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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가 겨냥하는 '소시민' 감수성, 옹호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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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가 겨냥하는 '소시민' 감수성, 옹호하는 이유?

[프레시안 books] 크리스토퍼 래시의 <진보의 착각>

크리스토퍼 래시의 <진보의 착각>(이희재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원제는 The True and Only Heaven: Progress and its Critics)을 논평하는 일은 두 가지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하나는 1991년, 즉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속에 '자유주의의 승리'가 울려 퍼지던 때에 출판되었다는 점을 감안해서 시간적 거리를 메워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지성사라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열정적이면서도 자유로운 형식의 글이며, 사회비평이라고 보기에는 매우 풍부하게 사상과 이념의 역사를 다루고 있어서 압축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저자가 스스로를 역사가이자 공공 도덕가[public moralist]로 생각했다는 것, 그리고 말년에 "래시는 1994년에 사망했다"고 썼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 크리스토퍼 래시. ⓒmichaeljkramer.net

하지만 진보가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천국"이라고 단언하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래시의 노력보다는 쉬울 것이다. 사실 그의 논증이나 주장은 분명하며, 그가 진보라고 말한 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진보의 실패를 겪고 있는 우리 시대, 우리 사회에도 꽤나 큰 반향을 낳을 수 있다.

크리스토퍼 래시가 진보와 그 비판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다시 읽기 혹은 다시 생각하기(second thought)라는 작업을 하는 전제는 "낡은 정치 이념들은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설명하기에도, 건설적 행동에 나서도록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에도 그 역량이 소진되었다"는 것이다.(15쪽) 이는 현상적으로 서양 세계에서 우파의 재부상 및 좌파의 후퇴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래시가 보기에는 우파의 성공도 "도덕 질서와 집단의 목표를 되살려내지 못했다."(16쪽) 이런 좌파나 우파 모두 "기술 발전과 경제 발전이 바람직하고 불가피하다"고 똑같이 믿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진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래시는 진보라는 관념 자체를 다루지 않고는 "목적의식과 방향감각"을 되찾을 수 없다고 본다.(17쪽)

이런 문제의식으로 래시는 진보라는 관념의 기원을 추적한다. 보통 진보 관념은 기독교의 섭리관을 세속화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 주장을 하는 현대의 대표적인 사람은 미국 신보수주의의 주창자로 간주되는 로버트 니스벳이다. 이에 대해 래시는 기독교 윤리의 핵심은 예언자 전통에 있으며, 이에 따르면 "신국은 세계의 종결점이나 '미래 사회의 이상'으로 설정되지 않았다."(46쪽) 그리고 이런 예언자 전통은 "사람이 얼마나 결점이 많은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자각하도록 거듭 일깨워주었"으며, "예언은 역사를 궁극적 승리의 약속이라기보다는 도덕적 실패의 기록에 훨씬 가깝게 만들었다"는 것이다.(47쪽)

이에 반해 무한한 향상이라는 진보 관념은 18세기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경제라는 기계를 밀고 나가서 생산력의 끝없는 확장을 불러올 수 있으리라는 좀 더 특수한 가정"에서 나왔다. 다시 말해 "프랑스 계몽주의의 막연한 유토피아주의가 아니라 정치경제학이라는 새롭고 냉정한 과학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54쪽)

▲ 18세기 말 면직공장의 모습.

이어 래시는 이런 정치경제학의 선구자라고 하는 애덤 스미스, "진보와 빈곤의 유기적 통일성"에 관심을 기울인 헨리 조지, 그리고 검약 비판을 통해 자본주의를 구원한 케인스 등을 검토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정도와 방향으로 진보의 난점을 인식하거나 드러내긴 했지만 결국 욕망의 무한한 확장과 풍요의 문화라는 20세기 진보 관념으로 이어지는 길을 닦았다. 그 결과는 "의무라는 발상은 고루"하며, "자기 스스로에게 지는 의무가 가장 소중한 의무"가 되는 세상, 소비자라는 이상이 시민의 이상을 대신하고 노동 윤리는 풍요의 이상에 자리를 내준 사회가 되었다.(82쪽) 이에 대해 래시는 "삶은 중대한 일"(리처드 니부어)이라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낙관주의가 아니라 희망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희망은 진보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희망이 요구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믿음, 사악한 이들이 고통을 받고 잘못이 바로잡히고 세상의 기본 질서를 비웃고도 처벌받지 않는 일은 없으리라는 확신"이다.(89쪽)

물론 근대는 반근대와 함께 갔으며, 진보라는 미래에 대한 확신은 향수라는 과거에 대한 집착을 낳았다. 제2장 '향수, 기억의 퇴진'과 제3장 '사회학에서 바라보는 공동체'는 각각 향수와 전통 사회를 둘러싼 옹호와 비판을 다룬 것이다. 래시가 보기에 향수는 진보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이 아니다. "향수는 과거를 기껏 불러내서는 산 채로 파묻는다. 향수는 진보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다. 진보에는 피상적으로만 반대할 뿐"이다.(133쪽) 유명한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를 쓴 퇴니에스나 카를 마르크스, 윌리엄 모르스, 루이스 헨리 모건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낭만주의의 자본주의 비판을 받아들이고, 공동사회의 친밀함과 포근함을 인정하긴 했지만 결국 사회는 어떤 발전 단계를 거친다거나 역사는 운명이라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주체의 무시는 도덕적 둔감함으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거대한 역사적 오산으로 이어졌다."(176쪽)
▲ <진보의 착각>(크리스토퍼 래시 지음, 이희재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거대한 역사적 오산의 한 면은 "상품, 정보, 인구의 범지구적 순환이 모두를 윤택하게 만들기는커녕 부국과 빈국의 격차를 벌려" 놓았다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194쪽) 그렇다고 수전 손택이 말하는 "재앙의 상상"이라는 것도 또 다른 숙명론에 불과하다고 래시는 말한다. 어쨌거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지배적 전통의 그늘에 가려있던 사회비평 전통들이 주목받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시민 인본주의"와 "공화주의의 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버나드 베일린이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 및 미국의 건국 이념에 관한 1950년대의 "자유주의적 합의"를 비판하며 로크식 자유주의 이외에 공화주의가 미국 혁명의 주요한 원천이었음을 밝혀내면서 시작되었으며, 고든 우드가 이를 확장하였다. 분명 이는 역사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여이다.

그런데 래시가 보기에 베일린과 우드 이후의 역사가들은 공화주의를 전부로 만들어버리는 우를 범했다. 혁명기 공화주의의 대표자로 간주되는 토머스 페인 같은 인물에 대해 래시는 "공화주의자도 아니고 '원조 자유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아무래도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를 똑같이 써먹지만 이 성분들을 섞어서 새로운 것을 빚어낸 서민주의[populism] 전통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말한다.(207쪽) 페인뿐만 아니라 오레스티스 브라운슨, 윌리엄 코벳 같은 이들도 공화주의로 묶지 말고 "상업적 진보의 수혜에 의구심을 품었으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전문화가 도덕적 독립성의 사회적 기초를 저해할까 봐 두려움을 품었던 전통의 대변자"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 래시는 1960년대 이후의 신노동사(new labor history)의 연구 성과에 기댄다. 신노동사는 "노동계급의 급진주의가 가지고 있는 장인적 기원, 그 '생산자' 이념, 혁신적 산업주의에 맞선 예전 생활 방식의 수호, 강한 향토적, 지역적, 국민적 정체성"을 보여주었으며, 따라서 래시는 "19세기 노동계급 급진주의를 (…) 서민주의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서민주의 자체를 순전한 농본주의적 충동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서민주의의 농본주의적 갈래를 모든 종류의 군소 생산자들에게 호소한 폭넓은 운동의 일부분으로 여겨야 한다"고 한다.(246쪽) 이렇게 서민주의라는 말을 넓게 쓸 때 부딪힐 수 있는 난점이 있다는 것을 래시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19세기 말에 벌어졌던 미국의 서민주의 운동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저물어간 흐름으로 보는 호프스태터 같은 자유주의적 해석에 맞서 민주주의적 정치 문화가 나타날 수 있는 "서민주의적 계기"로 보는 로런스 굿윈에 기대어 서민주의를 "생산자주의"로 분명하게 규정한다. 그가 보기에 19세기 서민주의는 "위험에 처한 기술들(농사 기술을 포함해서)을 옹호했고 공채 채권자라는 새로운 계급에 저항했고 현대 금융의 총체적 기제와 임금노동에 저항했다. 서민주의자들은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를 망라하여 과거의 정치 전통들로부터 가산 소유와 여기서 비롯되는 개인적 독립이 시민 의식의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선결 조건이라는 원칙을 물려받았다."(253~4)

이후 래시는 세 개 장에 걸쳐 칼라일과 에머슨을 내세워 진보에 대한 칼뱅주의적 비판을 재구성하고, 프래그머티스트인 윌리엄 제임스와 생디칼리슴 철학자인 조르주 소렐, 길드사회주의자인 G. D. H. 콜 등을 통해 영웅주의와 노동자의 독립성을 재검토하고, "혁신주의" 시대 미국의 생디칼리슴과 지식인들의 반응을 가지고 당대 노동과 문화의 의미를 드러낸다. 이를 통해 래시는 진보를 비판한 영웅적 비관주의, 도덕적, 문화적 고갈에 대한 경고, 불굴의 덕성에 대한 집착, 정치를 정의와 도덕률에 대한 고려 없이 권력 투쟁으로 보는 관점에 대한 거부 등을 읽어낸다.

▲ G. D. H. 콜 ⓒlibcom.org

여기까지 서민주의 전통과 기독교 예언자 전통 등을 통해 진보의 흐름과 대립하거나 다른 결을 드러낸 래시는 초기 민권 운동의 마틴 루터 킹의 성공과 좌절을 검토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종합한다. 킹은 "자유주의 신학과 기독교 현실주의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도 스승들이 설파한 터무니없는 진보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456~7), "낙관주의와 희망의 구분"을 할 줄 알았다.(457쪽) 또한 킹은 당시 미국의 공용어인 자유주의의 언어로 말했지만 "부당한 고난으로 가득 찬 세계의 올바름을 긍정하던 자기 동족의 언어로도 말했다."(458쪽) 이렇게 자유주의적 낙관주의와 희망의 원천을 넘나들면서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킹은 "자유주의의 마지막 영웅"이었다.(459쪽)

하지만 민권 운동의 성공 이후 킹이 북부로 갔을 때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남부와 달리 북부의 빈민가는 처참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흑인 공동체의 사기를 끌어올릴 단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466쪽) 이런 이유로 킹은 분배의 문제를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위해 저항이 아니라 정치로 방향을 돌렸다. 하지만 래시가 보기에 이런 "사회민주주의"로의 방향 전환은 집단으로서의 흑인의 자긍심을 깎아내리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힘들게 살아가는 중하층 백인들의 반감만을 불러일으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을 때 차별 철폐를 위한 노력은 법정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한 사회 안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과 대중은 굉장히 소원"해졌다.(479쪽)

▲ 마틴 루터 킹. ⓒboktowergardens.org

이런 판단은 이 책의 주요한 문제의식이자 비판의 대상인 자유주의 지식인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민주주의를 "무르주아지"(booboisie=boob+bourgeoisie)의 통치라고 하는 헨리 L. 멩켄, 전문가주의를 주장한 월터 리프먼과 서먼 아널드, 정치 언어를 의학 언어로 갈아치운 아도르노 등의 <권위적 성격>, 호프스태터의 서민주의에 대한 왜곡에다 케네디 암살 사건 보고서까지를 살펴봄으로써 래시는 미국 자유주의 지식인의 자기 고립을 드러낸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서문에서 이미 한껏 조롱한 바가 있다. "알고 보니 좌파는 미래와 싸운 것이 아니라 후지고 몽매하고 생각이 짧아 진보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싸웠다."(33쪽) 마이클 왈쩌의 개념을 빌리자면 "연결된 비판가"가 아니라 "초연한 비판가"였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 래시는 바로 그 진보적 자유주의와 좌파가 공격한 "중간 미국"의 소시민 감수성을 옹호한다. 그것은 "도덕적 현실주의, 공짜는 없다는 의식, 한계를 존중하는 의식, 진보에 대한 회의" 등이다.(9쪽)

좌파와 우파가 모두 공유하는 무한한 향상으로서의 진보 관념에 대한 비판의 주된 근거가 (인간과 자연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 하에서 우파가 끝없는 혁신과 경박한 소비의 대변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래시가 말하는 깊이와 의미가 있는 삶, 독립성과 참여 등은 모두 새로운 좌파의 준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화폐-상품 관계가 구석구석 침투해 있는 오늘날 모두가 이런 삶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대안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가 불러낸 서민주의 전통은 계기로서가 아니라 향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들어가야 할 문이긴 하지만 좁은 문인 것은 분명하다. 또한 (소)시민이자 생산자로서의 자긍심과 독립심은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는 장면에서 이런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누구의 자긍심과 독립심인가? 가장인가 부모인가? 그러면 여성은? 혹은 더 나아가 개인은 부재하는 것인가? 물론 가족에 대한 대안을 구성하지 못한 것이 페미니즘의 막다른 지점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여전히 질문으로만 남지만 언젠가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문은 좁은 문도 아니고 희미하게만 보일 뿐이다.

후기

특히 최근에 진보라는 말이 '종북'이라는 말과 등치되는 한국의 현실에서 진보를 근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 혹은 에피스테메로 놓고 그 한계를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는 의문이다. 생태주의나 녹색 운동까지도 진보로 분류하는 현실을 보면 이런 의구심은 더욱 커진다. 따라서 새롭게 말을 위한 투쟁을 요구되며, 이에 기초하여 한국의 이념적 지형도를 다시 그리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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