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번역본 <불안의 서>(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펴냄)가 아니라 원서 <불안의 책>에 대해 논하였으므로, 글 제목을 제외한 본문 내에서는 <불안의 책>으로 표기하였으며, 포르투갈어 발음(예. "수아르스")도 현지 발음에 따라 표기했음을 알린다. (필자 주)
2014년 현재 한국인의 불안에는 경제적(고용, 생계) 불안의 의미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물론 페르난두 페소아도 평생 '비정규직' 프리랜서 활동으로 빠듯한 생활을 유지했지만, 경제적으로 윤택해진다고 해결될 종류의 불안이 이 책 <불안의 책>에서 다루는 불안은 아니다.
원제목의 'Desassossego'(데사소세구)라는 포르투갈 단어도 한국어의 '불안'처럼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이 아니다. (반면, 'sossego'라는 말은 조용함, 평정, 안심 등의 뜻으로 자주 쓴다.) 페소아가 이 말을 발명했다고 하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지만, 그가 이 말의 의미를 단순한 심리적 동요 이상으로 확장한 점은 맞다. 그래서 각기 다른 불안을 가진 개인들이 이 책 안에서 보편적인 메아리를 발견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이 책을 "불안의 사전"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 작가는 "불면의 책"이라고 불렀다. 리스본의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깨어나 '느낌의 열기'를 가누지 못한 채 쓰인 이 책이, 잠 못 드는 밤에 읽기 좋은 것은 사실이다.
<불안의 책>은 책일까?
아니라고, 많은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이유는 뭘까? '비(非)책'이라는 표현도 논문이나 연구서에 자주 등장한다. 왜 이런 말들이 나올까? 그 '파편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책으로 묶을 계획은 있었지만, 끝내 꼴을 갖추지 못한 채 유고만 남는 바람에 이 '책 아닌 책'에다 책의 꼴을 부여하는 일은 후세대의 몫이 되었다. 그런데 페소아가 애매한 노트를 남겼다. "내밀한 표현들, 몽상이나 논리적인 단절로 특징짓는 고유한 문체를 잃지 않는 범위"에서, 그러나 "최대한 엄격하게" 선별해야 한다고. 결국, 엮는 이의 판단에 따라 매번 다르게 구성될 수밖에.
뭐가 맞는가, 아니 무엇이 (애초부터 없었던) '원 책'에 가까운가? 어떤 질서를 부여하자니 원래 의도에서 벗어나 왜곡될 여지가 있고, 말자니 출판할 방법이 없다. 페소아를 영미권에 소개하는 데 공헌한 번역가 리처드 제니스의 경우, 제본 없이 낱장이 흩어진 형태를 제안하기도 했다. 인터넷에 업로드 해놓고 독자가 직접 구성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http://arquivopessoa.net/에서 많은 발췌본들을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동료 아르만두 코르테스-로드리게스에게 보낸 편지(1914/11/19)에서 페소아는 "내 영혼의 상태가 지금 나를 <불안의 책> 작업에 몰두하게 만들고 있네. (…) 그런데 그저 단상들! 단상들! 단상들뿐"이라고 호소한다. '단편, 편린, 단문, 조각'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fragmento'라는 말을 '파편'으로 바꿔 읽어보자. <불안의 책>은실제로 전통적인 의미의 책보다는 파편 모음에 가깝다.
물론 파편화 경향이 페소아에게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며, 다른 문학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가령, T. S. 엘리엇은 자신의 시 '황무지'에 고의적인 분절을 가했다. 에즈라 파운드의 슬로건 "새롭게 만들라(make it new)!"가 보여주듯, 모더니즘의 정신은 더 이상 거대서사로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없는 현실세계를 재현하는 데 있어 기존의 방식을 답습할 수 없었고, 새로운 형식을 찾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 중 하나가 파편화 경향이었다.
그런데 페소아의 경우 이 징후가 형식적 기교 차원을 넘어 본인의 삶 전반에서 관찰된다. 그의 '이명(Heteronym) 체계', 즉 단일 작가를 복수의 문학적 주체로 '쪼개는' 행위, ('이명'과 관련해서는 필자의 7월 중 출간 역서 <페소아의 산문선 – 페소아와 페소아들> 참고) 그것도 이성적이고 기계적으로만 쪼개는 게 아니라 각 파편에게 생명을 부여하려는 시도야말로 파편화의 극적 예가 아닐까.
단, 부분의 합이 곧 전체는 아니라는 점에 주의하자. 그렇다면 <불안의 책>이란 제목 하에 묶인 파편들을 모으고 맞추면 완성되는 퍼즐은 무엇일까?
미완성인가, '불'완성인가?
<불안의 책>에선 잘 드러나지 않지만, 페소아는 문학적 야망과 도전의식이 대단했던 작가다. 본인을 거장들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했으며, 이명 '알바루 드 캄푸스'를 통해 '최대, 최다, 모든 것 되기'의 꿈을 표현한 파우스트적 상상력의 시인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원대한 포부를 안고 대문자로 된 '그 책'(Livro)을 쓰려고 시도하는데, 번번이 소문자로 된 '어떤 책'(livro)을 쓰는데 그치고 만다는 점이다.
그가 꿈꾸는 책은, 최소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모두를 위한, 그리고 누구를 위하는 것도 아닌 책" (Ein Buch für Alle und Keinen) 또는 그 이상이며, 이를 쓰도록 충동질하는 동인은 미지의 초월적 힘이다. 그런데 이 거창한 꿈이 산산조각 나며 파편만 양산되는 꼴이다.
다른 작가들이 문학적 형식으로서 단상을 차용했다면, 페소아는 자기가 지은 미로에 정말로 빠져버린 인상을 준다. 동시대의 미완성 작품들, 가령 카프카의 <성>이나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는 그래도 상당 수준 책의 골격을 갖추고 있었고,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완성될 수 있지 않았을까. "완성되지 않은 것 <--> 완성될 법하지 않은 것"은 다르다. <불안의 책>에는 시간이 더 주어지더라도 끝내 완성될 법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페소아는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극적 추락이 아니라, <불안의 책>을 붙잡고 있던 이십여 년 동안 매일매일 일상 속에서 주저앉는다.
그런데 이러한 '실패'가 오히려 특별하게, 아니 심지어 완성된 대작들보다 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또 다른 이명 알베르투 카에이루가 "자연이란, 전체가 없는 부분들"이라고 표현한 시구가 힌트일 수 있다. <불안의 책>도 그렇다. 어느 부분을 떼어내도 무너지지 않고, 아무리 잘 짜 맞춰도 완성은 없다. 전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나는 건 부분들 뿐. 이 파편화와 완성불가능성은 단순히 작가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위대한 한 권의 책이 불가능한 시대'를 유례없이 잘 반영하는 특징들이 아닐까?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베르나르두 수아르스가 가공의 인물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일종의 픽션으로 간주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의문스러운 관점이다. 그렇다면 일기인가? 어느 영문판 서평은 이 책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기'라고 평가했지만, 날짜도 없고 일상도 거의 부재한 '없는 인물'의 내면의 기록을 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일기의 형식을 가장한 장르 없는 글쓰기가 아닐까? 실제로 아미엘(Henri-Frederic Amiel)의 <일기>를 여러 번 언급하긴 하지만, 그 <일기>는 명확한 주체가 쓴 일관성 있는 일기였다.
불안의 책 안에 있는 것?
시대를 뛰어넘어 마음 깊은 곳을 달래주는 목소리가 있다. 정확히 뭔지 표현할 재간은 없지만, 짚이는 건 있다. 일단 '통찰'이 있다. 깊고 넓고 날카로운.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통찰을 둘러싸고 있는 일반적이지 않은 것들의 존재다. 그것들이 오히려 핵심이요, 이 통찰을 전형적인 교훈이나 아포리즘과 다르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이다. 몇 개만 짚어보자.
'싫증'.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tédio, 지루함, 무료함) 중 하나이다. 이게 어째서 특별한 감수성인가? 수아르스는 별 볼일 없는 직급의 사원, 회계사 보조였다. 높은 위치의 간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몸을 써가며 하루 종일 고된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도 아니었다. 중간쯤, 존재감 없는 위치에 애매하게 낀 사회적 계층만이 느낄 수 있는 반복과 따분함은 다분히 요즘의 감수성과도 잘 통한다.
'미시와 사소함'. 이전 작가들이라면 무시했을 소재들에 천착하기. 아주 작은 단초를 가지고 사고를 증폭시키는 능력. 페소아에겐 증강현실이 따로 없었다. 그가 생각의 시선을 던지는 곳에서 현실은 증강되었다.
'위로'. 페소아 자신도 이 책을 쓰며 많은 위로를 찾았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독자들에게도 그게 가능하다. 위로해 '주지'는 않지만, 해주겠다고 나서는 것들보다 훨씬 위로가 된다. 심지어 최초의 '힐링'도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부정'. 끊임없는, 모든 것의 부정.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식의 이중부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외에도 고립, 성찰, 관찰, 꿈 등 끝도 없다. 연관성 없이 무질서하게 흩어져있는 파편들이라, 누가 무얼 찾든 조금씩은 다 찾으리라는 기대를 준다. 페소아가 이 카오스에 부여한 유일한 질서는 베르나르두 수아르스라는, 그야말로 '안정감을 안 주는' 한 명의 인물뿐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한명이자 여러 명이다. 상징주의 경향이 농후한 비센테 게데스를 시작으로, 준비를 위해 썼다가 다른 책의 저자로 변신한 테이브 남작, 마지막에는 그가 총애하던 시인 알바루 드 캄푸스까지 끼어든 흔적이 있으며, 무기명의 텍스트도 많다. 하지만 주저자는 베르나르두 수아르스다. 졸음이 오는 피로한 상태에 '나타나는' 페소아의 문학적 얼터 에고, 수아르스. 그런데 페소아에 따르면 수아르스는 이명도 아니고, 그저 '준-이명'이며, 단지 자기 성격의 절제(切除)일 뿐이란다.
어떤 사람들이 <불안의 책>에 빠져드는가?
지난 3월, 오슬로 시내에 크리스티앙 크옐스트룹(Christian Kjelstrup)이라는 노르웨이 작가가 약 일주일간 이색적인 '팝-업 스토어'를 차렸다. 이 가게에서 파는 물건은 오로지 <불안의 책> 노르웨이어 번역본. 다른 책은 일절 없다. 크리스티앙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불안의 책>이 역사상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기획의 변을 대신했다. 또 조각가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도 <불안의 책>을 읽고 영감을 받아 작품 '페르난두 페소아'(2007~2008)을 만들게 되었단다. 사람들은 왜 페소아에 열광할까? 페소아를 좋아하면 자동적으로 최소한 서너 명의 작가를 좋아하는 걸 의미하기 때문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어떻게 읽을까?
탁월한 페소아 비평가인 주제 질(José Gil)은 <불안의 책>과 함께 읽기 가장 좋은 책으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꼽았다. 어느 고원에서부터 시작해도 무방한, 비선형적으로 위계질서 없이 무한히 뻗어가는 구조적 특징으로 알려진 책이다. <불안의 책>도 정복이나 완독을 벼르기보다 느긋이, 내키는 대로, 산책하듯 음미하는 편이 나으리라.
또, 독일어권 번역의 수준이 대체로 높다는 상식은 있다해도, 상당한 표현 차이가 존재할텐데, 왜 독일어를 선택하게 됐는지 독자로서 의문이 생길법도 하다. 종전의 이탈리아어 중역본 <불안의 책>(김효정 옮김, 까치글방 펴냄)은 최초였고, 페소아를 유럽 전역에 알리는데 이탈리아인 안토니오 타부키의 공헌이 지대했으며 옮긴이 후기에 분명히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해가 갔다.
영어에 능통했기에 영어로 쓸 만한 것들은 직접 영어로 썼으며, 다른 한편 "나의 조국은 포르투갈어"라고 말한 페소아가 <불안의 책>을 포르투갈어로 쓴 데는 그만한 의미가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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