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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없는 시대의 '사물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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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 없는 시대의 '사물이 뭐길래'

[프레시안 books] <사물과 사람 사이><사물 판독기><사물 유람>

최근 비슷한 시기에 제목에 사물이 들어간 책이 세 권 나왔다. 발행일 순서대로 <사물과 사람 사이>(서해문집 펴냄), <사물 판독기>(세미콜론 펴냄), <사물 유람>(현실문화 펴냄)이다. 앞의 두 권은 2013년 12월에, <사물 유람>은 2014년 3월에 발행되었다. <사물과 사람 사이>는 건축가 이일훈이, <사물 판독기>는 미술평론가 반이정이, <사물 유람>은 독립 큐레이터 현시원이 썼다.

왜 이런 책이 세 권이나 나온 걸까? 늘 곁에 있던 물건들이 이제야 더 중요해진 걸까? 왜 직업적으로 사물과는 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주변의 사물을 놓고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 후 뛰어난 글을 쓴다는 고된 노동을 한 걸까? 이 세 권의 책을 소재로 '발랄한 에세이'를 청탁 받은 후 처음 든 생각이었다. 붙인 제목대로다. 사물이 뭐길래.
▲ <사물과 사람 사이>(이일훈 지음,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그래서일까, 각자의 책은 부제에서 스스로의 성격을 한 번 더 알린다. <사물과 사람 사이>는 '도시산책자의 눈으로 바라본 나무와 공간과 동네와 세상'이다. <사물 판독기>는 '미술평론가가 본 사물과 예술 사이', <사물 유람>은 '큐레이터를 자극한 사물들'이다. <사물과 사람 사이>에는 '건축가 이일훈, 카메라로 세상을 읽다'라는 부제가 하나 더 있으니 셋 모두 처음부터 작가의 직업을 알리며 책을 시작하는 셈이다.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이 셋은 모두 매체에 실렸던 글을 모아 꾸린 책이다. <사물과 사람 사이>는 <경향신문>에, <사물 판독기>는 <한겨레>에, <사물 유람>은 <한겨레 21>에 정기적으로 연재된 글이라고 각자의 책에 밝혔다. 싱글 트랙을 모아서 만든 앨범 느낌이다.

이건 이 책들의 소재가 사물이 된 하나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신문이나 시사주간지의 과녁은 '보통 독자'다. 이들의 본래 분야인 건축과 미술평론과 큐레이터의 세계보다는 훨씬 넓다. 이 뛰어난 작가들의 솜씨를 사용하면서 일반인에게도 다가갈 수 있는 소재, 를 생각했을 때 사물은 훌륭한 답이다.

각자의 글이 하나의 책으로 완성되는 과정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는 5년 이상 연재되었다는 동명의 칼럼에서 150편을 가려 뽑은 것이다. 가장 순수한, 혹은 단순한 싱글 컴필레이션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반이정은 수정을 거쳐 <사물 판독기>를 완성했다. "원고를 붙잡고 있는 사이에 사물들의 위상에 작은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고 "형편이 실추된 사물을 보며 격세지감도 느꼈"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라는 작가의 직업답게 여러 사진가의 작품과 함께 페이지를 꾸리기도 했다. 앨범 발매에 맞춰 싱글 트랙을 리마스터링한 것과 비슷하다.

<사물 유람>은 컴필레이션과 리마스터링에서 한발 더 나아간 형태다. 이 책도 작가가 기고한 <한겨레 21>의 '너의 의미' 칼럼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현시원은 이 책의 원고를 초고 삼아 "책으로 펴내기 위해 원고를 새로 쓰고 대폭 수정하면서 사물에 대한 의심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사물에 관한 싫증과 의심을 살피"기 위해 "사물끼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상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놀이를 고안"했다. <사물 유람>이 그 결과물이다. 싱글 트랙을 영감의 비료 삼아 새로운 앨범을 발매한 셈이다.

▲ <사물 판독기>(반이정 지음,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나는 <젠틀맨 코리아>라는 남성잡지에서 이것저것을 기획해서 그게 통과되면 뭔가 찾아본 후 원고를 맡기거나 쓰고 사진이나 그림, 혹은 그래픽과 함께 종이 지면을 구성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사물 관찰기'는 나태한 기획이다. 사물의 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이 규정하는 '사물'은 '물질 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사물에 대한 글에 "제목을 붙이기도 뭐한 자유 기고문 아닙니까?"라고 따져 물어도 우물쭈물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기획이 흥미로워지는 관건은 전적으로 필자에게 달려 있다. 필자의 눈과 글 솜씨가 좋다면야 아무 것에 대해 아무 말이나 한들 아무 상관도 없다. 재미도 의미도 있을 테니까. <용가리>와 <괴물>과 <퍼시픽 림>은 모두 도시에 나타난 괴물 이야기지만 전체적인 완성도와 평론가의 평가와 흥행성적과 존재 의미엔 큰 차이가 있다. 그런 것과 비슷하다.

자연스럽게 질문이 이어진다. 그래서 이 책들이 재미있나?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답하겠다. 이 세 권의 책은 뛰어난 필자들이 부지런하게 다니며 열심히 생각하고 쓴 책이다. 이 정도만 해도 내가 몰랐던 걸 알게 된다는 기본적인 재미는 가질 수 있다. 이 세 권의 책은 좋은 책이 가져야 할 정공법적인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다. 세상엔 이렇지 않은 책이 훨씬 많다. 지면에 뭘 담을지 생각하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직업을 가진 나는 이 세 권의 책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명의 작가가 사물을 바라보고 표현한 방식도 미묘하게 다르다. 건축가 이일훈은 '카메라로 세상을 읽'었다는 부제처럼 사물을 통해 자기가 하고 싶던 이야기를 한다. <사물과 사람 사이>는 건축가라는 직업적 특성을 접시로, 사물을 무채 삼아 올린 회 한 접시와 비슷하다. 여기서의 회는 결국 본인의 주장이다. 56번 칼럼 '만든다는 것의 미안함' 일부를 발췌한다.

(중략) 지표의 상처위에 건축물이 들어서고 새 길이 트인다. 사람들은 습지와 늪지 보존에 목청을 올리지만 한쪽에선 삽질이 여전하다. 아니 한 수 더 떠 삽질만이 살 길이라 외쳐댄다. 혼돈의 세상, 건축은 맨 앞에 서 있다. 건축의 이름으로 뭔가를 만든다는 일이 대지에 내리는 축복이었으면 좋으련만 인간만을 위한 못질과 삽질은 자연에 부끄럽고 미안한 일이다.

비장한 성찰이다. 다만 이 글에서 사물의 특색과 건축가라는 필자의 특수성을 찾아내긴 쉽지 않은데, 이일훈에게 그런 것이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렇게 사물로 이야기를 꺼내며 자기 주장으로 끝나는 150개의 칼럼이 <사물과 사람 사이>의 주된 내용이다. 폐타이어를 보며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는 식이다. 이렇게 천진한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본 글이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물을 통해 스스로의 주제를 이야기하는 건 <사물 판독기>의 반이정도 마찬가지다. 대신 반이정은 미술평론가라는 직업을 보여주는 전문성 함량이 훨씬 높다. <사물과 사람 사이>가 카카오가 20% 들어간 밀크 초콜릿이라면 <사물 판독기>는 카카오 70% 함유 다크 초콜릿 정도라고 생각해도 될 듯하다. 모자이크를 이야기하며 '독립된 색유리(또는 돌) 쪼가리들의 조합으로 구체적 형상을 만드는 장식 기술'임을 알려주거나 빨간색을 이야기하며 '정열, 섹스, 광기 그리고 성혈과 근친 관계를 맺은 빨강은 위험과 금지를 경고하는 신호로 쓰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값비싼 저녁을 먹는 자리의 화제로 올릴 수 있을 법한 이야기다. 과연 훌륭한 미술평론가로구나 싶어진다.

▲ <사물 판독기> 중에서. ⓒ세미콜론

<사물 판독기>가 가진 또 하나의 미덕은 지면 구성의 완성도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두 페이지를 한 막으로 두고 왼쪽엔 이미지를, 오른쪽엔 텍스트를 배치시켰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잘 섞인다면 이 둘의 합은 다섯도 넘는 효과를 가진다. 이 책에는 그 합을 보는 재미가 있다. 글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이미지가 보여주고, 이미지에 쓰여 있지 않은 것을 텍스트가 말해준다. 작가와 출판기획자와 편집 디자이너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책에 쓰인 이미지는 자료사진이나 본인이 찍은 사진도 있지만 대부분 기성 작가의 회화/사진/설치미술 작품이다. 덕분에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미술가의 이름과 작업을 알 수 있게 된다. 한 번 더, 과연 훌륭한 미술평론가로구나 싶어진다.

현시원 역시 <사물 유람>에서 사진가 김경태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현시원은 신호등, 과일 천막, 공원 운동기구, 옥인아파트의 잔해를 이야기하며 김경태의 사진을 썼다. 반이정과의 차이점은 이미지를 쓴 방식이다. 반이정이 1(이미지)+1(텍스트)라는 흐름을 똑같이 가져가는 반면 현시원의 책에는 글이 사진과 이미지보다 훨씬 많다. 그 이유는 <사물 유람>의 성격인 놀이와 관련이 있다.

▲ <사물 유람>(현시원 지음, 현실문화 펴냄). ⓒ현실문화
<사물 유람>은 현시원이 고안해낸 어떤 놀이의 결과물이다. 앞서 인용한 말처럼 현시원은 이 책을 두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상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놀이"라고 했다. 그렇게 이 책은 꼬리와 꼬리를 문다. 흔들리는 비행기에서 느낀 불안에서 하늘에 있는 평화의 이미지를 생각하고, 그래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 본 신문에서 본 비둘기 풍선을 생각하고, 비둘기 풍선이 흰색 비닐이라 다행이라고 잠깐 생각하다가, 실제로 비둘기를 날리던 어느 대통령의 취임식을 떠올리다가, 비둘기와 평화의 상징이라는 헐거운 기호적 연관관계를 고민하는 식이다. 실로 놀이다.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같은 식의.

그래서 이 책은 사물을 깔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발언대도, 사물과 미술을 둘둘 말아 건네는 김밥도 아니다. 오히려 <사물 유람>의 발상과 흐름은 텍스트를 주로 사용하고 이미지를 한 컷씩 넣은 예술 작법에 가깝다. 이 흐름에 흥미를 느끼거나 호감을 가질 수 있다면 날씨도 좋은 요즘 하룻밤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다 좋다. 각자의 재미도 나름의 의미도 있다. 하지만 처음의 질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왜 이런 책들이 나왔을까? 왜 각자의 분야가 있는 사람들이 사물에 대한 책을 썼을까? 이 세 권의 책은 지금 한국에서 뭔가 평하는 사람들, 특히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평론가가 할 말이 없는 시대다. 그 소재가 문화라면 더욱. 지금의 한국 문화(에 속한 것, 아니면 비슷한 것) 평론가는 이리저리 할 말이 없다. 평론가가 의미를 부여하며 신나게 평론할 것들, 새로운 것, 펑 터진 것, 펄펄 끓고 있는 것, 같은 게 요즘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 분위기가 있다 한들 그걸 열심히 지켜보고 의미를 궁금해하며 그 설명을 읽던 사람들도 서가를 떠났다.

2010년대의 사람들은 예전처럼, 예를 들어 1990년대처럼 문화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저녁도 없는 삶, TV에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어도 피곤한 판에 평론을 읽는 건 조금 더 피곤하고 지루한 여가다. 그러므로 평론가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할 지면이 줄어든다. 사람들이 먹지 않게 된 농작물의 경작지가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지금 한국의 문화/대중문화 잡지 현황은 그 증거다. 한때를 호령하던 영화 잡지는 이제 겨우 한두 개만 남았다. 음악 잡지는 그 전에 사라졌고 게임 잡지는 그보다도 더 전에 사라졌다. 모든 평론가가 본인이 생산한 평론만으로 풍족하게 사는 세상이란 게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지금 그렇게 살기는 여러 모로 굉장히 어려워졌다. 평론에서라면 자기 분야에서 자기 일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명동에 있는 도삭면집은 장사가 안 되던 한때 바지락칼국수를 판 적이 있다. 면의 형태는 달라도 밀가루 반죽으로 면을 빼는 건 같으니까. 평론가의 사물 읽기는 그런 일과 비슷한 일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말할 것도 들어줄 사람도 없는 세상, 더 많은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친근한 소재를 찾아야 하는 때. 어쩌면 이 세 권의 책은 지금이 사물 말고는 딱히 할 말이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걸 알려주는 지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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