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기행>이라는 책이 있다. 제주대 석좌교수이자 민속학자, 해양문명사가인 주강현 씨가 지난 2011년에 쓴 책이다. 주간지인 <시사IN>은 이 책을 소개하면서 '창궐하는 제주 관련서, 이 책이 종결자!'라고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제주 문화의 표피가 아니라 원형질에 근접하기를 희망하는 이가 있다면, 그러한 접근을 도와주는 갈라잡이 혹은 마중물 구실을 할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책을 쓴 이유를 밝혔다. <시사IN>은 <제주 기행>을 제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단 한 권의 책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제주를 찾는 이가 매해 1000만 명을 기록하고 매년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해 오는 사람이 1만 명에 달하지만, 제주의 역사 문화적 실체를 설명해주는 자료와 프로그램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은 아닐까. <제주 기행>이 쓰인 지 3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윤용택 제주대 철학과 교수가 3월 25일 '제주의 농촌 문화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첫 강의를 했다. ⓒ 제주환경운동연합
이주민들을 위한 제주살이 학교
이런 상황에서 제주환경운동연합이 제주 이민자를 대상으로 '제주살이' 학교를 열었다. 지난 3월 25일부터 4월 27일까지 진행한 제주생태귀농·귀촌학교가 바로 그것. 물론 이전에도 지자체나 농업기술센터에서 귀농·귀촌학교를 했다. 제주환경운동연합은 기존 귀농·귀촌학교의 차이점을 "최근 제주로 귀농·귀촌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은 농업기술에 국한되어 있고, 제주도의 독특한 환경과 문화를 이해시키고 제주도 정착을 돕는 교육은 전무함에 따라 계획되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귀농·귀촌학교는 '제주에 살다'를 주제로 △제주의 문화와 역사 이해하기 △제주에서 살림하기 △제주에서 농사짓기를 중심으로 총 14강에 걸쳐 교육이 진행되었다. 1월에 제주도에 들어온 나 역시 제주의 독특한 환경과 문화를 이해하고 싶었기에 이번 교육을 듣게 되었다.
제주도는 두말할 것 없이 화산섬이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생태환경의 보물섬이다. 하지만 제주도는 바람, 물, 가뭄의 재앙이 잦고 그 피해가 심하다고 하여 삼재(三災)의 섬이라 했다. 제주 사람들은 삼재의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문화와 독립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삶의 문화를 형성했다.
남편 따로, 아내 따로 하는 겹부조
제주 사람들은 경조사에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가 각각 따로 하는 겹부조를 하는 특이한 상조 문화가 있다. 이러한 겹부조는 제주 사람들이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생긴 '자립 공존'의 문화에서 나왔다. 제주도는 육지와 달리 자식이 결혼하게 되면, 철저하게 분가하는 가족 제도가 있다. 즉 자식이 결혼하면 부모와 자식은 독립 생활을 하게 된다. 한 울타리에 살더라도 부모 가족과 자식 가족은 취사를 따로 할 뿐만 아니라 경지를 분할하여 독자적 생산 경영체가 된다.
분가 제도는 부모 자식 간에 독립적인 삶뿐만 아니라 부부 간에도 어느 정도 독립된 경제 활동을 하도록 했다. 다시 말해서 아들뿐만 아니라 딸에게도 재산 상속이 이뤄지고, 부모의 장례 때도 아들, 딸 구별 없이 나름대로 역할과 책임을 져야 했다. 그 결과 경조사에서도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가 각각 따로 겹부조를 하는 특이한 상조 문화도 이뤄졌다. 철저한 분가 제도는 불가피하게 또 다른 공동체적인 삶을 만들었다. 윤용택 제주대 철학과 교수는 "철저한 분가 제도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는 전통을 낳았고, 부부 사이와 남녀 사이에도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한 자립과 평등의 전통은 서로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 문화로 고양되었다"고 강조했다. 제주 사람들은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아야만 직성이 풀릴 정도로 마을 공동체가 강하다. 제주 사람들은 '따로' 자립하는 삶과 '함께' 공존하는 삶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취하였다.
제주에는 청국장이 없다!
제주 사람들은 청국장을 먹지 않는다. 제주도 어디를 가도 청국장을 파는 음식점을 찾을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청국장은 된장의 대체 음식이다. 육지에서는 된장을 발효시키는 데 1년 정도 걸린다. 제주도의 날씨는 된장 발효에 아주 좋은 조건이다. 제주에서는 된장이 발효되는데 7-8개월 정도 걸린다. 발효 기간이 육지보다 짧다. 제주에서는 된장을 떨어졌을 때 이를 대체하기 위해 빨리 발효되는 청국장을 담글 필요가 없다. 더구나 제주 재래식 된장은 생으로 먹을 수 있을 만큼 군내가 없고 아주 구수하다. 제주 사람들은 된장을 찬물에 풀어 냉국으로 먹는다. 나물도 된장으로 양념을 한다. 국도 된장을 풀어서 끓이면 끝이다. '제주의 자연을 담은 식탁'을 강의한 양용진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 원장은 제주 된장의 우수함을 강조했다.
"발효식품이 좋은 이유는 소화기 계통에 이롭기 때문이다. 면역력을 강화하는 음식은 장에 좋은 음식들이다. 치즈, 요구르트, 김치, 된장 등 발효균이 살아 있는 채로 먹어야 한다. 된장은 끓이면 발효균이 죽는다. 제주도 된장은 날로 먹을 수 있는 된장이다. 발효균이 살아 있는 채로 먹을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이 된장을 맹물에 풀어 냉국으로 먹는 것을 보고 육지 사람들은 저것을 어떻게 먹냐고 기겁을 했다고 한다. 육지 관점에서 제주도 된장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제주 전통 음식은 재료의 신선함을 우선하면서 제철에 나는 식재료로 요리를 한다. 양념도 된장 위주로 단순하다. 투박하지만 짧은 이동거리로 자연스럽게 로컬푸드이자 슬로우푸드이다. 양 원장은 "제주 사람처럼 산다는 것은, 표현은 잘 못하겠지만 제주 음식처럼 투박하게 사는 것"이라며 "제주도 와서 서울 생활처럼 살려고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최근 제주 재래식 된장을 담그는 마을기업, 사회적기업이 늘었다고 한다. 제주에 오면 귤, 한라봉 등 뿐만 아니라 건강하고 맛있는 제주 된장을 사가는 것도 좋겠다.
▲사려니 숲길은 절물자연휴양림에서 물찻오름을 지나 남원읍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숲길이다. ⓒ(주)제주생태관광
삼다수의 나이는 몇 살일까
현원학 제주생태연구소장은 '제주 자연에서 풀어내는 마음 살림 기행'이라는 강의를 사려니 숲길과 교래곶자왈 숲에서 진행했다. 현 소장은 "삼다수 생수 물의 나이는 보통 25-26년 정도 된다. 25-26년 전에 내린 비를 우리가 지금 먹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은 그대로 화산토를 투과하여 땅 밑으로 내려간다. 제주의 숲과 토양은 살아 있는 물을 지하에 보관하고 있다가 25년이 지나서 인간에게 선사하고 있다. 제주의 자연이 인간에게 선물하는 청정수를 기업이 사유화해서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것도 큰 문제지만, 환경 오염으로 점점 먹을 수 있는 물 자체가 줄고 있다. 현 소장은 서귀포 대정읍 동일리에서 천년 동안 주민들에게 식수를 제공하다 2000년 초반에 폐쇄된 서린수원지 사례를 들었다. 어느 날 질소 함유량이 기준치를 넘어 식수로 쓸 수 없게 되었다. 그 원인을 분석해 보니 30년 전 수원지 근처에 들어선 축산 단지의 분뇨가 수원지의 물을 오염시킨 것. 그 파괴적인 결과가 30년이 지나서 나타났다. 먹을 물이 없는 섬의 미래는 없다. 현 소장은 아름다운 사려니 숲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주도 지상의 풍광을 보면 참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지상낙원의 꿈을 꾼다. 하지만 지하의 땅을 들여다보면 인디언의 삶을 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제주도는 땅속을 걱정하는 사람과 지상낙원을 꿈꾸는 사람의 대립이다."
'제주의 농촌 문화'를 주제로 강의를 한 윤용택 제주대 철학과 교수는 현 소장의 얘기를 전 지구로 확장한다. 인디언의 삶이 어찌 제주도에서만 필요하겠는가.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들은 제한된 공간과 유한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와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섬들의 과거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좋은 모델이다. 제주 사람들이 어려운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생태적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제주도와 제주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항의 연속이었던 제주 역사와 4.3항쟁을 꼭 알아야 한다. 제주는 고려에 복속되기 전까지 온전한 독립국가였다. 국호 또한 '탐라'(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였으나 고려 시대에 '바다 건너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제주(濟州)로 바뀌었다. 탐라의 멸망과 때를 같이하여 독립과 자치에 대한 열망으로 저항과 평정이 거듭됐다. 근현대사만 보더라도 저항과 항쟁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현대사의 최대 비극 4.3항쟁이 놓여 있다. 김정도 제주환경운동연합 정책팀장은 "4.3을 보는 세 가지 시각이 있다. 폭동, 제노사이드(대량 학살), 항쟁이다. 제주도민들은 4.3을 항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고 말했다. 제주시 봉개동에 4.3평화기념관'이 있다. 평화기념관 전시관 입구를 지나면 '백비'를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아무런 글도 적혀 있지 않은 채 누워 있다. 백비를 설명하는 문구는 이렇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동학농민전쟁, 5.18민주화운동, 4.19혁명 등 숫자 뒤에 그 역사적 사건의 성격과 본질을 규정하는 명칭이 있다. 4.3은 아직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지지 못했다. 4.3이 올해 처음으로 국가 추념일로 지정되었다지만, 백비는 제대로 된 역사 규정이 아직 내려지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환경운동연합이 주관하고, 아름다운가게가 후원한 이번 학교를 통해 제주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 만질 수 있었다. 문화연대 활동가로 5년 전 제주로 내려온 지금종 조랑말박물관장은 '귀촌 선배에게 듣는 제주 생활'이라는 강의를 했다. 생생한 제주 농촌 마을 얘기를 들려졌다. 본인의 정착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을 토대로 참여자들에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 조언을 해줬다. 도시 생활을 하다 귀농을 하면서 친환경 농사를 짓는 김성우 씨의 이야기는 두려움(?)과 용기를 함께 줬다. 제주 친환경 농업의 역사와 현재도 들을 수 있었다. 김기홍 생드르영농조합 상무가 '제주에서 만나는 친환경 농사'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오감도 즐거웠다. 양용진 제주향토음식보존연구원장은 '제주의 자연을 담은 식탁', 오영덕 제주환경운동연합공동의장은 '제주의 향을 마시다'라는 주제로 참여자들에게 또 다른 자연을 선물했다. 이번 학교를 다니면서 집짓기에 도전해보겠다는 참여자도 생겼다. 라해문 어린이놀이터사업단장이 '생태 건축과 농가 주택 리모델링', 허윤석 환경운동연합회원이 '제주 농촌에서 활용 가능한 적정 기술'이라는 강의를 통해 생태적인 삶의 실천 방법을 보여줬다. 정상배 제주환경운동연합공동의장은 제주도의 풍광을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생태 환경의 보물섬'이라는 강의를 했다.
제주환경운동연합은 이번 1기 제주생태귀농·귀촌학교 진행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보완해 2기 학교를 열 계획이다. 구체적인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다. 1기 수료생들은 이후 모임을 계속 하기로 했다. 제주환경운동연합과 강사들이 수료생들의 정착을 돕는 멘토 역할을 한다. 제주 이주민들의 정착을 돕는 아름다운 학교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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