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정컨대 PC 보급의 확산에 발맞춰) 지난 세기 말부터 전 세계를 풍미하는 지식산업의 기류 하나는 '가볍게' 글쓰기라는 희한한 장르의 일대 러시 현상이다. 이 장르 불명의 창작 행위는 이때껏 정통 인문학에서 다룬 모든 주제를 마음대로 요리한다. '논문 쓰기'에 따르는 전거(典據)에의 상당한 연찬, 작성 형식에 대한 고심, 설득력 좋은 결론의 도출 같은 딱딱한 '글짓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냥 어떤 착상을 붙잡았다 하면 붓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자료가 가리키는 대로 홀가분하게 써내려가는 것이다.
그렇긴 해도 실생활에서 아주 요긴하게 써먹을 화두도 곧잘 잡아채고 나름의 '실증적인' 여러 데이터를 최대한으로 긁어모아 꽤나 그럴듯한 '의미부여→개념정립→사리분별'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의 책들도 많다. 무려 1000쪽 이상의 평전 유는 부지기수이고, 5~600쪽의 분책 시리즈물을 겨냥하는 '일상사(事)' 분야의 책들도 흔하다.
▲ <나이를 속이는 나이>(패트리샤 코헨 지음, 권혁 옮김, 돋을새김 펴냄). ⓒ돋을새김
아마도 PC의 전천후적인 또는 무소불위한 권능으로 글쓰기에('글짓기'에 고심하는 문장 천착은 희귀해졌다) 따르는 정신적/육체적 고충을 적어도 3분의 2쯤은 줄일 수 있어서 그렇지 않나 싶은데, 지식산업의 종갓집임을 자임하는 출판계는 앞으로 이런 대책(大冊)에 부득불 탐닉해야 할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평균수명이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인데다 정년퇴직 후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양반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여러 면에서 넘쳐나는 여유와 남아도는 자유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정력적인 자유기고가들의 투고가 연방 이어질 테니까.
서평 담당 편집자의 하명을 좇아 쉬엄쉬엄 읽은 두 권의 책 <나이를 속이는 나이>(패트리샤 코헨 지음, 권혁 옮김, 돋을새김 펴냄)와 <퇴적공간>(오근재 지음, 민음인 펴냄)도 전형적인 '가볍게 글쓰기' 기법을 시종일관 유지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지식산업의 현장 한구석을 본때 좋게 대변하고 있다. 두 책 다 어떤 장르 감각이 아예 없고 ,그런 속성 자체가 이런 유의 책들이 가지는 특성이기도 하다. 얼핏얼핏 떠오르는 대로 그 순정한 지식체계를 PC의 자판 위에다 아로새긴 실적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紙背)를 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만큼 여기저기서 끌어다 모아 놓은 온갖 잡다한 '정보'('지식'이 아니다)는 한정된 지면 밖으로까지 넘쳐난다. 그 점은 두 책 다 말미에 붙여 놓은 참고문헌 목록으로도 알 수 있는데, 그야말로 박학다식/다재다능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누구라도(물론 이런 '장르 불명'의 일반서를 즐겨 찾아 읽는 독자에 한할 테지만) 읽어가기에 부담 없고, 난해한 대목도 거의 없는 내용의 일반성, 문체/문맥의 소박성에 비춰볼 때 이미 명저나 정전으로 소문난 동서고금의 텍스트는 물론이거니와 석학들의 최신 저작물을 과연 참고할 여지가 있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하기야 모든 저술행위는 상당한 자기과시벽 내지는 '지적 허영'으로서의(누구에겐들 이게 없을까마는) 현학취미의 자발적 유로(流露)이므로 그런 원천적인 자기실현까지 가타부타하는 것은 주제넘은 언급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고한 여러 서적들이 피상적인 인용에 혹사당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지적해야 마땅하고, 견강부회로써의 장황한 설명은 가독성을 검질기게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주제의 심도를 파헤치기는커녕 수박 겉핥기에 머무르게 한다. 나쁜 의미로써의 '가볍게 글쓰기/장르 불명'이라는 지적도 바로 이런 인용의 남용과 남발 때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호평이든 혹평이든 근거 없는 독후감을 털어놓을 수는 없으므로 차제에 그것의 일부나마 밝혀 미지의 독자 제위의 판단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듯하다.
▲ Currier & Ives의 《The Four Seasons of Life : Middle Age》(1868). ⓒCurrier & Ives
대략 45세에서 65세까지의 연령대를 지칭하는 '중년'이라는 용어의 발명은(<나이를 속이는 나이>의 원제가 "우리의 전성기-중년의 발명(In Our Prime-The Invention of Middle Age)"이다. 멀쩡한 원제를 편집자들이 바꾸는 '참견'도 이상한 습벽이다) 기껏 100년 전쯤의'문화적 허구'에 기대고 있다는 책 <나이를 속이는 나이>는 서두에서부터 '중년 연구사'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모든 발명품은 그 개량의 역사를 알아야 할 터이므로 일면 타당한 접근이다.
그러나 곧장 미국식 생산/경영의 관리법이자 일반사전에도 표제어로 실려 있는 '테일러 시스템'에(더불어 '포드 시스템'도)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노동시간, 노동 효율성의 표준화, 세분화를 통제해야 한다는 선의의 이 '과학적 관리법'이(1911년에 출간된 책명이기도 하며, 그 후 '테일러리즘'은 보통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시간절약, 노동 강도를 제도적으로 점검·강화함으로써 '중년'을 일자리에서 일방적으로 퇴출시켰다고 하는데, 이런 에두르기는 '노동력의 사물화'나 '인간소외'과정의 기술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이 책의 주제와는 일정하게 겉도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정신노동자/육체노동자의 피로감과 우울증을 대비하는 의학적 상식을 주마간산격으로 늘어놓고, 여성노동력의 분화과정을 언급하며, 소설가 헨리 제임스가 처음으로 대중화시켰다는 '신여성'이라는 용어의 근원을 인용한다. 그야말로 활달한, 거침없는, 산만하다고 할 정도로 정서가 펄펄 끓어 넘치는 글쓰기가 아닐 수 없다.
저자가 화려한 경력의 현역 저널리스트여서 '다방면에 걸쳐 모르는 게 없지 않나'싶게 미국사회의 전반적 현상을 이차판에 한 두름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하려고 덤빈다. 당연하게도 '공산당 선언'과 프로이트도 맛보기로 선을 보이며, (미국의 경우에 한하지만) 영화, 광고, 자기계발서, 성형수술의 초창기 역사까지 저저이 일러준다. 후반부에 들어가면 소비욕구에 부응하는 대량생산체제의 가동, 의학 산업으로서의 보톡스와 박피술의 출현, 섹스 산업에 동원되는 여러 성기능 증상과 그 장애 따위에 대해서도 포괄적인 지적 공세를 늦추지 않는다, 횡설수설은 아닌 듯싶은데도 저자의 성동격서(聲東擊西)에는 한편으로 기가 질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잡학의 대가 내지는 딜레탕트의 표본을 운 좋게 만나게 되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다.
▲ <퇴적공간>(오근재 지음, 민음인 펴냄). ⓒ민음인
오늘날 이 땅의 노인 문제의 명암을 나름대로 고찰하고 있는 후자 <퇴적공간>은 표면적으로 서울의 특정지역, 그중에서도 주로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 등지에서 소일하는 노인 군상을 예의주시하는 르포르타주 형식을 취하고 있다(흐지부지로 끝나고 말았지만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장르 불명'은 겨우 면하고 있는 셈이다). 앞의 책 <나이를 속이는 나이>가 서지적 고찰에 주력한다면(가끔씩 자료 취재차 여기저기를 방문하여 전문가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피실험자가 되는 모험을 즐기기도 할 정도로 정력적이다), <퇴적공간>은 카메라까지 지참하고 나선 걸음이라 더없이 '가벼운 글쓰기'를 자청하고 나선 격이다.
그러나 막상 본문을 읽어보면 기록물로써의 장르감각은 일찌감치 중동무이하고(몇몇 노인들의 개인적 '사정'을 성실히 경청하고 난 후에 어떤 일반적인 '담론'을 도출해내려는 의욕이 아예 없었던 듯하다), 그야말로 동서고금의 명저를 간단없이 인용함으로써 저자의 지적 관록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시학>을 거론하는가 하면 <광기의 역사>를 두둔하는 식이다. 뿐만이 아니다. 크리스테바, 헤겔, 하이데거, 들뢰즈, 듀란트, 틸리히 등을 섭렵한다.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학자-교수가 이처럼 박람강기(博覽强記)의 본을 보인다니 실로 감탄을 불금케 하는 어떤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박학이 도처에, 나아가서 여러 전공분야마다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상념'을 떠올려 보면, 앞으로 우리의 인문학 저작물이 이 책 속에서 피상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예의 그 명저들에 대한 상대적 열등감을 떨쳐버릴 시기가 가까운 장래에 들이닥칠 테니 여간 반가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앞에서 지적한 인용의 남발과 그 견강부회가 이 책의 전문(全文)에 깔려 있는데, 멋진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물의 성과는 남의 지적 재산에 대한 분별없는 '따오기'와 그것으로의 '짜깁기'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만 들어보면 이렇다. 아무리 역사적 사실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조선조 초기에 '기로소(耆老所)'라는, 노령에 이른 고위급 문관의 우대정책으로써 요즘 말로 바꾸면 대통령 직속의 (비록 형식적이긴 할망정) 정책자문기구가(임금도 해당 나이에 이르면 저절로 들어가게 되어있었다고 한다) 있었다는 것쯤은 풍문으로도 들었을 터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 기로소의 존치 의의(意義)를 지금의 탑골공원에서(곧 '퇴적공간'이라는 곳이다) 서성이는 노인 군상에 대비한다.
▲ 보물 제638호 <기사계첩>. 조선 숙종 45년에 열렸던 기로회의 행사장면과 당시 참석했던 기로소 노대신들의 초상 등으로 꾸민 화첩.
'노인'이라는 생물학적 나이 말고는 비교할 실마리가 전무하지 싶은데, 그 우대/홀대의 비교는 아무리 시적/환상적/낭만적 반추라고 해도 전적으로 어부성설이다(그래서 '자유로운 글쓰기'에 품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면 함구무언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금세기는 '낭비'의 시대니까). 하기야 그런 전대미문의 '발상' 자체가 이처럼 겉만 화려한 저작물을 태동, 탄생시킨 동력원이기는 할 것이다.
그밖에도 한가로운 '한눈 팔기'는 이 책의 주특기라서 막상 '노인 문제'라는 다급한 주제의식을 한사코 저만치 따돌리기에 바쁘다. 이를테면 낙원상가에 있는 영화관 '헐리우드 클래식'에 가서 흘러간 명화 <셰인>을 본 감상을 회고담까지 곁들여 풀어내는가 하면, 너무나 진부한 <몽유도원도>의 탄생 일화까지 쉬임없이 그려간다. 흉보면서 닮는다는 말대로 서평자도 과감하게 '인용'을 한 차례만 쓰기로 한다면, "이처럼 몽유도원도는 지금의 종묘시민공원이 결코 실버 세대들의 유토피아가 될 수 없음을 일러주는 단서를 제공한다"(157쪽)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런 직유는 얼토당토 않는 말의 낭비거나 학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저자 자신의 사적인 조문 일화까지 '통과의례' 운운하면서 곁들이고 있으니, 그 허풍스러운 어휘력의 부적확성이야 어찌 됐든 '장르 불명'의 글쓰기는 그 경계를 어디까지 확장해 갈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야말로 '함부로 쏘아대는 화살'인 셈이다. 그래도 이 책의 편집상 눈요깃거리라면 기왕의 미술 관련서적에서 늘 봐오던 여러 명화(名畵)와 조각상을 아무렇게나 오려 와서 싣고, 저자가 취재하면서 찍은 평범한 거리 사진의 임장감(臨場感)이 그나마 돋보이기도 하며, (공동저자격인) 어떤 화가의 친절한 캐리커처를 곁눈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지적할 미달사항도 숱하지만, 두 책 다 읽히는 '문장/문맥'에 대한 배려나 숙고가 아예 안 비치고 오자/오기도 보여서 오독의 소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점을 말해두어야 한다. <나이를 속이는 나이>에는 '생식성'이라고 사전에서 밝히고 있는 generativity를 '생산성'으로 의역(?)하고 있는데(167쪽) 단순오기인지 교정 부실인지 알 수 없고, <퇴적공간>에는 '사회적 분리 수거 기준 연령'(61쪽), '원각사비 근처 화단 경계석'(75쪽), '목표 소비자 집단 외곽'(194쪽) 같은 '명사 나열'이 여러 문장 속에 새겨져 있는데, 가독성과 의미 전달의 식별이야 논외로 치더라도 '마감시간에 쫓겨 헐떡거리며 쓴 신문기사체'처럼 다가온다는 점이 서평자만의 예외적인 감식안이기를 바랄 따름이다.
하기야 인용의 적절성에 대한 취사(取捨) 분별력을 잠재우고 있는 책에서 문장/문맥/문체의 묘미를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런 '급수'의 책에서 '중년의 자기계발'과 '노인의 불안/소외'같은 주제를 다각적으로, 예컨대 개인적 각성과 사회적 배려를 모색하는 '치열한 담론'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주문일 게 틀림없다.
▲ 지하철 종로3가 역에 모인 노인들. ⓒ프레시안(김윤나영)
그러나 저러나 오늘날의 모든 '글쓰기' 행태는 천방지축의 너무나 만만한 도락거리로, '여유만만한 부르주아의 잃어버린 과거사의 회고취미'로, 숱한 '정보'를 마구 인용함으로써 현학적 자기도취벽을 즐기는 자가당착의 지적 유희로 줄달음치고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통독 후에는 반드시 저자의 어떤 이미지랄까 '캐릭터'가 여실히 떠오르는 것을 보면 역시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진리인 듯싶고, 책이란 언어제도는 유식보다는 무식이 저절로 까발려지는 반면교사인 듯하다.
요상한 행색의 번역물과 요란딱딱한 포장의 국내저작물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이런 때일수록 매서운 서평으로 옥석을 가려냄으로서 물질적/정신적 낭비를 줄여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우리의 출판 현실과 역량이 워낙 훤히 비쳐서 걱정이 앞설 뿐이다. 의례적으로 말미에 적곤 하는 '망언다사(妄言多謝)' 같은 낡아빠진 옛말을 이런 글에도 덧붙여야 하는지 서평자는 잠시나마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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