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읽었던 소설에서,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불로 만들어진 터널로 돌진한다. 누군가 이유를 묻자 그는 "아름다워서"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의 답변에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고 끝을 맺는다. 마치 아름답다는 말에 대해서는 어떤 반박도 제기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러나 아름답다는 판단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예술작품의 미적 가치를 판단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써왔다. 데이비드 흄도 마찬가지였다. 흄은 미적 판단을 취미 판단으로 파악하는 바, '취미의 기준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를 통해 취미의 기준을 구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비평가는 첫째, 예리한 감각으로 대상을 식별해야 하며, 둘째, 부단한 연습을 해야 하고, 셋째, 여러 종류의 아름다움을 비교할 기회를 가져야 하며, 넷째, 편견이 없어야 하고, 다섯째, 지적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나는 토머스 드 퀸시의 <예술분과로서의 살인>(유나영 옮김, 워크룸프레스 펴냄)을 읽으며 흄이 말하는 취미 판단과 이상적 비평가, 혹은 진정한 판관을 떠올렸다. 살인이 과연 아름다운 것인지, 미적 판단이 가능한 대상인지, 살인을 예술로 고려할 수 있는지, 새삼 궁금했기 때문이다.
<예술분과로서의 살인>에서 화자는 강연문을 빙자하여 "전문가의 손에 탁월한 걸작들이 연출된 이 시대의 대중은, 여기에 적용되는 비평 양식에서도 분명히 그런 진보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기대할 것"이라며 "뛰어난 살인"은 "웅대하고 숭고한 경지"에 이른 "예술"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선언 뒤에는 탁월한 살인의 사례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탁월한" 살인은 무엇일까. 나는 궁금했다. 그와 동시에 화자의 천연덕스러운 주장에 나도 모르게 깜빡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르긴 모르되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하며 수많은 문학작품들을 읽은 것처럼 보이는 화자는 예술에 대한 감식안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자, 확실히 <리바이어던>을 쓴 인간은 곤장 한 대를 맞아 마땅하며, 5보격 운율을 'terror ubique aderat!'라고 형편없이 끝맺는 인간은 곤장 두세 대를 맞아야 마땅합니다"라는 화자의 말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정교하고 고상하게 빚고 깎은 예술을 옹호하는 사람이다.
그는 역사상의 뛰어난 살인사건들을 언급하며 저급한 살인과 탁월한 살인을 구분하는 바, 살인이 예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피해자는 선량한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 공인이어서는 안 되며, 셋째, 건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피해자가 병자라면 예술적인 기교를 부릴 필요가 없이 너무나 쉽게 처치할 수 있고, 공인이라면 일반 사람들에게 추상적 관념으로 여겨지고, 악인이라면 "살인의 파토스"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극의 희생자는 선량한 사람이어야 한다. 많이 들어본 말이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한 구절을 교묘하게 비튼 것이다.
살인을 비극의 위치에 올려놓으며 화자는 "자신이 감상의 대상이 되는 취향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살인이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화자는 흄이 말하는 비평가의 조건을 얼추 충족시킨다. 장광설처럼 이어지는 살인에 대한 옹호를 통해 그는 자신이 살인에 대해 예리한 감각을 가졌으며, 실제로 살인을 해본 적은 없지만 수많은 사례들을 연구했고, 비교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도덕적 편견"도 없으니 살인에 대해서는 훌륭한 비평가의 자질을 갖춘 셈이다.
▲토머스 드 퀸시의 초상화. ⓒWikimedia Commons
그가 언급하는 살인의 사례들은 여기서 일일이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가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던 카인 이후로 어떤 "예술가"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는지를 대단히 열정적인 어조로 말하고 있다는 점은 밝힐 필요가 있다. 이 책은 화자가 자신의 취미, 혹은 취향을 정당화시키는데 온전히 바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몇 번인가 사람들과 인간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다. 대부분 형법으로 처리될 수 있는 항목들이 이어졌고, 그 끝에는 살인이 있었다. 사기, 강간, 절도 등은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반면, 살인은 절대로 용인될 수 없는 행위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거의 대부분의 문화권이 살인을 금기시한다. 다시 말해서 살인은 보편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예술작품은 인간의 생명권을 침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인이 예술의 지위를 획득할 때, 우리는 살인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예술분과로서의 살인'에 대한 두 번째 글"에서 화자는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살인을 부추긴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명예 운운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또 다시 예술적인 살인에 대한 예찬론을 펼치기 시작한다. 허풍일까. 그가 호라티우스의 말을 빌려 "숫돌 역할을 맡겠"다고 말할 때는 그 능청스러움이 놀랍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예술에서 좀 더 고차원적인 영역에 대해 저는 완전히 부적격자임을 고백"하며 그는 예술가가 아닌 비평가의 길을 선택(하는 척)한다.
흄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격을 갖춘 비평가가 될 수 있으며, 이처럼 진정한 감정가들의 합의가 취미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합의는 보편적인 것을 인정할 때 발생한다. 그러나 살인에서 보편성을 찾을 수 있을까. <예술분과로서의 살인>의 화자는 비평가가 되었지만, 자신과 합의할 수 있는 또 다른 비평가를 찾을 수 있을까. 그것도 "자격을 갖춘" 비평가를.
토머스 드 퀸시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로서는 잘 알지 못한다. 책 속의 화자를 드 퀸시와 동일시할 생각도 없다. 그저 내가 오독한 바에 의하면, 이 책은 어떤 예술에 대해서도 합의된 판단이 나오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듯하다. 살인이 아닌 다른 어떤 예술에 대해서도. 5보격 운율을 모르는 나도 어떤 대상에 대해 나름대로 미적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운율이 맞지 않아서일 때도 있지만, 대개 이러한 원칙이나 관습과는 관련이 없는 미묘한 "느낌"때문일 때가 많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야 할 때의 곤혹스러움을 느껴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끝없이 이어지는 화자의 장광설에 어떤 위안을 받았다. 이 역시 허풍일까.
한 마디 덧붙이자면 화자가 자신은 한 번도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다며 "아주 많은 이들의 서명을 받아 이를 증빙하는 서류를 제출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필요한가.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증인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할 때) 한 사람의 증언만 확실하다면 충분하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가능하지 않다.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증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화자가 어째서 이런 논증을 펴고 있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일견 논리적으로 보이는 언술을 통해 교묘히 자신의 예술 행위를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다보니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소설 <재판하는 사람 집행하는 사람>(유혜자 옮김, 아래아 펴냄)이 떠올랐다.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완전범죄는 가능한가"이다. 어느 날 형사 베를락 앞에 그가 40년간 뒤쫓던 살인자 가스트만이 나타난다. 그리고 말한다.
"자네의 주장은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거였어. 다른 사람의 행동을 확실하게 예언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모든 것에 우연이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리 심사숙고해도 간과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범죄 행위가 필연적으로 밝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지. (…) 반면 난 어떤 확신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무턱대고 자네의 말을 반박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렇게 말했지. 인간의 그런 불확실성 때문에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말이야."
<예술분과로서의 살인>의 화자가 탁월한 살인으로 꼽는 사례 중 하나는 어느 은행 사환이 대낮에 돈 가방을 운반하다 살해된 사건이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붐비는 거리 중 하나인 하이 스트리트를 지나 막 골목으로 들어서던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범은 지금 이 시각까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화자는 가스트만의 사례를 어떻게 평가할까. 존 로크에 대해 쓴소리를 늘어놓는 화자는 예상컨대 데이비드 흄의 저작들도 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흄이 말하는 비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할까. 그리고 나는 왜 이것이 궁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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