한다. 그런 연유로 프레시안 서평 담당자부터 서평을 의뢰받게 된 필자의 첫 반응은…"아니, 누가 그 유별난 책을 왜 번역했대요?"
그래서 <루됭의 마귀들림>을 전달받고 가장 먼저 펼쳐든 부분은 당연히 423쪽부터 시작되는 '옮긴이의 말'이다. 이 책은 역자에게도 "각별히 고생스러웠던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인용된 문서 대부분의 난삽하고 졸렬한 문장은 지성에 대한 모욕"이었고, "유별난 비유법과 사고체계"를 가진 기이한 세르토의 문체로 인해, 책의 번역은 번역자에게 "극한의 경험"이었단다. 오래전 원본을 읽다 지쳐버린 서평자로서는 개인적으로 무척 맘에 드는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대충 이 정도로 서평을 끝냈으면 좋겠지만, 개인적인 감사말 몇 마디로 서평을 끝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에 - 업계의 관행도 그렇지 못하다 - 이제 <루됭의 마귀들림>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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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는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많은 마녀들이 출몰했고 또 마귀들림 현상이 유행처럼 번져갔던 세기였다. 이들이 정녕 악마의 하수인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거대한 음모의 희생양이었는지는 도무지 확인할 수 없겠으나, 확실한 점은 마법과 마녀, 그리고 마귀들림에 대한 관심이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 - 그것도 대단히 광적인 - 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현상들은 불과 몇 십 년 후 "빛의 세기", 즉 계몽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던 프랑스의 암울한 초상처럼 보인다. 라블레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이 암흑의 고딕 시대라고 불렀던 중세는 오히려 안전한 시대였다. 마녀사냥은 프랑스에서 소위 '근대성'의 주요한 특징들이 확립되던 바로 그 시기에 만개했던 것이다. 마녀와 마법에 대한 무자비한 증오심이 불타올랐고, 가장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사탄의 존재와 그 놀라운 힘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근대적인 주권론을 정립했으며 화폐의 유통원리를 해명하고 인플레이션의 원인을 파헤쳤던 장 보댕은 이러한 사악한 무리를 밝혀내고 그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한 고문법을 개발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지 않았던가!
중세 말기는 분명 기독교의 성숙기였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떠한 기독교였는가?
인간을 둘러싼 환경은 여전히 적대적이었고, 삶은 불안정했다. 질병과 기근은 언제나 인간을 괴롭혔고, 불행은 가난한 자와 부자, 문맹인과 지식인을 차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납득하기를 원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왜 전염병이 마을의 주민들을 전멸시키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중세인들의 설명과 이해 방식이 우리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인과관계에 의한 설명은 중세인과 근대 초기의 인간들에게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과학'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중세의 '과학'은 오늘날 우리의 것과는 다른 원칙에 토대를 두고 있기 일쑤였다. 그 토대위에서 점성술과 연금술은 중세의 하이테크 과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결국 이들에게 초자연적 세계의 존재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중세인에게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믿음이란 "원시적"인 태도였고, 신앙은 이 믿음의 알맹이를 채운 내용물이었다. 중세인은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인간(homo religio)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법의 능력과 마법사의 존재, 사탄의 힘을 믿었다. 사실 마법은, 소박하게 말하자면 주술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문명도 앙리 4세와 루이 13세 시대처럼 점쟁이들을 조직적으로 색출해서 학살한 적은 없었다. 종교재판을 통해 골격이 다듬어진 마법에 대한 지식은 15세기 말 종말론의 확산과 결합되어 대중의 공포를 자극하는 요인으로 발전했다. 인쇄술의 발달은 종말론 서적과 함께 악마론 연구서를 쏟아냈다. 초기 근대 국가는 사법기구를 통해 마녀에 대한 심판을 공식화하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오늘날 영화나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친숙해진 일련의 단서들, 즉 악마와 짝짓는 여성이라든가 주술과 인형을 이용한 저주, 마귀들린 소녀의 공중부양과 어깨 위로 360도 목 회전시키기 신공과 같은 스테레오타입들이 정착되었다. 애꿎은 고양이와 염소는 사탄이 변신하는데 애용하는 동물이 되어 이미지가 추락했고, 빗자루는 청소 외에 이동수단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갖게 되었다.
마법과 마귀들림 - 참고로 필자는 악령들림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지만, 이는 역자의 선택의 몫이므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 - 에 대한 지식은 실로 상상으로 초월할 정도로 정교하고 그 내공이 몇 십 갑자는 족히 넘는 것이어서, 이 사건의 히로인인 잔 데장주 원장수녀를 검진한 세속과 종교계의 지식인들은 천재 의사 닥터 하우스 뺨치는 진단서(159~160쪽)를 제시할 수 있었다.
그녀[잔 데장주]에게 들린 일곱 마귀는 다음과 같다.
치천사 등급의 레비아탄. 이마 한가운데에 자리잡음.
능천사 등급의 아만.
능천사 등급의 이사카론. 오른쪽 옆구리 마지막 갈비뼈 밑에 자리잡음.
주천사 등급의 발람. 오른쪽 옆구리 두 번째 갈비뼈 안에 자리잡음.
좌천사 등급의 아스모데오.
좌천사 등급의 베헤모스. 위장 안에 자리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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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신학적(medico-theological) 지식의 발전은 수많은 표본과 경험의 산물이기도 했다. 사실 루됭의 사건은 그 떠들썩함으로 인해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마귀들림 사건이 되었지만, 불과 한 세대 전에도 이미 유사한 성격의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30여 년간 지속된 종교내전을 - 종교적 믿음의 차이로 인해 벌어진 이 내전은 흡사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내세워 벌어진 우리 역사 속의 전쟁과 많이 닮았다 - 종식시키면서 앙리 4세는 낭트칙령을 반포했고, 파리 고등법원은 1599년 2월 말 이 칙령에 대한 등기절차를 처리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파리는 마르트 브로시에라는 한 시골처녀의 상경으로 인해 일대 소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악령에 들려 심한 발작 증세를 보인 마르트는 악령퇴치를 위해 용하다는 구마사들을 찾아 주요 도시들을 돌아다니다 결국 파리까지 오게 되었다. "경이로움과 호기심에 가득 찬 수많은 인파가 그녀를 보러 몰려들었다."(피에르 드 레투알)
세르토가 묘사한 루됭의 마귀들림처럼, 이 사건에 처음 등장한 사람들은 수도사들과 고위 성직자를 위시한 의사와 신학자들이었고, 구마의식이 한 마당 벌어졌다. 커다란 풍문을 불러일으킨 마르트의 마귀들림에 대해 교회 당국은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파리 고등법원이 전면에 나섰다. 고등법원은 이 사건을 둘러싼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모든 종류의 대중 집회와 구마의식을 중지시키고, 마르트를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시켰다. 고등법원은 종교 문제에 대한 일정한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다. 4월 중순에 이르러 소르본 대학의 신학교수와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이러한 고등법원의 결정을 반발하면서 마귀들림 사건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파리에서 벌어진 이 해괴한 사건은 석 달이 넘도록 잠잠해질 줄을 몰랐고, 고등법원의 개입은 아궁이에 기름 붙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사태가 이쯤 되자, 국왕이 슬그머니 개입하기 시작했다. 5월 31일, 앙리 4세는 구마의식에 참여했던 의사에게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고 지시했고, 의사는 한 편의 보고서를 통해 이 사건이 "악령에 의한 것이 아닌 거짓행세이며 단순한 질병"이라는 진단을 내놓았다.
마르트 브로시에를 둘러싼 이 소동은 그것이 악마의 소행인가 아닌가를 밝혀내는 문제에서 악령사건에 대한 관할권이 교회에 있는가 아니면 세속법정에 있는가 - 그것도 아니면 의사인가 - 의 문제로, 그리고 다시 국왕의 종교적 정체성의 문제로 비화된 것처럼 보인다.
악령에 들린 처녀에 대한 대중의 지나친 관심은 이제 막 낭트칙령을 선포한 앙리 4세에게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종교적 통일의 이상을 포기할 수 없었던 가톨릭 세력은 이 사건에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신의 계시를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르트가 발작 중에 위그노들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귀들림 사건은 신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낭트칙령에 대한 대중의 여론과 맞물리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낭트칙령의 선포 이후 다시 불붙은 앙리 4세의 개종의 진실성에 대한 의구심과 맞물려 한 시골처녀의 발작은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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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됭 사건을 배경으로 한 켄 러셀의 영화 <악령들>(1971). ⓒRusso Productions |
그리고 약 30년 후 루시퍼와 그의 일당들은 프랑스 중서부 지방의 작은 도시 루됭의 한 수녀원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루됭의 사태는 마귀들린 여인들과 남성들, 그리고 '마귀가 들러붙은' 사람들의 숫자도 그렇거니와 도시의 지정학적 성격이나 1630년대의 역동적인 정치적 지형으로 인해 한 세대 전의 사건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하다.
경험이 일천하여 경찰의 조서작성법을 제대로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이 책을 탐하게 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먼저 1630년대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루됭의 마귀들림 사건일지를 정리해보자.
| 시기 | 내용 |
| 1632년 5~9월 | 흑사병의 창궐 (1만 4000명의 주민 중 3700명 사망) |
| 1632년 9월 21~22일 | 잔 데장주 원장 수녀를 비롯한 3명의 수녀들, 고해신부 무소 원장의 유령 목격. |
| 1632년 9월 23일 | 구내식당에서 검고 둥근 물체 목격. |
| 1632년 9월 27일 | 한 남자의 뒷모습 목격. |
| 1632년 10월 1일 | 하위성직자들의 개입. 기이한 현상은 악마의 소행으로 판명되고 구마의식이 해법으로 제시됨. 17명의 수녀 중 세 명의 수녀에게 마귀들림이 선고됨. |
| 1632년 10월 3일 | 수녀들 비명을 지르고 몸을 뒤트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 |
| 1632년 10월 5일 | 첫 번째 구마의식 개시. |
| 1632년 10월 11일 | 주임신부 위르벵 그랑디에, 마법사로 지목되고 기소. |
| 1632년 10월 12일 | 판사, 검사장, 의사 등 지역 유력인사들의 개입. |
| 1632년 10월 13일 | 잔 데장주 수녀, 자신의 몸에 깃든 악마 일곱 명을 거명. |
| 1632년 10월 18일 | 루됭의 의사 두 명, 수녀들을 검진. 수녀들의 증상이 질병이 아니라고 판단. |
| 1632년 10월 22일 | 그랑디에 신부, 푸아티에 주교에게 항소. |
| 1632년 11월 24일 | 푸아티에 주교, 구마의식을 공식 승인. |
| 1632년 12월 10일 | 그랑디에, 파리 고등법원에 재심 청구. |
| 1632년 12월 24일 | 앙리 드 수르디, 보르도 대주교의 개입. 마귀들린 수녀들의 격리 조치와 검진을 명령. 마귀들린 수녀가 아홉 명으로 늘어남. |
| 1633년 2월 11일 | 소르본 신학박사들의 소견서. |
| 1633년 9월 | 루됭의 성곽 철거명령을 받은 로바르드몽 남작의 도착. |
| 1633년 10월 말 | 루됭의 성탑 철거. |
| 1633년 11월 30일 |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 로바르드몽 남작에게 루됭의 우르술라 수녀들의 마귀들림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허장 하사. |
| 1633년 12월 8일 | 특사 로바르드몽 남작, 루됭 도착. 그랑디에를 체포하고 앙제 성으로 호송. 이후 사제의 자택에 대한 가택수색 실시. |
| 1633년 12월 12일 | 그랑디에에 대한 각종 불만사항의 심리 개시. |
| 1634년 1월 | 그랑디에의 모친 잔 에스티에브르, 특사에 대한 기피신청을 요구하는 탄원서 제출. |
| 1634년 2월 4~11일 | 특사, 그랑디에의 심문. 파리로 상경하여 국왕으로부터 재판에 대한 전권을 재확인받음. |
| 1634년 4월 9일 | 특사 루됭 복귀. 그랑디에를 루됭으로 이감. 격리조치됨. |
| 1634년 7월 8일 | 그랑디에 사건 담당 특별 판사 임명과 재판의 시작. |
| 1634년 8월 초 | 트랑킬 신부, <루됭의 우르술라회 수녀들의 마귀들림 사건에 관한 보고서> 출간. |
| 1634년 8월 10일 | 푸아티에 주교, 우르술라회 수녀들의 마귀들림을 공석 선언. |
| 1634년 8월 15일 | 그랑디에 신부, 법정에서 기소범죄 사실 부인. |
| 1634년 8월 18일 오전 5시 | 가르멜회 수도원에서 그랑디에에게 공개참회형과 화형을 선고. |
| 1634년 8월 18일 오후 5시 | 마르셰생트크루아 광장에서 그랑디에 산채로 화형. |
수녀들이 겪는 고통의 원인은 과연 마귀일까? 그렇다면 그 '영험'하다는 구마의식이 효력을 발휘할 것인가? 저자 세르토의 통찰대로 마귀들림에 진실한 답은 없는 법이다. 하지만 마귀가 원흉이라는 주장은 분명한 마력을 갖고 있었다. 마귀란 놈은 원래부터 지긋지긋한 놈이다. 마귀는 줄곧 마녀와 마법사를 하수인 삼아 자신의 권세를 드러내보이곤 했으니 말이다.
루됭에 불어닥친 일련의 불행 속에서 마귀는 다시 한 번 '유주얼 서스펙트'가 된다. 루됭 시민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흑사병도 마귀가 간여한 것이 분명해보였다. 어떤 이들에게 의구심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갔으리라. 그리고 마귀들림은 호사가들에게 분명 좋은 구경거리였다. 루됭은 이제 인근 지방을 넘어 프랑스 전역에, 심지어는 다른 나라의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반면 진상 파악과 구마의식은 지지부진하다. 사건의 성격상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들의 파워 게임은 사건을 어지럽히기만 할 뿐이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세력, 지방 도시와 중앙권력, 종교권력과 의료 권력, 이웃 리슐리외 공작령의 주인, 그리고 온갖 호기심어린 여론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실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교차하고 "무방비도시"가 된 루됭은 여러 세력들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만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을 하고 유창한 언변을 뽐내던 자유분방한 그랑디에 신부는 친구보다 적이 더 많았다. 수녀들이 그를 마법사로 지목하는 순간부터 어쩌면 그의 불행은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법적·정치적 권력이 개입하면서 그는 죽은 자가 될 것이었다.
세르토에 의하면 이 사건의 최종적 승리자는 잔 데장주이다. 마법사로 '판명'된 신부는 화형대에서 산채로 불태워진 반면, 원장수녀는 성흔의 은사를 받았다. 왼손에 예수, 마리아, 요셉, 성 프란체스코 드 살레지오의 이니셜이 새겨졌단다. 일약 전국구 스타가 된 수녀원장은 전국 투어를 통해 자신의 승리를 과시했다. 리슐리외를 접견한 것은 물론이고, 왕후 안 도트리슈의 분만을 참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타 탄생으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랑디에 신부를 둘러싼 논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루됭의 마귀들림 사건은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쉽게 흥분시키는 스캔들을 넘어서 이제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죽은 자가 말이 없다는 것은 범죄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이다. 역사에서는 원래 죽은 자의 말이 제법 많은 법이다.
| ▲ 루됭 사건을 다룬 예르지 카발레로비치의 <잔 데장주 수녀>(1961). ⓒZRF "Kad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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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많기에 "역사는 결코 확실한 법이 없다." 이 대담한 주문으로부터 시작하는 루됭의 마귀들림 사건에 대한 세르토의 분석은 놀랍기 그지없다. 치밀하고 정교하며, 정신분석적이고 또 역사적이다. 그것은 섬세한 역사적 상상력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르토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누가, 누구에게 마귀들렸는지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마귀들림에는 '진실한' 역사적 설명이 없다."
세르토가 이야기하는 역사가는 과거에 묻힌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이 아니다. 그에 의하면 역사가의 임무는 이보다 훨씬 소박하고 섬세하다. 역사가의 임무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거짓을 가려내는 것"일 뿐이다. 루됭의 마귀들린 수녀들에 대한 사제들과 의사 그리고 판사들의 다양한 치료를 고찰하면서, 세르토는 역사가 역시 사회로부터 구마사의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이야기한다. "타자라는 위험을 제거할 것을 요청"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 사회에 대한 세르토의 전반적인 이해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다양한 역사적 순간에,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조건 하에서, "타자라는 독"은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떠한 사회도 완전히 균일하지 않고 통합되어 있지 못하다는 사실, 불안한 타자성이 언제든 모습을 드러내리라는 사실을 동시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타자의 새로운 사회적 형상"을 확인하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다. 과거를 연구하면서 역사가는 미래를 향한 길을 비춰주며, 이로써 고유한 정치적 책임의식을 갖게 된다. 역사가가 역사서술의 의미론, 윤리관 그리고 비판적 인식론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세르토는 역사를 이러한 "타자의 과학들" 가운데 위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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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됭의 민중과 수녀들, 판사들만큼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마귀의 방문에 그리 익숙하지 못하다. 하지만 혹시라도 사탄에 대한 갈증을 느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반드시 영화적 상상력에 의지할 필요는 없겠다. 사탄의 얼굴은 실로 다양하므로 유심히 발밑을 살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요상한 마귀들을 쉽게 발견할 있기 때문이다. "이상한 것들은 보통 우리 발밑에서 은밀히 돌아다니게 마련이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기만 하면 이들은 홍수라도 난 것처럼 곳곳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하수구 뚜껑을 들어 올리고 지하실에 스며들며 급기야는 시가지를 침범한다." 그렇다. 대량학살, 종족말살, 전체주의, 전례 없는 규모로 무자비하게 자행되는 신체적·언어적 정치 폭력은 "우리 발밑에서 은밀히 돌아다니게 마련"인 무시무시한 타자성의 끔찍한 발작이다. 그런데 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모르는 사람 많은 것 같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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