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수백 명의 승객들을 객실에 가둬둔 채 자기들 먼저 구조선에 오른 선장과 항해사 등 선원들의 비겁하고 무책임한 행위가 전 국민의 분노를 낳았다. 어떻게 말 잘 듣는 어린 고등학생들에게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해놓고 자기들만 탈출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검찰에 의해 살인죄로 기소되어 중형을 받을 모양이다. 금쪽같은 아이들을 졸지에 잃은 부모들에게는 그런 중형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 세월호의 선장을 포함한 대다수 선원들이 계약직 근무자 즉 비정규직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들이 받던 봉급도 선장과 항해사라는 직위에 걸맞지 않는 낮은 수준이었다. 더구나 이윤 추구에 눈이 먼 청해진해운 회사는 승객 구조 정규 훈련을 실시한 적도 없었다. 설사 정규 훈련이 실시되었다 하더라도 비용 절감에 눈이 먼 경영진이 비정규직 선원들을 그 정규 훈련에 참가시켰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그런 비정규직 선원들에게 승객 구조에 대한 책임의식과 구조 능력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 아닐까?
인천시 중구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 있는 세월호의 선사 청해진해운 사무실 정문에 '노란 리본'이 장식돼 있다. ⓒ연합뉴스
물론 선장과 항해사가 수백 명의 승객들을 놓아둔 채 도망친 행위는 도덕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특별한 구조 능력이 없다 해도, 누군가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지 말고 빨리 갑판으로 나와 물에 뛰어들라'는 방송만 했어도 수백 명을 살릴 수 있었다. 그들의 이기적인 파렴치 행동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 비정규직이건 정규직이건 관계없이 그들은 세월호의 선장과 항해사로서 그 배의 승객 안전에 대한 막중한 도덕적, 법적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 경우 제기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그런 막중한 도덕적, 법적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일자리에 비정규직 근무자를 채용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올바른 일인가? 친구들과 이 주제를 놓고 술자리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 비행기(여객기)의 조종사와 승무원이 만약 비정규직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놓고 다시 치열한 논란이 진행되었다. 아시아나 항공의 보잉기가 1년 전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착륙하다가 추락하였다. 그 당시 자기 몸 다친 것도 모르고 승객들을 구조한 여자 승무원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기사화되었다. 그런데 만약 그 여승무원들이 계약직(비정규직)이었고 비상시의 구조 매뉴얼과 업무에 관한 아무 정규 훈련도 받지 않았다면, 과연 그러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능했을까? 만약 그 조종사와 승무원들 모두가 계약직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허드슨강의 기적'의 이면 – 계약직 조종사의 고달픈 인생
세월호 침몰에 대비되어 요즘 많이 거론되는 사건이 이른바 '허드슨강의 기적'이다. 2009년 1월, 뉴욕 상공을 날고 있던 여객기 엔진에 새떼가 빨려 들어와 엔진이 정지하자 조종사가 비행기를 인구 밀집 지역에 추락하지 않도록 조종하여 허드슨강 위에 불시착시켰다. 기장과 승무원들은 침착하게 승객들을 순식간에 대피시켰고, 특히 기장은 기내에 최후까지 남아 혹시라도 탈출하지 못한 승객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때 마침 주변을 지나가던 여객선들이 소방구조대원들을 태우고 나타나 겨울의 추운 허드슨강물에 빠질 위험에 처한 승객과 승무원들을 구조하였다. 비행기가 추락했는데도 단 한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
▲ 2009년 허드슨강에 불시착한 US항공 1549편의 사고 원인은 여객기 엔진에 빨려들어온 새들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National Transportation Safety Board
허드슨강의 기적은 세월호 참사와 대비되는 영웅담으로 최근 우리나라에서 TV에 보도되었다. 그 여객기 기장인 체슬리 설렌버거는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방송과 언론이 – 그리고 정치권과 국민들 모두가 – 외면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자신의 책임을 다한 영웅 설렌버거 기장은 정작 "비행기 조종사라는 직업에 훌륭하고 똑똑한 이들이 계속 매력을 느껴 몰려올지 걱정스럽습니다"라고 발언한 것이다. 설렌버거 기장은 비행기 조종사를 비정규직에 가까운 낮은 처우로 대우하는 미국의 새로운 노사 관행으로 인하여 미국에서 항공기 참사가 빈발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동료와 승객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이 국가를 무능하게 만드는가?
이번에 읽은 책 <무엇이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마이클 페렐먼 지음, 김영배 옮김, 어바웃어북 펴냄)에는 '허드슨강의 기적'을 낳은 설렌버거 기장의 생생한 의회 증언이 담겨 있다(82쪽). 허드슨 강의 기적이 일어난 지 1달 뒤인 2009년 2월 24, 미국의 항공사고 관련 의회 청문회에 참석한 설렌버거 기장은 미국의 항공회사들이 비행기 조종사들을 어떻게 믿을 수 없을 만큼 형편없이 낮게 대우하는지에 대해 말했다.
그 의회 증언 2주 전에 발생한 미국 컨티넨털 항공사의 비극적 충돌 사고에 대해 언급하면서, 설렌버거는 충돌 사고가 난 컨티넨털 항공사 소속 부조종사의 한해 연봉이 1만7000 달러(우리 돈 1800만원)에도 못 미치기 때문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투잡(two job)을 뛰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 낮은 소득으로는 공항에서 가까운 주택의 비싼 가격을 감당할 수 없어 원거리에서 출퇴근해야 하는 조종사들이 많으며, 그래서 조종사들이 돈과 시간을 아끼려고 공항의 승무원 휴게실에서 새우잠을 자고 다시 비행 일정을 소화하는 일도 빈번하다고 말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것은 국가가 이행해야 할 최소한의 기본 의무이다. 박근혜 정부가 비난받는 까닭은, 부유한 1퍼센트 국민들의 재산과 소득을 지키는 일에는 열심히 나서지만,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는 지극히 무능하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능한 국가, 국민의 생명을 잘 지키는 유능한 국가는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설렌버거 기장은 자기 동료들의 공통적 특징인 전문성과 헌신성에 비하여,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들을 형편없이 대우하는 항공 회사들의 이윤 추구를 비난했다. 미국에서도 허드슨강의 기적과 같은 아름다운 에피소드는 드물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항공사고가 발생할 경우 여론과 언론은 비행기를 몬 노동자(조종사)에게 비난을 쏟아낸다. 개인적 영웅주의에 기대는 (잘못된) 정서가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 기장과 승무원을 쥐어짜는, 그리하여 승객의 안전보다 이윤을 더 중시하면서 결과적으로 종업원들의 헌신성과 영웅주의, 창의성을 갉아먹는 항공사들의 책임은 여론과 언론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84쪽).
미국에서 조종사들이 오늘날처럼 형편없는 처우를 받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레이건 대통령에서 부시 정부로 이어지는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의 지배가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항공 관제사들의 장기 파업을 분쇄했고, 1만 명의 관제사들을 해고했다. 그때 이후 미국의 항공 산업은 노동시장 유연화(비정규직 증가)와 노동조합 해체, 규제완화(탈규제)의 상징이 되었다.
미국의 신보수주의 사조를 충실하게 모방·추종해온 우리나라의 집권 여당들은 '서비스업 규제 완화', 이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경제성장이라는 명분으로 지난 20년 동안 운수교통 서비스업에서 줄기차게 규제완화와 함께 노동시장 유연화를 관철시켰다. 69세의 노인이 비정규직 바지 선장 노릇을 하면서 25세의 초보 정규직 항해사와 1등 항해사에게 조타를 맡긴 채 가장 물살이 험하다는 진도 앞바다로 배를 몰게 하고, 자신은 방에서 딴 짓하다가 바지도 못 입고 혼자 도망치는 위험천만하면서도 허탈한 사태는 그렇게 '정치경제적으로' 출현하였다.
노동자가 제대로 대접받는 국가가 안전한 국가
세월호의 상습적인 화물과적 행위에 대해 1인시위로 항의한 항구 노동자가 있었다. 그런데도 정작 항운노조는 그의 항의를 묵살했다. 만약 항운노조가 제대로 된 노동조합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세월호의 상습적 화물과적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화물과적이 없었다면 이번처럼 세월호가 순식간에 침몰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세월호를 운영한 청해진해운에 제대로 된 노동조합이 있고, 그 노동조합에 비정규직 선원들도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면 어땠을까? 나아가 독일과 스웨덴의 대기업에서처럼, 청해진해운의 경영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이사회에 종업원(선장과 모든 선원 포함)을 대표하는 종업원 대표 이사들이 절반(독일) 또는 1/3(스웨덴) 가량 참가했다면 이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침몰 사태가 벌어졌을까?
▲ 지난 4월 16일 세월호가 기울어져 있는 모습. 배의 앞쪽에 위치한 화물들이 배가 기우는 방향으로 쏠려 있다. ⓒ연합뉴스
물론 스웨덴과 독일에서도 인재로 인한 선박‧항공기 안전사고는 발생한다. 그렇지만 우리에 비해 발생 빈도는 훨씬 낮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선원과 선장, 조종사 등 종업원과 그 대표자들(노동조합과 종업원 대표 이사 등)이 회사의 경영과 의사결정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승객뿐 아니라 종업원들의 생사를 좌우하는 안전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종업원이라면,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는 노동운동이라면, 무관심할 리가 없다.
대다수 경제학자들의 반노동적 세계관
물론 <무엇이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는 항공 참사가 아니다. 이 책의 주제는 어떻게 경제학자들이 노동과 노동조건이라는 주제를 일관되게 무시해왔으며, 그리하여 친자본, 반노동의 입장을 지치지 않고 설파하는지를 독자들에게 세밀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 마이클 퍼렐만(Michael Perelman)는 폴 스위지와 함께 미국의 유명한 좌파 저널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를 운영해온 인물이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교수인 그는 이 책에서 '노동자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서,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에서 폴 볼커(Paul Volker), 마틴 펠트슈타인(Martin Feldstein),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 같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유명 경제학자들의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적 세계관이 어떻게 일관되게 친자본, 반노동의 입장을 경제학 이론의 모습으로 만들어냈는지 그 속살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학자들의 보수적인 반노동적 발언과 행태야 이미 다른 책들에서도 자주 접하는 내용이다. 이 책이 다른 책들에 비해 매우 신선한 점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 경제학자들에 비하여 '찬 이성, 더운 가슴'의 따뜻한 경제학을 만들었다고 자주 칭송받는 알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과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그리고 애덤 스미스조차도 실제 현실의 노동과 노동자의 삶, 노동조건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고 더구나 애정도 없는 인물들이라고 묘사하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무엇이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에서 저자가 특별하게 집중하여 비판적으로 다루는 인물이 애덤 스미스이다.
애덤 스미스는 왜 하필이면 핀 공장에 대해 이야기할까?
▲ 1800년 경 애덤 스미스의 초상화. ⓒWikimedia Commons
애덤 스미스가 18세기 말 쓴 <국부론>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부분이 노동 분업의 효율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핀 공장의 사례이다. 핀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자들 간의 분업과 각 작업자의 전문화는 높은 효율을 발휘하여, 혼자라면 한 직공이 하루에 핀 한 개도 제대로 못 만들지만, 핀 공장에서는 10명의 직공이 하루에 4만 8000개의 핀을 만들었다.
그런데 저자 페렐만이 주목하는 점은 다른 데 있다. 스미스의 핀 제작소를 공장으로 인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핀 제작소는 겨우 10명의 직원이, 그것도 기계의 도움도 없이 수공업적인 분업에 의존하는 일종의 영세 소기업이었다. 그런데 페렐만에 따르면 애덤 스미스의 시대에 이미 대공장이 출현하고 있었다. 더구나 스미스가 살고 있던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와 에든버러에는 대규모 무기 공장과 철강업체들이 가동 중이었고 그곳에서는 공장 노동자들이 기계와 용광로 앞에서 땀 흘려 일하고 있었다. 스미스의 친구인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은 수백, 수천 명의 광부들이 땀 흘려 일하는 탄광에서 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는 이런 생산 현장의 모습이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그곳에 채용된 증기기관과 기계의 모습도 없고, 공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노동과 노동조건에 대한 묘사도 없다. 왜 그럴까?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이데올로기적 편향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애덤 스미스가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가 된 까닭은 경제학을 생산이 아닌 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237쪽).
애덤 스미스가 그린 멋진 신세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 노동자이건 자본가이건 - 상인이며, 모두는 자유의지에 따라 자유로운 시장(free market)에서 자신의 상품을 동등하고 공정하게 거래한다.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free market capitalism)이 애덤 스미스가 꿈꾸는 이상향이다. 이런 세계에서 애덤 스미스가 꿈꾼 이상적인 노동자들은 시간 엄수와 아름다운 노동규율(시장 규율), 그리고 신뢰할만한 행동과 품성 등 중간계급(middle class)의 미덕을 드러내 보이는 것만으로도 출세하여 스스로 부유해질 수 있다. 스미스의 세계에 자본과 노동 간의 대립, 계급적 대립은 없다. 땀 흘려 열심히 일하고 검약·저축하는 누구에게나 중간계급이 되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 반면에 도덕적으로 방탕·타락하여 열심히 일하지 않고 검약·저축하지 않는 자들은 가난한 상태에 머무른다.
애덤 스미스와 알프레드 마셜을 추종하는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
▲ 1921년, 알프레드 마셜. ⓒWikimedia Commons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말 발생한 외환금융위기가 '중상주의'(mercantilism) 체제 즉 박정희 + 재벌그룹 체제 때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으로 대두하면서, 박정희 체제(국가 주도 경제) 및 재벌그룹 체제의 해체가 지상 명령으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국가주도, 재벌·대기업 주도의 '왜곡된' 시장 경제를 해체하고 제대로 된 '합리적 시장' 경제를 확립하려면 애덤 스미스가 주창한 고전적 자유주의(구자유주의)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견해가 특히 진보적 시민단체와 진보 경제학계의 큰 축을 형성하고 있다. '찬 이성, 더운 가슴'의 경제학자이자 오늘날 신고전파 경제학의 원조인 영국의 알프레드 마셜 역시 우리나라의 개혁진보파 경제학계의 정신적 스승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스미스가 묘사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고전파 경제학에, 그리고 마셜의 신고전파 경제학에 과연 '더운 가슴'이 있기나 한 것일까? 이 책에 따르면, 스미스와 마셜이 묘사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자유 시장에서 '기회의 평등'은 누구나에게 보장되어 있다. 단,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는 순전히 개개인의 도덕적 품성에 좌우된다.
"스미스가 창조한 이런 상상 속의 교환의 세계에는 계급 적대감과 착취, 지배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라기보다는 교환자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 노동계급의 대다수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고용주 신분으로 전환한다."(238쪽)
근면한 자에게는 성공을 보장하고, 나태한 자에게는 처벌하는 곳, 그것이 바로 '자유 시장'이다. 따라서 자유 시장이야말로 정의와 공정·공평이 넘치는 곳이며, 자유와 평등(공평)이 넘치는 곳이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의 생존 당시 벌써 출현하기 시작한 대공장의 대량 생산 체제 하에서는 스미스가 꿈꾸었던 하층민의 출세, 즉 계급의 상향 이동이 당연히 거의 불가능했다. 수백,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지긋지긋한 중노동에 묶여 있는데, 더구나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종일 일해도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노동조건에서 과연 검약과 저축이 가능할까? 그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즉 자유의지에 따라) 땀 흘려 일하는 것이 가능할까? 요즘 우리나라의 말로 바꾸자면, 하찮은 일자리에 묶여 하루 종일 일해도 월 130만 원을 겨우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 오르는 '기회'를 잡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TV 드라마에나 등장하는 신데렐라 스토리일 뿐이다.
▲ 1946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 ⓒwww.imf.org
<무엇이 우리를 무능하게 만드는가>에 따르면,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자기가 살던 곳 바로 근처에 있던 대공장과 그 공장 노동자들의 삶에 주목하지 않았고 그들에 대해 묘사하지 않은 것은 매우 영악한 이데올로그였던 스미스의 의도된 행동이었다. 지금도 현대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생산보다는 교환을 중심으로 시장 경제를 묘사하면서, 노동자들 역시 상인으로서 자신의 상품(노동력)을 자유롭게 시장에서 거래하는 장사꾼이라고 묘사한다. 애덤 스미스와 알프레드 마셜의 전통을 잇고 있는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은 노동자들의 대량 실업사태마저도 '그들의 선호가 노동에서 여가(실업)으로 바뀌었다'고 묘사하는 게 무리가 아니다. 대량 실업자마저도 노동자들의 자발적 선택,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과 선호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이렇듯,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개혁 진보파 경제학자의 다수가 존경하는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애덤 스미스와 알프레드 마셜, 그리고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친자본, 반노동 성향과 엘리트주의, 귀족적 태도를 잘 드러내준다.
보이지 않는 손, 보이지 않는 수갑
이 책의 본래 영어 제목은 'Invisible Handcuffs of Capitalism', 즉 '보이지 않는 수갑 자본주의'이다. 18세기의 애덤 스미스에서 21세기의 루커스에 이르기까지, 자유와 평등, 공정과 정의를 달성한다고 칭찬받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실제로는 부자유와 불평등, 불공정과 부정의를 낳는 '보이지 않는 수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획일주의와 시장주의로 점철된 주류 경제학은 지난 200년간 시종일관 노동을 옥죄어 왔으며, 그것은 노동자들의 잠재적 혁신성과 창조성을 억압하여 그들의 인격적 자기계발을 억누르며,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자체의 활력과 생산성 향상마저 억누른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이 책에는 자본주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딱딱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리스 신화와 미켈란젤로의 조각품이 소재로 사용되며, 더구나 바람직한 새로운 대안적 노동 체제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오케스트라 연주에서의 연주자와 지휘자의 상호 관계라는 사례까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문학과 미술, 음악을 아우르는 저자의 수준 높은 시각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손은 노동에 대해서만 수갑으로 작용할 뿐이며, 자본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자애롭기 그지없다. 사기업과 자유 시장의 이기성과 탐욕, 배금주의를 신성시하며 찬양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경제학은 '보이는 주먹', 즉 국가(state)의 경제 개입을 거부한다. 그리고 줄푸세, 즉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질서는 세우자고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찬양자들이 이 나라의 지배자로 있는 한, 대형 산업 재해와 세월호 참사 같은 대형 안전 재해는 언젠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 지난 18일 '가만히 있으라' 침묵시위 참가자 100명 전원이 연행됐다. 박근혜 정권은 '국민의 침묵'마저 통제하기 시작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