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무서운 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 입장에선 더욱 그렇다. 뉴스를 보면 아이를 봐주는 돌보미가 아이를 학대하는 경우도 있고, 조금 더 자격이 있어 보이는 어린이집, 유치원 교사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학교도 다르지 않다. 여간한 학교폭력은 더 이상 뉴스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예기치 않은 사고도 많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공간마저 거대한 사고 현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올해만 해도 2월에는 경주에서 강당이 무너져 많은 학생들이 죽거나 다쳤다. 4월에는 세월호가 침몰했고, 5월에는 고양 종합터미널에서 화재로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안전 불감증이란 단어는 일상용어가 됐다.
범죄나 큰 사고가 아니더라도 부모의 불안은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일상 속에서 접하는 것들도 무섭다. 예전과 달리 지금 아이들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달고 산다. 당장 스포츠 신문 기사 제목이나 광고만 봐도 아찔하다. 자주 접속하는 포털 사이트에서도 클릭 서너 번이면 반쯤 벗은 여자 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고, 어른이 봐도 충격적인 욕설과 자극적인 광고들이 난무한다. 여섯 살짜리 딸아이가 혹시라도 이게 무엇인지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지 난감하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PC방에서 지하철에서 아이들이 게임에 빠져 있는 모습을 너무나 쉽게 본다.
현실이 그렇다 보니 많은 부모들에게 스마트폰과 인터넷은 게임 혹은 음란물을 의미한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 세대와 달리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타고난 신체기관의 일부인 양 사용한다. 아이들에게 화면은 눈의 연속이고 메모리는 두뇌의 일부다. 아이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마트폰을 들고 인터넷의 바다를 잘 헤엄치면서 얻는 것도 많지만 잃는 것도 많다.
TV는 어떤가. 시도 때도 없이 '19'(19세 이하 시청 불가) 딱지가 붙은 프로그램들을 방송하고, 은밀하던 성적 은유는 보다 직설적인 표현으로 여과 없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 현대의 부모들은 아이의 성장에 뿌듯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무서운 세상으로 나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강원도교육청이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설치한 CCTV 아래로 학생들이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감시 또한 사랑?
하지만 성장과 함께 아이는 부모의 시선을 벗어나고, 부모에게는 아이의 안녕과 안전을 확인할 길이 점점 없어진다. 이렇게 부모 시선 밖에 머무는 아이들에 대한 불안은 기술을 통한 감시라는 해결책을 만들게 했다. 이제 부모들은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CCTV와 위치가 추적되는 스마트폰 등을 이용해 확인할 수 있다. 기술이 가져온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이런 서비스들이 있으면 아이들은 더 좋은 환경에서 안전하게 자랄 수 있을까? 이미 전국의 길거리는 물론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학원은 물론 패스트푸드점이나 쇼핑몰처럼 아이들이 많이 갈 만한 곳에는 이미 CCTV가 있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전국에는 450만 대에 달하는 CCTV가 있다고 한다. 대략 인구 10명에 1대가 있는 꼴이다. 직장인의 경우 집에서 회사까지 평균 150여 차례 CCTV에 촬영된다고 한다. CCTV 설치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범죄를 예방해 준다고 필요의 근거를 들지만, 전국에 450만 대의 CCTV가 깔린 오늘도 대한민국 의 범죄율이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을 통한 위치추적은 어떨까? 위치추적 서비스는 일정 정도 오차를 가지고 위치를 알려준다. 아이가 대략 학원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는 있어도, 그곳이 학원인지 같은 건물 안의 PC방인지를 알려줄 수는 없다. 더구나 학원에 있는 친구에게 스마트폰을 잠시 맡겨둔다면 이 서비스는 완전히 무용지물이다.
점점 진화하고 있는 다른 감시 방법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부모 세대보다 IT 기기를 훨씬 잘 다룬다. 막는 어른들보다 그 틈을 빠져나가는 아이들이 더 빠르다. 이런 단속 행위들은 아이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정서적 안정감을 주기보다 그저 자신이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만 줄 뿐이다.
물론 감시의 욕망이 시작된 원인은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부모의 선량한 마음이다. 누구도 자식을 음란물과 폭력, 사고의 한가운데 두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행동하는 것은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감시는 '단속하기 위해 주의 깊게 살피는' 행위를 말하며, 이런 행위는 믿을 수 없는 상대를 대상으로 이뤄진다. 경찰이 상습 범죄자를 감시하는 일이나, 사장이 직원을 감시하는 일 모두 그 본질은 ‘의심’이다. 그래서 감시자의 시선 아래 피감시자는 '신뢰할 수 없는 단속의 대상'이 된다. 사랑과 신뢰가 기본이 되어야 할 가족,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감시는 어떤 설명으로도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없다.
또한 아이들은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감시와 피감시자가 지닌 근본적인 힘의 차이를 알게 된다. 그래서 자기들끼리도 서로 감시를 시작한다. 이들은 타인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에서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젊은 세대들은 오히려 사생활의 노출과 소비를 즐기기까지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감시할 권한을 요구한다. 젊은 연인들이 각자의 스마트폰에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앱이나, 상대방 휴대폰의 남은 배터리 용량을 알려주는 앱을 깔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렇게 타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장치를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들이 부모가 걱정하는 상황을 제공하는 바로 그 회사들이라는 점이다. 아이들에게 음란물과 중독의 세계로 문을 열어주는 케이블TV, 초고속 인터넷망 제공업체들과 스마트폰 회사들은 이제 자신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통해 아이들을 실시간 감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병 주고 약 주는 꼴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들의 농간 속에서 그저 아이를 철저히 감시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투성이 시스템을 그냥 두고 CCTV를 더 설치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하다. CCTV 바로 아래서도 범죄는 일어나고 아무리 많은 CCTV와 블랙박스가 교통사고 장면을 기록해도 교통사고는 줄지 않는다. 딱히 감시가 필요하다면 잘못된 일이 발생한 경우, 그 원인을 좀더 자세히 분석하기 위해 쓰이는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근본적인 것은 바꾸지 않고 감시를 통해 잘못한 사람을 찾고 처벌하는 데만 힘쓰고 있다.
내 아이를 지키는 길
언젠가, 학원에 설치된 CCTV로 강의실에 있는 아이들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충격이었다. 아이들은 카메라 렌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렌즈의 눈치를 살피는 아이들의 마음이 건강할 수 있을까? 차가운 렌즈가 아니라 부모의 따뜻한 눈으로, 아이들의 말투와 행동의 변화,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주어야 한다.
낮 시간, 아이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놀이터와 운동장은 대부분 비어 있다. 아이들이 조금 크면 더 이상 놀이터나 운동장에 가지 않는다. 거기에는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학원으로 향한다. 더 이상 놀이터에는 친구가 없으니 남은 아이들도 친구 따라 결국 학원으로 간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울림과 보살핌 대신 감시의 눈이 있는 공간으로 간다.
▲ 지난 4월 부산 어린이집 보육교사가 생후 17개월 된 영아를 폭행한 사실(왼쪽 원 안)이 밝혀진 이후, 학부모를 중심으로 '어린이집 내 CCTV 설치 의무화'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부산 남부경찰서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아이들을 놀이터에서 만나게 하는 것은 어떨까? 아이들이 어른들 눈치 안 보고 뛰어다니며 놀 수 있게 말이다. 몇 명이 모이면 하루에 어른 한두 명이 당번을 정해 애들을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엄마들에게는 꿈에 그리던 자유시간이 생길 수도 있다.
수많은 공동육아의 시작이 그랬을 것이다. 육아에 지친 엄마들이 하나둘 놀이터 벤치에 앉아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는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인 육아 공동체를 상상하고 서로의 아이를 돌보기 시작하며 마을의 씨앗을 뿌렸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 성미산마을을 비롯한 많은 마을공동체들이다. 실제로 성미산마을의 시작은 공동육아였다. 아이를 보살펴야 한다는 마음들이 모여 잃어버렸던 마을을 만든 것이다. 아이는 부모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고 그 움직임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나와 아이는 물론이고 우리가 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대단해 보이는 마을공동체나 공동육아도 그렇게 아이를 함께 기를 수 있는 방법을 상상했던 부모들의 작은 실천이 씨앗이 되었다. 그 어렵다는 육아 문제도 해결했으니 해결 못할 문제가 없는 공동체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을 보살필 수 있는 마을이 늘어나면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아이들을 기계의 눈으로 감시하지 않아도 좋을지 모른다.
생각해보라. 아이들에게 사고가 일어나도 CCTV는 차갑게 바라보며 그 장면을 촬영할 뿐, 아이를 위험에서 구하지 못한다. 하지만 따스한 눈길을 가진 이웃이 가득한 세상이라면 달라진다. 이웃은 내 아이를 도울 수 있다.
*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민들레>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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