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신년사에서 '변화와 개혁'을 강조하며 미래세대를 위한 혁신을 주문했다. 하지만, 정부의 개혁안이 정말 미래세대를 위한 것일까?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생명·평화·평등·협동의 정신을 살려 '정신을 집중하면 화살로 바위도 뚫을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박근혜 정부에 세 가지 미션을 전달한다.
선생을 무한 신뢰하는 학생
목표를 향해 착실하게 나아가며 '머나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청춘을 허비하지 않는 반듯한 요즘 젊은이들은, 아주 공손하다.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선생에게 무척 싹싹하고 예의 바르게 군다. 때로 명절이나 연말연시 등을 맞이하면 깍듯하게 인사를 차린 학생들의 문자메시지를 받는 경우도 있다. '아마 이런 학생들은 자신이 만나는 여러 어른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챙기겠구나, 이 나이에 어떻게 이런 처세를 배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경쟁 속에서 극단적으로 긴장도 높은 청소년기를 보내고, 이어 사상 최고의 취업난 앞에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몹시 쪼들리는 20대들이 이처럼 어른들에게 고분고분한 것을 보면 심경이 복잡해진다.
내가 만나는 대학생들은 선생을 무척 신뢰한다. 강의 시간 내내 한눈을 파는 학생이 별로 없다. 선생의 말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필기를 한다. 요즘은 강의 내용을 녹음하는 대학생들도 꽤 많다고 한다. 너무나 훌륭한 답안지를 작성한 학생이 있어서 후배들에게 자랑을 했더니, 석·박사과정의 후배들이 보인 반응은 "그 친구, 강의 녹음해서 서너 번 들었나 보네요"였다. 선생의 입장에서 볼 때 앞뒤가 안 맞거나 실수도 있을 수 있는 강의 내용을 녹음한다는 것은 찜찜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교재나 강의 자료로 만족하지 않고,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그대로 옮겨 적어서 외우고 익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완벽에 가까운 높은 학점만이 살 길이기 때문이다.
진짜 공부는 스스로 찾아 하는 거라며 세미나 조직을 권하거나 자기 목소리를 내보라고 하면 학생들은 무거운 짐 하나가 더 추가된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안 그래도 채워 들어야 할 버거운 강의 분량에 학점을 세탁하기 위한 재수강 과목, 거기다 계절수업까지 두 과목씩 꽉꽉 채워 들으며 연 4학기를 공부하는 이들이다. 'B' 학점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기를 쓰고 덤비느라 이들은 숨이 턱에 차 있다. 그런 마당에 자율적인 공부를 위한 세미나라니, 사치도 그런 사치가 없다는 느낌일 것이다. 선생님은 팀워크를 이뤄 공부하라며 '팀플(팀플레이)' 과제를 내지만 모든 팀원조차 결국 경쟁자이거나 짐이 되어버리는 상황에서 학생들은 상처를 받고 날을 세운다. 정보량이 많은 강의를 소화하고, 선생의 평가 기준에 맞춰 선생의 관점을 열심히 기록하고 익히느라 바쁘다. 선생의 강의는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충실한 습득과 내면화의 대상이다.
'바꿀 수 없으니 순종한다'는 청년들
수년 동안 학생들과 함께 고전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토론한 후 글을 쓰는 교양 수업을 했다. 매학기 빼놓지 않고 다룬 주제는 '세대 갈등'이었다. 부모와 선생, 나아가 사회, 제도, 이념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로 상징될 수 있는 것들의 요구와 아직 권력을 갖지 못한 비주류이자 자식인 '나'의 욕망이 갈등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도록 하고 싶었다.
첨예한 부자 갈등을 다루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상황을 담은 작품을 주로 다루었다. 예를 들어, SBS가 2011년 방영한 <뿌리 깊은 나무> 중 부왕인 태종과 훗날 세종이 되는 이도의 갈등 부분을 편집해 함께 시청하고 토론했다. 이 드라마는 아버지가 아들에 대한 애정으로 제시하는 길이라 할지라도 자식이 추구하는 방향과 충돌할 수 있고, 때로 아들의 목을 조르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였다. 부자 갈등의 상황에서 죽음의 의미를 상징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해석한다면, 상당히 현실적인 스토리이다.
학생들은 진지했고 적극적이었지만 유독 이 주제를 다룰 때면 진행이 쉽지 않았다. 일단 부자간 갈등을 극적으로 부각시켜 들여다보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했다. 뜻밖에도 많은 학생들은 극 중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을 깊이 이해했다. 비록 이도가 괴로워하고 절망했지만, 아들의 목에 칼을 겨누고 무력시위를 하는 이방원의 폭력적인 모습은 이도를 바른길로 이끌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세계관과 태도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며, 그 덕분에 이도가 좋은 임금이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어린아이에게 폭력적일 정도로 학원 순례와 공부를 강요하는 부모의 의지도 자식을 위한 사랑에 뿌리를 둔 것이며, 결국은 그런 과정을 거쳐 자기 몫을 하는 성인이 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이는 우리 역사의 독재조차도 시대적 조건 속에서 필연적이었으며, 그와 같은 과정이 현재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는 논리와 쉽게 결합했다. 비정규직 고용을 일삼는 대기업의 입장도 공감하고 이해했다.
학생들이 모두 이런 입장은 아니었지만, 매 학기 비슷한 입장을 강경하고 끈질기게 고수하는 논객들이 여럿 등장했다. 또 상당수의 학생들은 암묵적인 태도나 표정, 간단한 대답으로 이들에게 동조했다. 말로는 주체성을 결론 삼았던 학생들도 과제 글쓰기에서는 일관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채 내용상 아버지와 학교, 사회의 권위와 권력을 받아들이거나 인정하는 쪽으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저도 힘들긴 했지만, 현실이 그걸 요구하니까요."
"글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것 같긴 하지만 지나치게 이상적인 거죠."
"이 사회를 바꿀 수는 없는 거잖아요."
강의 시간에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무엇보다 사회와 제도는 힘이 세고 바꿀 수 없는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사회 속의 인간은 그에 적응해야 한다. 그러니 가급적이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색하는 편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불평하고 저항해봤자 자신만 도태될 뿐이라고 했다.
대학생들이 현재 그 자리에 있기까지, 그들은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고 최대한 욕망을 억눌러야 했다. 어쩌면 똑똑할수록, 더 높은 서열에 속하는 대학에 다닐수록 그들은 더 높은 수위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그 사회가 요구하는 몸과 마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들의 욕망과 솔직한 마음을 억누르는 것은 공포심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준비하는데 삶을 바치지 않고 한눈을 팔다가 다음 단계 레벨 업에서 탈락할지 모른다는 공포. 아무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고, 추락하는 삶에 최소한의 안전판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사회에 대한 공포. 세상을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꿈같은 소리다. 적응과 순종만이 살 길이다.
이들이 과연 보수주의자일까
얼마 전 신문에서 '일제 감점기에 일상을 영위한 민초들이 모두 친일파라는 관점은 어불성설'이라는 역사학자 전우용의 칼럼을 읽고 이 시대 청년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당시 한국인들은 '민족문제'에 대해 말하기 싫었거나 관심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던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총독정치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면 바로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억압 상황이어서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며, 그 '말할 수 없음'에 익숙해진 것뿐이다. 압제 속에서 표현된 것이 속마음이 아니라 압제의 사슬에서 벗어났을 때 표현된 것이 속마음이다."(2015년 9월 22일 자 <경향신문>)
가혹한 생존 조건 속에서,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정해진 룰을 벗어나면 그대로 탈락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라는 공포 속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반응이 그들의 가치관이고 요구이고 본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공포와 압제의 사슬에서 벗어났을 때, 가치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때 선택하고 요구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국민들의 본심이고 그들의 진짜 욕망일 것이다.
가치 있는 경험이나 뿌듯한 배움의 기쁨을 맛볼 수 없는 환경에서 게임에 빠져드는 아이도 성장하지 않는 게임중독자가 되는 것이 제 본심은 아니다. 총독부와 경찰, 일제가 만든 법과 몽둥이 아래서 학교를 다니고 자식을 기른 사람들의 본심이 친일이었던 것도 아니다. 3포, 5포를 넘어 N포세 대라는 말까지 등장한 생존을 위한 투쟁의 현실 속에서, 대학에 들어가 학점을 받고 스펙을 만들어가는 20대들도 이 사회가 이 모습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이 본심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보수화된 20대, 그들은 보수주의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청년들이 제 관심과 욕망을 발견할 수 없도록 하는 사회적 압력은 거대하고 끈질기다. 하지만 그들이 기꺼이 견디며 적응하겠다고 하는 이 세계가, 곧 그들이 원하는 세계는 아니다. 그들은 '현실'을 걱정하고 두려워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마음껏 자신의 삶을 펼치고 싶어 한다.
물론 지금까지 긍정적인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이들 앞에 갑자기 20년 만에 어떤 이상한 선생이 나타나, 사회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나의 의지와 대립하지는 않는지 생각해보라고, 대립한다면 싸워야 하는 게 아니냐고, 네가 정말로 긍정해야 하는 것은 너 자신의 목소리라고 들쑤신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몸과 마음이 통째로 움직이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지지는 않을까 기우를 안고 사는 선생은, 혹시 이 아름다운 20대들이 자기 목소리를 잊지는 않을까, 힘을 갖기도 전에 목 졸려 질식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면서 오늘도 그들을 충동질한다. 내 존재를 먼저 긍정하라고.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치라고, "나를 살리라"고, "내가 원하는 세상을 내게 달라"고.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 <민들레>)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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