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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써온 글쓰기의 방법을 깨부숴라"

[인터뷰] 김언호, <나의 투쟁> 크나우스고르를 만나다

찢어진 청바지 차림, 그의 손은 따뜻했다

2015년 10월,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는 만추가 내리고 있었다. 붉게 물든 숲이 사람들의 가슴에 문예적인 심성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날 오후 나는 노르웨이의 젊은 거장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를 노르웨이의 명문 출판사 옥토버 편집실에서 만났다. 세계 문단을 발칵 뒤집어놓은 크나우스고르의 문학적 힘은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작가에게 직접 이야기 듣고 싶었다. 세계의 독자들을 함몰시키는 그의 글쓰기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긴 손가락에 키가 나보다 훌쩍 컸다. 그러나 그는 수줍음 타는 청년이었다. 그의 소설처럼 인위적 가식 같은 건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다. 찢어진 청바지에 정다운 미소를 살짝 보였다.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내 이야기에 호응했다. 그와 나는 이내 편안해졌다. 옮긴이 손화수 씨의 통역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우린 서로의 감성을 곧바로 읽어낼 수 있었다.

그의 대작 <나의 투쟁>을 이미 스터디한 나는 나름대로 그에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그의 대답도 활달해졌다. 수만 리를 날아 숲의 대륙 노르웨이를 찾아간 동양의 한 출판인에게 그는 가슴을 열고 다가왔다. 크나우스고르는 전6권 3662쪽이나 되는 <나의 투쟁>으로 지구촌을 정복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자신의 삶을 소설화한 <나의 투쟁>은 곧장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열광하는 독자들을 운집시켰다. 짧은 시일에 32개국에서 출판됨으로써 세계에 '크나우스고르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나의 투쟁>은 폭포 같은 리뷰들을 만들어내는 한편 소설 쓰기의 '새로운 차원'이라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세계의 미디어들이 그와 인터뷰하고 있다. 세계의 평론가들이 '크나우스고르'와 <나의 투쟁>에 대해 쓰고 있다.

▲ <나의 투쟁>의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한길사

그를 만나 그의 숨소리를 듣고 싶었다

나는 2013년부터 <나의 투쟁>을 스터디하기 시작했다. 세계의 미디어들이 열광하는 크나우스고르와 <나의 투쟁>은 문학 출판에 다시 나서는 나의 관찰 영역 대상에 당연히 포함될 것이었다. 나는 이 장대한 작품을 제대로 소화해내기 위해서는 작가를 직접 만나야 했다. 나의 출판 방식이라면, 저자를 직접 만나 그의 육성을 듣고 토론하는 것이다. 필요충분조건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내가 본 것은 삶이었다. 내가 생각한 것은 죽음이었다."

문학이란 삶과 죽음일 것이다.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문학일 것이다. 기존의 관념과 이론을 벗어던지면서 <나의 투쟁>은 실마리가 풀렸다고 크나우스고르는 말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서 비로소 그렇게나 풀리지 않던 <나의 투쟁>은 돌파구가 열렸다고 크나우스고르는 세계의 미디어들과 인터뷰하면서 말한 바 있다. 나는 세계를 향해서 천명하는 그의 생각들을 살펴보는 한편, 그와 만나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소설의 질료와 소설 쓰기 방법에 대해서 듣고 싶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일기장을 불태워버렸다"

저자의 책 쓰기와 출판인의 책 만들기와 독자의 책 읽기는 사실은 고유하게 독립되는 세계일 터이다. 같은 작품이라도 문화적, 문학적 배경이 다른 편집자의 책 만들기와 독자의 책 읽기는 때로는 서로 다른 연출과 해석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을 한국 독자들에게 읽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을 나는 작가를 직접 만나 모색해보려는 것이었다. 편집자의 책 만드는 문제의식과 독자의 책 읽기는 또 다른 차원의 문화적, 문학적 세계라는 걸 나는 책을 만들면서 계속 체험하고 확인하고 있다.

크나우스고르는 어린 시절 일기를 썼다고 했다. <나의 투쟁>은 크나우스고르의 또 하나의 일기장 같은 것이다.

"어린 시절에 쓴 일기장을 나는 20대 중반에 모두 불태워버렸다. 어린 시절 내가 쓴 일기가 너무 부끄러워서 태워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투쟁> 역시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그럴 것이다. <나의 투쟁>은 그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미 그와는 관계를 넘어서는 독자의 것이 되었다. 세계의 독자들이 나름대로 '해석'하는 '소설'이 되어버렸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삶과 근접한 글쓰기를 하고 싶다면, 당신이 그동안 써온 글쓰기의 틀을 깨부수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매일 글을 쓰고 음악을 듣는다

ⓒ한길사
소설 쓰기에는 어떤 문법이 있을까. '픽션'이란 이런저런 '지어냄'과 '꾸밈'과 '이론'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나는 일찍부터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크나우스고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정한 소설 쓰기가 '지어냄'과 '꾸밈'과 '이론'으로 가능할까 하는 나의 저간의 생각이 틀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환기되었다. 삶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이야기, 체험으로 도출되는 생각과 이론이 진정한 문학이자 글쓰기가 아닌가 말이다.

크나우스고르는 매일 글을 쓰고 담배를 피운다. 음악을 듣는다. 1968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났다. 베르겐 대학에서 문학과 예술을 전공했다. 1998년 첫 소설 <세상 밖에서>로 노르웨이 문예비평가상을 받았다. 2004년 두 번째 소설 <어떤 일이든 때가 있다>도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세 번째 소설 <나의 투쟁>으로 노르웨이 최고 문학상 브라게 상을 받는 등 세계의 문학상들을 잇달아 받고 있다. 2015년에는 <월스트리트저널 매거진>이 세계의 거장들에게 주는 '문학 이노베이터' 상을 받았다.

나는 아주 작은 것들에 대해 쓴다

옥토버 출판사에서 나를 만난 이튿날 저녁 크나우스고르는 오슬로 시민들의 지적 사랑방인 명문 서점 트론스모에서 후배 작가와의 토크쇼를 직접 진행했다. 갓 데뷔한 후배 작가를 성원하면서 크나우스고르는 독자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는 후배에게 물었다. 작품집을 처음으로 낸 느낌이 어떠냐고. 젊은 작가는 "떨린다"고 했다. 크나우스고르는 "나도 떨린다"고 했다. 혼자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이제 젊은 후배 작가들의 정다운 선배가 되어 있었다. 나는 노르웨이 문예 사회의 따뜻한 풍경을 보았다.

크나우스고르는 <나의 투쟁>에서 참으로 하찮은 작은 것들을 세밀하게 그린다. 기존 관념으로 무의미한 현상들을 심각하게 다룬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나의 투쟁>의 중요한 지점이다. 거대담론에 익숙한 우리 자신들의 허상을 그는 <나의 투쟁>에서 보여준다.

"나는 무의미한 것들에 대해, 보잘것없는 것들에 대해, 아주 작은 것들에 대해 쓰겠다고 늘 생각했다. 비록 그것이 지루하더라도. 그것이 이야기할 만한 것들이 아니더라도 작가들은 삶의 모방물을 자주 제조해낸다. 그것도 마치 철학적인 관점으로. 나는 그것을 거꾸로 한 것이다. 아주 심각하고 진지한 것도 시작은 늘 사소할 수 있다. 삶 속에 모든 것이 있다. 나는 너무 정성들여 잘 쓰려는 글에 진력이 났다. 그건 세계와의 거리를 만들어버린다. 세계가 사라질 지경으로. 잘 가공하는 픽션이란 세계의 진실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2012년 <나의 투쟁> 제1권이 돈 바틀렛에 의해 처음 영어로 번역되면서 크나우스고르는 전 세계에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평론가 제임스 우드는 '크나우스고르 효과'라는 말을 만들었다. 앨런 긴즈버그, 잭 케루악 같은 비트 세대 작가들과 견주었다. 크나우스고르의 소설이 갖는 '모순성'을 도스토옙스키에 비교하고 '완전한 평범성'을 톨스토이에 비교하기도 했다. <하얀 이빨>의 작가 제이디 스미스는 <나의 투쟁> 첫 권 200쪽을 읽고는 "다음 권이 미치도록 읽고 싶다"고 썼다.

<나의 투쟁>은 와이드 렌즈와 미세 초점 렌즈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그려낸다. 일상의 즐거움과 고통, 희망을 이야기한다. 지난날의 풍경과 지금 나의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소리까지 서사로 만들어낸다. 한 소년의 내면과 성인이 된 그가 마주하는 불안을 아울러 다룬다. 모든 인간이 만나는 보편적인 삶의 세계다. 그러기에 세상의 독자들이 열광한다. 자신들의 '이야기'이기에.

작가의 눈물, 작가의 심성

<나의 투쟁> 제1권은 '아버지의 죽음'이 그 주제다. 아버지와의 관계, 가족들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성장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가족사의 슬픈 풍경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은 작가의 눈물로 승화된다. 작가 크나우스고르의 경이로움은 바로 이 눈물이다. 내가 잡은 그의 손은 따뜻했고 따뜻한 손은 그의 심성일 것이다. 그의 눈물일 것이다. 그의 눈물은 우리 모두의 심연이지만 그것은 또한 승화되는 기쁨이고 희망일 것이다.

크나우스고르의 눈물은 우리 모두의 눈물일 것이다. 이 눈물 또는 슬픔이야말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힘일 터이다.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정신, 사회적 역량일 것이다. <나의 투쟁>을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것은 바로 이 눈물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크나우스고르의 눈물은 다른 말로 하면 진실이다. 인간의 진실은 눈물이다. <나의 투쟁>이 독자를 감동시키는 것은 바로 이 진실의 힘이다. 발터 베냐민이 말하는 "진실하고 지혜로운 서사"란 바로 크나우스고르의 눈물과 진실일 것이다.

그의 심성은 나의 사진으로 표현되었다

ⓒ한길사
그날 나는 크나우스고르를 사진 찍었다. 야성미 넘치는 그의 얼굴, 눈과 표정은 사진으로 담아내기에 충분했다. 그의 진실이 그 얼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에 있었기 때문이다. 크나우스고르 자신도 <나의 투쟁>에서 서술하고 있지만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영롱한 '인간의 눈'이 의미하는 진실, 그 눈의 진실을 표상하는 눈물이 또 다른 메시지가 되어 나의 사진에 그대로 표현되고 있었다.

사진이란 카메라라는 기계를 통해 새롭게 표현하고 해석하는 예술일 것이다. 촬영하는 사람의 의지와 미학으로 그 형상이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 피사체의 본성이 더 중요함을 사진을 찍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나는 크나우스고르의 본성이 나의 사진에 그대로 표현되고 있음에 다시 놀랐다.

읽는 이들을 감동시키는 크나우스고르의 이야기는 그의 심성과 이야기가 갖고 있는 본성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의 투쟁>은 세계인들을 감동시킬 것이다.

그날 내가 찍은 사진들이 한국어판 <나의 투쟁> 제1권의 표지 사진이 되었다. 책 내기 전에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을 인지시키는 특별 브로셔를 만들었는데, 내 사진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나의 사진을 좋아하고 있다. 그럴 때 나는 말한다. 크나우스고르이기에 이런 사진이 가능한 것 같다고. 그날 크나우스고르와의 만남과 대화는 이 사진들이 잘 보여준다고. 사람은 사진이고 사진은 사람이다.

크나우스고르의 '투쟁'을 오늘 한국인의 '투쟁'으로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이 왜 한국의 독자들에게 수용되는 것일까. 나는 책을 출간하기 전에 '시독회'를 두 차례 열었다. 책을 낸 후 다시 독자들의 책 읽기 합평회를 두 번 했다. 독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나의 이야기'라고 했다. 그렇다.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의 '투쟁'이다. 삶의 보편적 보고서다.

오늘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는 일이란 '투쟁'일 것이다. 거대 담론의 정치적 경제적 투쟁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용하고 넘어서는 삶의 실존적 투쟁일 것이다.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은 곧 한국인의 '나의 투쟁'일 것이다. 그러나 이 '투쟁'은 곧 나의 정체성을 탐험하는 일이자, 우리들 삶을 승화시키는 이야기가 된다. 크나우스고르의 문학과 <나의 투쟁>이 오늘 한국 사회에 존재하면서 이야기되는 이유일 것이다. '나의 투쟁' 읽기 또는 '중독성'은 한국에서의 또 하나의 문학적 행위일 것이다.

독자들의 주체적인 책 읽기

2016년은 한길사가 책 만들기 40년이 되는 해이다. 나는 책 만들기 40년을 맞으면서 '다시 독자와 함께'를 우리의 주어로 내세우고 있다. 독자들의 주체적인 책 읽기 행위가 우리의 주제다. 1980년대는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였다. 그 시대 한가운데에 책 만들기와 책 읽기가 있었다.

1980년대는 책의 시대였다. 이 땅의 젊은이들은 책을 만들고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국가 사회와 민족 공동체를 어떻게 새롭게 일으켜 세울 것인지를 사유하고 실천했다.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을 독자의 책 읽기 차원에서 나는 새롭게 모색해보고 싶다. 책 읽기와 더불어 글쓰기, 책쓰기를 독자들과 함께 해보고 싶다.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을 '우리의 투쟁'으로 승화시키는 일이다.

리뷰 없는 사회가 명작을 만들어낼 수 없다

우리 사회는 '리뷰 부재'이다. 세계인들이 어떤 사유를 하는지, 세계의 지식인들이 무엇을 담론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떤 한 권의 책이 존재하는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읽고 리뷰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의 리뷰도 거의 없다. 어떤 위작 행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알고도 담론하지 않는가. 그러면서 '베스트셀러'로 달려가고 있다.

리뷰 없는 사회가 좋은 사유, 훌륭한 이론, 탁월한 사상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독자들과 함께 '리뷰하는 밤'을 진행하고 있다. 독자들이 주체가 되는 책 읽기다. 독자들이 주체가 되어 이끌어나가는 크나우스고르의 문학의 밤도 그래서 진행하는 것이다. 독자들의 독자들에 의한 독자들을 위한 책 읽기다.

프랑스 <르몽드>지는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을 이렇게 리뷰했다.

"카오스 같다. 매혹적이다. 큐비스트 같다. 그리고 과학적이다. 한 내밀한 죽음, 사적인 죽음, 그러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죽음, 죽음이라는 것은 태양과도 같아서 정면으로 보면 눈이 부셔 눈이 멀게 된다. 죽음은 이 수다쟁이 같은 두꺼운 책의 '참을 수 없는 태양'이 된다. 사랑과 죽음 같은 주제는 힘을 가진 하나의 텍스트이고,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평범함이다. 평범함, 아니 평평함. 평면성은 오히려 크나우스고르의 힘이다. 기계적이면서도 눈에 띄는 즉흥, 살아 있는 그의 글쓰기에는 흥취와 도취의 힘이 서려 있다. 그는 또 그것을 가리고 속일 만큼의 부드러운 미각을 가지고 있다."

<나의 투쟁>을 우리 독자는 어떻게 리뷰해낼까. 작가 크나우스고르가 아닌 우리의 눈으로. 서구 지식인들의 평석이 아닌 한국 지식인들의 문학적 문제의식은 무엇일까.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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